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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41화 (141/166)
  • 141화

    “그런 것은 괜찮습니다. 광폭화 능력을 얻음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빨리 루시의 성력석을 되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데니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셀레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생명력이 깎여 나간다는 페널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이 깎여 나간다는 건, 단순히 네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만큼 네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만큼의 고통이 부여될 거란 말이다. 그래도 괜찮겠나?]

    “몇 번을 말합니까. 괜찮으니 어서 주시죠.”

    한 번 정한 뜻은 굽혀지지 않았다. 올곧은 데니스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셀레누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잠들기 전, 부디 이런 사람이 내가 정한 아이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직접 겪으니 미안하구나.]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다면, 그런 죄책감은 버리셔도 됩니다.”

    이건 데니스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희생이었다. 아니, 희생이라고 말하기도 우스웠다.

    ‘마땅히 갚아야 할 고마움을 다시 되돌려 주는 일인데, 희생이란 거창한 말까지 붙일 필요까지야.’

    그는 차라리 일이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만약 신이 이런 기회까지 주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시간을 되돌려 루시를 살려 낸다는 기적을 꿈꿀 수나 있었을까.

    그저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세상사 모든 일을 쉽게 단언하면 안 되는 법이지. 나중에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셀레누스는 말을 마치더니 루스벨라가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보이나?’

    루스벨라는 계속 대화할 사람이 없어 유령처럼 있는 것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니 괜히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황급히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너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겨 너의 희생이 그 사랑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셀레누스는 그 말을 루스벨라를 보며 하고 있었다. 신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순간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설마 이렇게 될 것을 다 내다보시고 저를 이곳에 보내신 건가요?”

    데니스가 아픈 것은 알고 있었다. 그의 생명력이 계약으로 인해 깎여 나가는 것을 고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시간을 되돌리겠다는 말까지 들은 이상, 이곳은 사라진 과거가 맞았다. 그것도 가장 끔찍한 결말을 맞은 세계였다.

    그 속에서 그녀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폭풍우 속 갈대처럼 그녀를 위해 가시밭길을 걷고 있었다.

    “글쎄요. 과연 제게 그런 날이 오기는 하겠습니까.”

    [회의적이구나.]

    “현실적인 거죠. 제게는 과분할 상상 따위는 접기로 했습니다.”

    데니스의 자조적인 말에 루스벨라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은 틀렸다. 그가 기필코 살려 낸 그녀는 결국 헌신적인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그를 되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구해 내려 과거와 현재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고마워요.’

    나를 위해 시간을 되돌려 줘서, 나를 구해 줘서, 그리고 나를 포기하지 않아 주어서.

    ‘나도 당신을 반드시 구해 낼게요.’

    이번에는 어느 한쪽이 희생하는 일 없이, 같이.

    [좋아, 계약자. 네 뜻이 변하지 않으니 광폭화 능력을 주겠다.]

    셀레누스는 다시금 데니스의 심장 위로 힘을 주입했다. 그의 가슴팍 위에 새겨진 붉은 문양 위로 시계의 초침이 생겼다.

    [그 문양의 초침이 한 바퀴를 도는 순간, 너는 숨을 거둘 것이다.]

    “그 전에는 안 죽습니까?”

    [그럴 리가. 불사(不死)도 순리를 어기는 일이니 그건 불가능해. 다른 인간이 너를 죽이고자 한다면 죽을 수 있다.]

    “초침이 다 돌아가기 전에 루시를 죽인 놈을 잡아야겠군요.”

    [그래.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그놈은 이미 황실에까지 손을 뻗어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교단이 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었군.’

    데니스의 입이 다물렸다.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이 너무나 크게 여겨졌다.

    “동료를 구해야 한다고 하셨죠.”

    [맞다. 네가 싸워야 할 대상의 이름은 아벨, 교단의 우두머리이자 현재 이 나라의 가장 큰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간이니 그에 대적할 자가 필요할 거다.]

    “그렇다면 누구를 골라야 할지 힌트라도 좀…….”

    아.

    그의 머릿속에 바로 후보가 떠올랐다. 정말 만나기 싫은 인물이라 바로 인상을 상한 파이를 먹었을 때처럼 구겼지만.

    [네가 염두에 둔 그 인물이 맞다.]

    “꼭…… 그 인간으로 해야 합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그 외에 다른 인물도 없을 텐데.]

    “하아……. 하필이면 윈체스터 공작이어야만 한다니.”

    황실도 교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상, 그에 맞서 싸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자. 그리고 황실 다음으로 귀족 사회에서 미치는 영향력과 발언권이 큰 자.

    ‘아슬란 윈체스터.’

    ……마지막으로 루시의 전 약혼자이자 그녀에게 파혼을 요청하여 매몰차게 쫓아냈던 남자.

    [싫어도 노력해 봐라, 계약자. 시간만 돌리면 그와의 협력도 없는 것이 되는 거잖나.]

    “그것참……. 예에, 감사합니다.”

    [또 말투가 불손해졌는데?]

    “기분 탓이십니다.”

    루시를 핍박했을 자들을 만나기 싫었지만, 지금 그는 똥오줌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뭐, 까짓거 해 보죠.”

    ‘윈체스터 공작은 시간을 돌리면 절대 만나지 말아야겠군.’

    그렇게 다짐하면서 그는 추운 북방으로 바로 짐을 싸서 이동했다.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

    몇 날 며칠을 마차를 타고, 말을 타고, 걸은 끝에 데니스는 윈체스터 공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를 만나고자 했다고?”

    “그렇소.”

    의외로 아슬란은 데니스를 쉽게 성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교단의 추적을 받을까 봐 신분을 숨기며 성문 검문소에서 경비병과 옥신각신하고 있던 데니스의 소식을 듣고 손님이니 위로 올려보내라 한 것은 아슬란이었다.

    “왜지?”

    “이 나라가 위험하다. 교단의 세력이 넓어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제국은 교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그러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윈체스터 공작은 대대로 북방을 지키며 황실에 충성하는 이였다. 그 점을 노려 데니스는 대의적인 명분을 내세우며 접근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심드렁한 눈치였다.

    “그대의 본론은 그게 아닐 텐데. 검문소에서 있던 소란을 들었다. 내 전 약혼녀의 일로 왔다지.”

    “…….”

    “나는 그쪽에 더 관심이 있다. 허울 같은 명분은 집어치우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길 바란다.”

    “……그러지.”

    데니스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루시의 이야기를 풀었다. 그가 봤던 치유사 루시로서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틈틈이 조사해 온 불행했던 여자, 루스벨라 지펠론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합쳐서.

    이야기가 끝으로 갈수록 아슬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꼭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 사형수 같았다.

    “고생이…… 많았겠군.”

    아슬란이 제 얼굴을 두 손으로 덮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데니스는 아무리 봐도 그가 죄책감과 후회로 뒤덮인 얼굴을 하고 있다고 봤다.

    ‘기분이 나쁜데.’

    그리고 아슬란이 뒤늦게 루시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그 광경이 정말 꼴 보기 싫다고 여겨졌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성력석을 노리던 교단에게 살해당했어. 그녀의 성력석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교단을 내버려 두면 제국에도 악영향을 끼칠 거야.”

    제국에 사실 큰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아슬란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그 점을 강조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슬란은 아까와 똑같은 반응을 유지했다.

    “제국보다 난 루스벨라, 그녀의 일을 더 돕고 싶다. 당신도 그녀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찾아왔던 것 아닌가?”

    “……무슨 꿍꿍이지? 제국의 방패로 불리던 윈체스터 공작께서 왜 지나간 인연에 집착을 하고 계신가.”

    데니스는 끝내 참지 못하고 아슬란을 추궁했다. 그가 스스로 걷어찬 약혼이었다. 인제 와서 미련을 보이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아슬란이 루시를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대해 줬다면, 이런 비극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원망도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죄를 지었다. 내 좁은 식견으로 인해 그녀를 주위 사람들의 말만 듣고 오해했어. 그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아슬란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그를 지켜보고 대번에 현재에서처럼 그녀가 무고했음을 그가 뒤늦게서야 깨달은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데니스를 의심하지 않고 독대를 허락한 거였구나.’

    공작씩이나 되는 위치의 사람이 대뜸 신분도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홀로 마주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슬란은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데니스를 부른 것 같았다.

    “당신은 나를 찾아온 목적이 있겠지. 그게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내가 돕겠어.”

    데니스는 아슬란의 참회에 젖은 말을 듣자 울컥했다. 그에게서 이런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 불쾌했다.

    “나는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어. 그곳에서 잠들어 있던 신의 파편을 만났지. 그가 말하더군. 그녀를 되살리고 싶다면, 시간을 돌리라고. 본래 그녀의 심장에 있었던 성력석을 되찾으라고.”

    “……그래서?”

    “당신의 군사가 필요해. 그녀의 복수를 해내고,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서.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나는 여기에 내 목숨을 걸었어. 당신이 그녀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 교단 놈들을 쓸어버리는 데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

    내내 셀레누스가 지겹게 지적했던 불손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데니스는 거리낄 게 없었다. 루시의 생전에 시선 한 번 준 적이 없었던 무정한 전 약혼자에게 차릴 예의는 없었으므로.

    “그거면 되는 건가?”

    “그래. 교단의 우두머리이자 루시의 성력석을 빼앗아 간 그놈은 내가 죽일 거야.”

    “그 제안, 승낙하지.”

    아슬란은 단번에 데니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데니스가 오히려 얼떨떨할 정도였다.

    “……공작은 확인 절차 같은 것도 안 거치나?”

    “됐다.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설사 거짓을 전했더라도 이제는 상관없다.”

    “어째서?”

    “만약 거짓이라면, 그래서 내가 이 결정으로 파멸한다면 그것조차 내가 받아야 할 대가겠지.”

    그녀를 믿지 못하고 어리석게 내친 과오를 받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

    슬픔과 회한에 젖어있는 아슬란의 모습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술렁이게 하기 충분했으나, 데니스에겐 아니었다.

    ‘이 새끼 마음에 안 드는데.’

    그의 눈에 아슬란은 약혼자가 있을 때 잘해주지 못한 얼간이로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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