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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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와의 일로 상심한 데니스가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에게 화를 낸 이후, 그녀는 모습을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오겠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데니스였다. 그의 치유사가 전처럼 끈질기게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은연중에 가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데니스를 위한 식사나 간식 같은 게 자고 일어나 보면 협탁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먹을 것만 있고 정작 준비한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돈은 어디서 난 거야. 어머님의 패물도 이젠 다 떨어져서 없는데.’
코가 시큰거렸다. 감기 기운 탓은 아니고, 그녀에게 미안해서였다.
“나한테 많이 화난 걸까.”
잘못한 건 그인데,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하려니 미안했다. 루이스가 명령한 탓인지, 이 저택에서 그를 챙겨 주는 사람은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가 유일했다.
소중한 것은 잃어 봐야 그 가치를 뒤늦게야 알게 된다고 했던가. 그녀가 곁에 없고 나서야 그는 그녀에게 그가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과하고 싶은데……. 너무 늦었나.”
푹 한숨을 내쉬며 데니스는 버석한 쿠키를 씹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초조해졌다. 괜한 사람에게 화를 냈다는 죄책감과 헌신적이었던 치유사에 대한 걱정이 날로 커졌다.
‘최대한 조용히 숨죽여 가며 저택 내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없는 사람처럼 그를 무시하던 하인들이 이제는 빨리 방으로 들어가라며 흘겨봤으니까. 이것도 아마 루이스와 카트린 부인의 소행일 것이다.
결국 데니스는 아플 때와 마찬가지로 좁은 방 안에서 옴짝달싹하지도 못한 채 지내야만 했다.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가 챙겨 주는 식사가 없었다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래서야 예전이랑 다를 게 없잖아. 나는 대체 뭘 위해 아등바등한 걸까.’
데니스는 한숨을 내쉬며 우울해했다. 이미 후작가 내에서도 새로운 가주라며 떠받들어지는 루이스가 무사히 작위를 이어받는다면, 그는 정말 저택에서 내쫓겨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곧 이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이 치유사에게 함부로 굴었던 일을 되새기며 떨쳐 내려고 했다.
“아니야. 나한테는 이제 건강한 몸이 있잖아. 이런 식으로 안 되는 길만 생각하며 우울해할 겨를이 없어.”
지금까지 식사나 간식이 놓이는 패턴을 보면, 데니스가 잠들어 있는 새벽이나 느지막한 오후의 낮잠 시간에 슬쩍 놓고 가는 것 같았다.
사과하기 위해서 자는 척 잠복하기로 했다. 데니스는 새벽 내내 올라오는 잠을 참아 내며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흐아암.”
‘언제 오는 거야.’
너무 졸려서 잠들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후, 깜깜한 새벽에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왔구나!’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가 맞았다. 그녀는 바구니에 든 먹을거리들을 가지고 데니스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협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데니스는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헉!”
“쉿. 나야! 데니스!”
“도, 도련, 님?”
갑작스러운 접촉에 기겁하던 그녀는 이내 곧 침착해졌다. 아무 말도 없이 그녀가 데니스의 할 말을 기다리자 어쩐지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일단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잡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이미 루이스에게 작신작신 짓밟힌 것을 그녀에게서 보상받으려 하는 것 같아 자신이 미워졌다.
“……미안해.”
“무엇, 이요?”
“전부. 다. 너는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괜히 너한테 뭐라고 했잖아. 내가.”
‘네가 얼마나 날 위해 노력했는지 뻔히 알면서도.’
치료의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가 헌신적으로 데니스를 돌봐서 망정이지, 그는 치료 과정 내내 까탈스러운 어린애처럼 굴었다.
별것 아닌 일로 트집을 잡아 사람을 시험하고, 불신하고, 때로는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면서 그녀를 고생시켰다.
자신은 환자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런데도 그녀는 묵묵히 그를 치유하고 계속 챙겨 주고 있었다.
“그 이전의 일도 미안해. 너는…… 항상 날 위해 최선을 다해 줬는데, 난 그러지 못했어. 못난이처럼 네가 고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멋대로 굴었지.”
“…….”
“카트린 부인이 처음에 널 고용했다 할지라도, 그때 받은 돈도 날 위해 다 썼잖아.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이후 네가 이 저택의 누군가에게 임금을 받았을 리도 없는데……. 난 거기까지 고려하지도 않고 널 막 대했어.”
그가 허리를 깊이 숙여 사과했다. 깜깜한 새벽이라 그녀가 그의 사과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정말 미안해.”
이름까지 붙여 말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자 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묻질 않았네. 네 이름은 뭐야?”
대답은 해 줄까.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었던 걸까. 준비했던 말과는 다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와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데니스를 향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루시, 예요.”
“루시?”
“네. 루시.”
“성은?”
“성, 같은 건…… 없어요. 그냥 루시, 예요.”
“알았어, 루시.”
데니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저 그동안 몰랐던 그녀의 이름을 알려 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설사 그것이 진짜 이름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 버리라고 해서 정말 미안했어. 그런 건 전혀 진심이 아니었는데…… 널 상처 입혀서 미안해.”
“그럴, 줄, 알았, 어요. 도련, 님은, 그런, 분이시니까요.”
평소였다면 ‘뭐야, 알고 있었어?’라고 장난스럽게 맞받아쳤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풀 죽은 강아지처럼 납작 엎드려 그녀에게 사과를 빌었다.
“미, 미안.”
“됐어, 요. 그, 사과, 받을, 게요.”
“정말? 그럼 계속 내 옆에 있어 주는 거야?”
졸음이 확 달아나는 말이었다. 데니스는 밝아진 얼굴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가, 이내 헉 해서 자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니지. 나 이제 완전 빈털터리잖아. 가지고 있는 것도 없고. 카트린 부인과 루이스는 호시탐탐 날 내쫓을 궁리만 하고 있을 거고…….’
다른 정부와 이복동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녀에게 곁에 남아 달라고 하는 건 정말 이기적인 짓이었다. 어깨가 축 처진 데니스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아니다. 방금 한 말은 잊어 줘. 내가 염치도 없이 너도 같이 고생할 길을 말했…….”
횡설수설하는 데니스의 귓가에 믿지 못할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을, 게요.”
“……어?”
“도련님, 옆에, 있을, 거라고요. 어디, 안, 가요, 저.”
“어어?”
“왜 그렇게, 바보 같은, 표정, 이에요? 하하.”
붕대로 칭칭 감아 놓은 얼굴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심성처럼 고운 소리였다. 잠시였지만 데니스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넋을 놓고 있었다.
“그, 그게……. 네가 네 옆에 있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난 이제 너한테 돈도 못 주고…….”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던 데니스가 고개를 들더니 더 덧붙였다.
“아! 너, 내 식사는 어떻게 준비해서 온 거야? 돈은 어디서 나서…….”
‘내가 줬어야 했는데.’
그녀를 고생시켰다는 죄책감에 눈도 못 마주치고 내리깔고 있자, 데니스의 머리카락에 붕대를 감은 손이 올려졌다.
“제가, 바깥에, 나가서, 일해서, 벌어, 왔어요. 걱정, 마세요.”
“세상에. 아무도 널 신경 쓰지 않았어?”
원래 귀족가에 고용된 사람은 외부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도록 계약서에 명시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렇지만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가 나가서 일을 해도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무도, 안, 잡았어요. 다행, 이었죠.”
“그렇구나……. 그, 돈은 내가 나중에라도 갚을게.”
“어떻, 게요?”
“어?”
“언제, 갚으실, 건데요?”
“그, 그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거야 아무런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평생 아프기만 하며 책이나 읽던 데니스는 솔직히 말해서 쓸모라고는 없는 예쁜 쓰레기였다. 건강해졌다고는 하나, 루이스 모자에게 완전히 미움을 받는 신세인 이상 그를 데려가려는 간 큰 귀족 집안도 없을 것이었다.
‘건강해진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만 펼쳐지는 건 아니었구나…….’
냉혹한 현실을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은 데니스는 입이 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돈을 갚겠다고 한 것조차 치기로만 보일 것 같아 민망해졌다.
“……내가 가정교사 일을 구해서라도 너한테 갚을게. 넌 내 은인이니까.”
“아, 하하. 생각, 보다, 구체적, 이시네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 아요.”
“왜? 이건 너의 정당한 권리인데.”
“아니, 요. 저도, 도련님과, 있어서, 얻은, 게, 있는걸요.”
그건 저한테 몹시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었으니까요.
응? 처음 듣는 말에 데니스가 깜짝 놀랐다. 그가 그녀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었지? 바로 기억을 뒤져 봤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매일 아프다고 징징거렸던 것만 떠올라…….’
“내가 너한테 뭘 해 줬는데? 뭐야? 알려 줘!”
“비밀, 이에요. 안 가르쳐, 드릴, 거예요.”
‘치사해!’
속으로만 억울함을 토해 내고, 데니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그 말을 했다가는 반성한 지금과 이전과 행동하는 게 같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심하게 그녀의 검은 로브 자락을 쥐고 말했다.
“……나중에라도 알려 주면 안 돼?”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니스는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꿋꿋이 부탁했다.
“알았, 어요. 그럼, 도련님께서, 빚을, 다 갚으시면, 그때, 알려 드릴, 게요.”
“……응!”
***
두 사람이 화해한 뒤로 또 시간은 흘러갔다. 루스벨라는 굳은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며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 무렵 데벤테르 후작가가 조금씩 시끄러워졌다. 발단은 데니스의 이복동생들이 벌인 문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