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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40화 (140/166)

140화

“루시를 살릴 방도가 있다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충격을 받아 살릴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데니스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뭔데! 그게 뭐든 하겠어. 할게!”

[어떤 일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서 하겠다고? 용기가 가상하군.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그러나?]

셀레누스가 혀를 쯧쯧 차며 데니스의 성급함을 지적했으나, 그는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관없어. 네가 설령 신이 아니라 악마라도 좋아.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어.”

그의 눈에 광기가 넘실거렸다. 정말 빈말이 아니라 지옥 불에 뛰어드는 한이 있어도 루시를 살려 내겠다는 간절함이 엿보였다.

[네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해도?]

“그것도 상관없어.”

‘어차피 루시가 아니었으면 난 진즉 죽었을 몸이야.’

은혜를 입어 산 목숨이니, 목숨으로 갚을 수 있다면 오히려 싼 편이었다. 죽은 이를 살릴 수 있다는데 대가를 따질 여유는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려 줘. 그게 뭐든 다 할게.”

[……좋아. 이래야 내가 들어놓은 보험이 아깝지 않지.]

셀레누스가 보험 등의 소리를 운운했어도 그런 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데니스의 감각은 오로지 루시를 살릴 수 있는 방법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당장 말해 줘. 하겠다고 했잖아.”

[성질도 급하긴. 알았다. 그 전에 계약을 하나 하도록 하지.]

“계약?”

[무려 죽은 이를 살리는 일이야. 대가이자 조건으로 거는 계약이니, 동의해라.]

“해.”

[무슨 내용인지 들어는 봐야 하지 않나?]

“말해.”

[끄응……. 다음부터 말할 때는 예의를 갖춰라. 듣기가 거북하군.]

“그러지, 가 아니고 그렇게 해 보죠.”

어색하게나마 바로 경어를 사용하자 셀레누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좋아. 널 내 계약자로 삼겠다. 계약자의 인을 새길 테니 가까이 오도록.]

데니스가 다가오자 셀레누스는 그의 심장에 대고 기운을 주입했다. 금빛의 기운이 심장으로 흡수되고, 가슴팍 위로 붉은 문양이 그려졌다.

“이건 뭡니까?”

[그 문양이 있는 한, 넌 내 힘인 신성력을 빌려 쓸 수 있을 거다. 내 힘을 다 줄 수는 없어 일부만 떼어 대여해 준 것에 불과하지만, 가지고 있는 한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신성력이라고? 그런 건 교단에서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 습니까?”

그 말에 셀레누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것들은 가짜다. 내가 사라지자 정당한 힘의 주인의 심장을 열어 성력석을 훔쳐 간 도둑놈들에 불과해.]

‘심장? 훔쳐?’

가슴이 서늘해졌다. 루시의 시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화재 현장에서 유일하게 심장이 뚫려 죽어 있는 시체였다.

“그게…… 설마 루시가 죽은 이유입니까?”

[정답이다.]

말문이 막혔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루시가 죽어야 했다고?

“하지만 루시는 치유사였는데……. 신성력이라는 명칭도 처음 들어 봅니다. 사람을, 잘못 본 것 아닙니까?”

[아니. 정확하게 본 거지. 내가 잠든 후로 교단이란 놈들이 왜곡한 게 있는데, 그게 신성력 보유자를 치유사로 둔갑시킨 거라서.]

“사람을 죽여 가면서까지 그 성력석이라는 걸 얻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가 아는 치유력, 그러니까 신성력은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힘이었다. 그 힘이 뭐라고 사람을 죽여 가면서까지 얻어야 했나.

[교단 측 사람들에게는 있지. 신성력은 치유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거든.]

공격, 방어, 심지어 응용하면 금지된 주술까지도 가능해져서.

“……그런 걸 왜 만들었습니까? 신성력이면 신의 힘이니 당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텐데.”

[음……. 그러게. 내가 인간을 너무 믿고 사랑했던 게 죄겠지.]

셀레누스는 민망했는지 볼을 긁적거리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데니스에게 경고했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되겠군. 몸을 피해라. 교단의 찌꺼기들이 다가오는군.]

“……알겠습니다.”

교단이 적이라면, 그것도 루시를 죽이는 데 일조한 악당이라면 데니스도 그들에게 걸리는 불쾌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는 왔던 대로 다시 개구멍을 찾아 유유히 화재 현장을 빠져나왔다. 뒤늦게 교단에서 세운 경비병이 사방을 둘러봤지만, 데니스는 이미 도망친 후였다.

“기분 탓이었나?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별일 없었기 때문에 그 경비병은 그냥 화재 현장을 빠져나왔다. 아벨과 교단이 그곳을 지키게 하는 이유가 사라져 버린 루시의 시신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

데니스는 데벤테르 후작가를 빠져나온 뒤, 수도의 외곽에 위치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이제 됐습니까? 빨리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루시를 살릴 수 있습니까?”

[그래, 그래. 내 빨리 말해 줄 테니 너무 보채진 말거라.]

셀레누스는 채근하는 데니스를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빼앗긴 그 아이의 성력석이 필요하단다.]

“루시의 성력석을요? 무엇에 쓰기 위해서입니까?”

[그게 이 세상의 시간을 돌릴 매개체로 작동할 수 있을 거라, 반드시 되찾아야만 한다.]

“……뭐?”

당황스러움에 데니스의 입이 벌어졌다. 시간을 돌린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던가.

‘그게 가능하다고?’

듣고 있던 루스벨라도 깜짝 놀랐다. 루스벨라는 이곳의 루스벨라, 즉 루시가 죽은 것을 확인한 시점부터 매우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시간을 돌릴 수 있다니 눈이 번쩍 뜨였다.

‘여태까지 이 세계가 과거가 아니라 다른 세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이 상황이 진짜 과거일 가능성이 높아져.’

시간을 돌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세계는 아마 없어진 과거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데니스와 처음 결혼식장에서 만났을 때부터 보였던 의문스러운 행동들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순리를 어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시간을 되돌립니까?”

혼란스러움 속에서 던진 질문을 셀레누스는 엄지를 치켜들고 좋아했다.

[죽은 이를 멋대로 되살리는 것보다, 세상의 시간을 돌리는 일이 더 쉽거든. 그리고, 그에 필적하는 대가로 걸 만한 에너지원인 성력석이 있으니 괜찮다.]

“루시의 성력석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이 질문에는 루시를 살해한 인물들이 어째서 그녀를 죽였는지에 대한 동기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신이 그것을 모를 턱이 없었다.

[있었지. 그 아이는 내가 나와 인간을 위해 마련해 둔 새로운 씨앗이자, 안배였거든.]

그런데 불행히도 무참하게 죽어 버렸지. 못된 것들에 의해서.

“그게 무슨…….”

[지금은 교단 놈들이 흔적을 다 없애서 모르겠지만, 한때 이 땅에 신성력이 젖과 꿀처럼 흐르던 때가 있었다.]

신이 인간을 축복하고, 인간이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신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의 힘의 일부를 그들도 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 힘이 바로 신성력이다. 내 힘을 떼어다 준 만큼 신성력은 강력했고, 인간들은 그것을 이용해 무궁무진한 활용도를 개발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기꺼웠다. 신성력은 신의 힘이라, 모든 인간이 다 쓰지는 못하고 그 힘을 견뎌 낼 수 있는 자들만이 쓸 수 있었지만 유용한 곳에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며 셀레누스는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일부 인간들이 신성력을 이용해 내 뜻과는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신성력이 치유뿐만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데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들은 그 힘으로 남을 짓밟고 착취했다. 신성력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무가치한 살생을 번복하며 그릇된 쾌락을 즐겼다.

“그래서 스스로를 봉인했습니까?”

[그렇다. 사랑했던 만큼 실망감도 컸기에, 나는 괴로워하다 결국 인간들에게서 신성력을 회수하고 잠들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들을 사랑했기에, 마지막 희망이 담긴 예언을 남기고 잠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게…… 루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녀가 바로 때가 되면 나타날 나의 희망의 씨앗이었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은 셀레누스는 봉인되기 전에 다시 나타날 신성력 보유자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쉽게 힘을 얻고 만용을 부리지 못하도록, 힘을 개화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에게 저마다의 고통과 시련을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심장에 박힌 성력석이 각성하여 진정한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타락한 기존의 인간들이 더 비뚤어질 것을 염려해, 순수한 영혼 하나를 골라 각성하면 가장 강력한 신성력 보유자가 될 잠재력을 부여했다.

그 영혼이 각성하면, 신이 깨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각성했다는 증거는 은색 머리칼과 황금빛 눈동자지. 아마 너는 이미 봤을 테고.]

“……맞아. 루시가 불타는 저택 안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분명히 봤습니다.”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어째서 각성했는지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죽이려던 놈들에게 맞서 싸우다 각성했겠지.’

그러나 결국 그녀는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신의 안배라면서, 각성했음에도 평생을 비참하게 살다 죽고 말았다.

[혹시 몰라 그 아이의 혈육이 수호자가 되도록 만들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죽임당했을 경우를 대비해 내 파편이라도 깨어나도록 설정했지만……. 정말로 이런 최악의 결과까지 올 줄은 몰랐다.]

인간의 탐욕은 기어코 희망의 씨앗인 성력석을 주인이 아니더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아벨, 그자에게 가장 강력한 루시의 성력석이 손에 쥐어졌으니 이 세상이 혼돈에 빠질 것은 자명했다.

데니스는 그 모든 것을 굳은 표정으로 들으며 짜증을 냈다.

“됐고, 요약하자면 루시를 살리려면 그녀의 성력석을 다시 가져오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너는 내가 선택한 계약자. 나의 임시 대리인이니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그 아이의 성력석에 대고 소원을 빈다면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럼 당장 그 성력석을 찾으러 가야…….”

여관을 박차고 나가려던 데니스는 멈칫했다. 루시를 살해한 인간들은 교단이었다. 그 외엔 아무것도 몰랐다.

“……누구입니까? 그녀를 죽여 성력석을 탈취한 사람이. 그리고 그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질 급하긴. 네가 찾는 놈은 아벨이란 녀석으로, 몇백 년간 성력석의 힘을 빌려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 녀석은 나도 감지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은신하고 있다.]

“신인데 그것도 모르십니까?”

불손한 어조로 셀레누스를 데니스가 흘겨보자, 셀레누스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쏘아봤다.

[그러는 넌, 지금과 같은 상태로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여기나? 네게 신성력을 빌려줬다고 해도 혼자서는 개죽음일 뿐이다.]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현실은 암담했다. 당장 그의 가문은 몰락했으며, 교단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황실 대신에 화재 현장의 조사를 도맡아 한다는 명목으로 처참하게 타 버린 시체를 방치하는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동료를 찾아라. 그리고 네게 광폭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 단, 광폭화는 페널티가 따르니 선택해라.]

“뭡니까?”

[광폭화를 할 수 있는 순간부터, 넌 내가 빌려준 신성력을 쓰게 되면 생명력이 줄어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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