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불이야! 불!”
“빨리 물 가져와!”
후작저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화재로 난리가 났다. 저택의 모두가 잠들어 있던 한밤중에 불이 나서 더 혼비백산했다.
하인들이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불 위에 물을 끼얹어 봤지만,
“불이 안 꺼져요!”
“진화가 안 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불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살라 먹을 것처럼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저택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데니스와 루시, 그리고 루스벨라도 그것을 목격했다. 데니스가 숨겨 놨던 패물을 찾다가 불길로 환하게 밝아진 저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게 뭐야. 왜 불이 계속 번지는 거지?”
많은 사람들이 부리나케 움직여 물을 뿌려 대고 있었지만, 불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으…… 아…….”
루시는 그 불길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굉장히 두려운 괴물을 본 것처럼,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있었다.
“뭐 해, 루시! 어서 저택을 벗어나자. 여기 있다간 불길에 휘말릴 거야.”
데니스는 가문에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졌으니, 차라리 이렇게 정신없는 틈을 타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거기다 화상이 심한 루시를 보면, 이런 일에 민감하게 반응할 게 뻔해.’
그러니 어서 화재 현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자 루시의 손을 붙잡았지만, 루시는 그의 손을 떨쳐 내고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불 가까이 다가갔다.
“가야, 해……. 저기, 에, 내, 원수, 가.”
“무슨 소리야, 루시! 어서 가야 한다니까!”
끼익. 기어이 불에 타서 기둥 하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불똥도 튀었다. 데니스는 보물찾기 중 하인들에게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은 로브에 불씨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나 루시는 처음으로 데니스의 손을 거부하며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가고자 했다.
“도련, 님. 먼저, 가세, 요.”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널 두고 가…….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
“저는, 저곳, 에, 가야만, 해요.”
루시의 초록색 눈동자에 불길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보이는 눈으로 루시는 데니스에게 똑똑히 전했다.
“저기, 에, 불을, 지른, 사람이, 저와, 제 가족을, 해치려 한, 무리일,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단순한 실수로 인한 화재일지, 아니면 방화범의 소행일지는……”
“제가, 알아요.”
“뭐를?”
“저, 불을, 낸 게…… 고의, 적이란, 걸요.”
저건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낸 불이에요.
“저를, 노리고, 온 사람이, 낸 불이에요. 꺼지지, 않는, 불……. 그게, 그들이, 낸, 거란, 증거예요.”
화상으로 인해 상한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더듬거렸지만, 점점 또렷해지고 증오가 덧칠해진 음색으로 변했다. 데니스는 그 변화에 입을 다물었다.
“저, 불은, 꺼지지…… 않을, 거예요. 저를, 찾아내서, 죽이지, 않는, 한은.”
“그렇다면 더 가면 안 되는 거잖아!”
가지 마.
데니스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루시에게 매달렸다. 저 불이 보통 불이 아니라면, 그래서 사람들이 끄려고 발버둥 쳐도 악의를 가진 인간의 의지에 반응하여 꺼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녀를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제가, 외면하면, 이 저택은, 한때, 저의 집이었던, 곳과, 똑같아, 지겠죠.”
“네 집? 그게 어디…….”
물으려던 순간, 데니스의 뇌리에 한 기사가 스쳤다. 지펠론 백작가에서 일어난 의문의 화재. 그곳에서 사라진 저주받은 여자 한 명.
실종되었다고는 하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여자.
“설마…….”
화상을 입어 루시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녀의 녹색 눈동자만은 형형했다. 루시, 라는 이름 또한 실종된 지펠론 백작가의 영애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루스벨라 지펠론.
그녀가 루시였다.
“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게…… 그것 때문이었어?”
전혀 예상치 못한 루시의 정체에 데니스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를 보고 예상했다는 것처럼 루시, 이곳의 루스벨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가, 세요. 오늘의, 이, 화재는, 어떻게, 보면, 제, 책임이기도, 하니, 까요.”
“그게 어떻게 네 책임이야! 당연히 저택을 습격한 자들의 책임이지!”
악의적인 소문 따위는 믿지 않았다. 소문이 전부 진실만을 담았다면, 그는 이미 진즉 고자에 성격파탄인 주정뱅이가 되어 죽었을 테니.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데니스는 옆에서 직접 본 루시의 모습을 믿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이곳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 렀어요. 정말,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 더라면, 진작에 떠났어야, 옳았, 어요.”
검은 로브가 젖혀진다. 빛나는 은실 같은 은빛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붕대도 풀어져 안쪽에 가렸던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웃기, 죠? 내 상처, 는, 치료할 수, 없는데, 치유력이, 머리카락, 만은, 다시, 자라게, 해 주더라고요.”
“……가지 마.”
“도련님은, 이 길로, 쭉 달려, 가세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네가 너 두고 어떻게 가! 혼자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너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목숨이었는데.”
눈가에서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눈물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었음에도, 늘 궁금해하던 루시의 정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괴로움이 눈물로 쏟아지고 있었다.
‘한심해.’
울 시간에 네가 너를 도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네게 가지 말라는 소리밖에 할 수가 없을까. 내가…… 힘이 있었다면, 강한 사람이었다면 너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자책감과 무력감에 고개를 떨군 데니스의 발치에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그가 우는 것을 알면서도 루시의 발걸음은 불타는 저택 안을 향해 있었다.
“가, 볼게요.”
“……안 가면, 안 되는 거야? 잊으면, 너는 아무것도 못 본 거라 여기고 나와 떠나면 안 되는 거야?”
화염은 계속 번져가고 있었다. 이제는 저택을 포기하고 달아나려는 사람들도 나오려 하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당장 불을 꺼! 도망치는 놈들은 잡아다 죽는 것보다 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하란 말이야!”
“그래야 우리가 너희에게 돈을 준 게 아깝지 않지.”
깔깔깔. 그때, 후작의 두 정부와 아들 둘이 술과 마약과 애인을 끼고 낄낄거리며 하인들을 재촉했다. 그들은 이 상황에 대한 위기감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보며 사용인들은 욕을 했지만, 반항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물을 날랐다. 매캐한 연기가 진동했고, 짜증스러운 불청객인 불은 영역을 늘려 가기만 했다.
‘저것도 혹시 에덴의 짓일까?’
루스벨라는 정부들과 그 소생들이 가장 먼저 도망치지 않고 향락에 취해 남아 있는 것을 보며 가장 먼저 그 생각을 떠올렸다.
기사에서 봤을 때, 지펠론 백작가에서 일어난 화재의 생존자는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고용인들마저 모조리 목숨을 잃었기에 기사화된 것이었다.
‘에덴이 괜한 목격자든, 생존자든 남겨 두고 싶지는 않을 거야. 그들은 정체가 드러나기를 몇백 년간 원치 않았으니까.’
시기마저 노린 것 같았다. 처음부터 정부들과 그 자식들이 후작의 투병 이후부터 과하게 막 나가기 시작한 것도 뭔가 이상했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제 몸 하나는 귀한 줄 알고, 사생아라는 출신이 흠 잡히지 않게 귀찮더라도 평판 관리를 할 줄 알았는데, 요새는 폭주하는 수준이었다.
누군가 등을 떠민 것처럼.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탐욕스러움에 불을 지펴 저 화재 속에서도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고 광기에 젖은 웃음을 흘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루스벨라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루시는 그녀의 몸을 통과하여 저택 안으로 한 걸음씩 향했다.
“미안, 해요. 도련, 님. 약속, 못, 지켜서.”
“그럼 가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가지 마. 날 두고 떠나지 마.”
나는 네게 받은 호의와 애정에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너를 위해 해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가지 마…….”
불똥이 튀었다. 루시는 그 와중에도 데니스를 보호하려 신성력을 사용해 투명한 막을 쳤다.
“그렇, 지만,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잖, 아요?”
제게는 그게 지금 이 순간일 뿐이에요.
“도련, 님이, 죽도록, 도련님의, 가족들을, 원망했던 것처럼. 저 또한, 저를 죽이려 하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해친 자를 용서할, 수, 없는, 거예요.”
나는 이제 더는 도망칠 수 없어요.
루시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검은 로브마저 벗어 데니스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상냥하게 가는 길이 위험하니 그때까지는 이 로브로 불티를 피하라는 말을 속삭이면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는 말릴 수가 없잖아.’
데니스의 지옥은 카트린 부인과 루이스를 비롯한 그의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이었다. 루시는 그녀의 지옥이 그녀를 살해하려던 흉수라고 말했다.
“……가. 보내 줄게.”
데니스는 이제 펑펑 울고 있었다. 다소 추하게 콧물마저 흘리고 있었다.
“대신 꼭 돌아와. 넌 내가 내쫓아도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왔잖아. 끈질기게도.”
이번에도 다시 내 곁으로 와 줄 거지? 하나뿐인 내 치유사, 하나뿐인 내 편.
눈물이 자꾸 흘러 시야가 흐려졌다. 그도 말하면서 이게 무리한 부탁이라는 걸 알았다. 루시의 흉한 전신 화상은 그 살인범들이 꾸민 짓이었다.
처음은 미수였지만, 이번에는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돌아, 올게요. 저 역시, 도련님의 곁에, 있으면서, 살고자, 했으니까요…….”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을 보고 루스벨라는 놀라지 않았다.
‘역시나. 아벨과 에덴을 화재 속에서 마주하고서 각성했구나.’
각성한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녀가 신성력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는 없을 거라고 추측했다. 루시에게는 루스벨라와같이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재수 없게 이게 마지막 말이었다, 이런 결말 따위로 남지 마! 꼭, 꼭 돌아와!”
“네.”
“우리가 떠나기로 했던 수도의 여관에 가 있을게. 기다리고 있을게.”
“네.”
그러곤 루시는 등을 돌려 황금빛 신성력을 뿜어내며 불타는 저택 속으로 걸어갔다. 황금빛의 막을 두른 그녀에게는 어떤 불티도 닿지 못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초조함을 애써 누르며 데니스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튼튼한 방패처럼 루시의 검은 로브가 그를 지켜 준 덕분일까. 그는 어떤 장애도 없이 무사히 끔찍한 화재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루시는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사실이 데니스를 미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