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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35화 (135/166)
  • 135화

    “말도 안 돼.”

    “못 믿겠으면 가만히 그 방구석에서 기다려 보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알아서 쫓아내 줄 테니까.”

    키득키득 기분 나쁘게 웃던 루이스가 아차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덧붙였다.

    “아니다. 그때도 너한테는 소식 전해 줄 사람이 없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려나? 아하하.”

    “닥쳐.”

    참지 못한 데니스가 루이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루이스가 그를 쳐 내려고 했으나, 건강해진 몸이 되어서 그런지 쉽게 밀쳐 내지 못했다.

    ‘이 자식. 뒤늦게라도 후계자 경쟁에 참여하겠다고 온 거야?’

    루이스는 약자라고 깔봤던 그가 약하지 않자 몹시 당황했다. 동시에 은둔하고 있던 거나 마찬가지던 데니스가 갑자기 아버지를 찾아온 이유가 바로 납득갔다.

    그러자 속으로 비웃음과 함께 분노가 치솟았다.

    ‘네가? 네가 감히 나와 동급이 되려고 해?’

    어림도 없지.

    “이래서 아버지를 보자고 온 거였어? 비루먹은 개새끼에서 좀 형편이 나아지니까 바로 온 꼴 좀 봐.”

    “말조심해. 난 이제 네가 함부로 여기던 그때 그 애가 아니라고.”

    “웃기고 있네. 너야말로 정신 차려.”

    이번에야말로 루이스는 데니스를 밀쳐 내는 데 성공했다.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으려는 데니스를 향해 루이스가 모진 말을 쏟아 냈다.

    “어리석기는. 설마 널 그 비좁아 터진 방에 가둔 게 누구인지 잊었어? 아버지잖아. 네 친아버지.”

    “…….”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 이 저택에서 네 편은 없었다는 거. 우리 어머니가 네게 독을 먹이는 순간에조차 아버지는 가만히 있었잖아.”

    그분은 널 보호할 의지가 없는 분이라고.

    “나는…….”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입술만 깨무는 것이 고작이었다. 데니스가 조용해지자 루이스는 기세등등해져서 더 몰아붙였다.

    “이미 후작저는 물론이고, 내가 후계자가 되는 걸 반대하는 인간들은 모조리 어머니가 치워 버리셨어.”

    “…….”

    “네가 인제 와서 건강해졌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야. 모르겠어?”

    “그럴 수가……. 아버지, 아버지를 만나게 해 줘.”

    루이스의 말이 옳다고 해도, 아버지인 데벤테르 후작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의 앞에 떨어진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므로.

    ‘안 그러면 건강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게 다 허사가 되잖아.’

    인정할 수 없었다. 기대하던 미래로 향할 길이 없다는 선고는 너무도 잔인했다.

    “내 말 못 들었어? 너 같은 게 여기 남을 자리는 없다니까?”

    “부탁이야. 한 번만, 제발.”

    데니스가 루이스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루이스는 들어주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멸시의 눈빛을 하고 데니스를 노려봤다.

    “이미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고 계셔서, 너 같은 게 와도 알아보지도 못해.”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면 더 널 만나지 못하게 막아야지.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널 아버지께 데려가? 넌 내 앞길을 방해하려는 놈일 뿐인데.”

    데니스는 숨이 턱 막혔다. 그의 몸 상태가 나아졌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의 앞에서 콧방귀를 뀌는 루이스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웠고, 여전히 데니스는 약자에 불과했다.

    심한 좌절감 속에서 데니스는 겨우 루이스에게 거래를 제시했다.

    “……네 후계자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게. 대신 내 어머니께서 결혼하실 때 가져오신 리스냐 성만 넘겨줘. 그럼 평생 그곳에서 쥐 죽은 듯이 살게.”

    “리스냐 성? 아, 우리 어머니가 즐겨 가시는 그곳?”

    “……그래. 다른 건 바라지 않을 테니까…….”

    “미쳤냐? 내가 그걸 너한테 왜 줘?”

    루이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아까까지는 어리석은 개새끼를 내려다보며 한껏 야유하고 비웃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짜증을 내고 데니스를 당장 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뭐?”

    “가만히 있으면 그건 우리 모자의 차지인데, 내가 뭐 하러 너한테 그걸 넘겨주냐고. 내가 자선사업가야?”

    일부러 자선사업가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게 똑똑히 피부로 느껴졌다. 루이스는 데니스를 거지 취급하고 있었다. 모멸감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유산……!”

    “그래서 뭐? 지금은 내 어머니 소유인데. 그리고 어머니 것은 곧 내가 물려받을 소유물이고.”

    “…….”

    “그러니 네놈한테 줄 이유는 하등 없다, 이거야. 이야기 끝났지? 그럼 이제 꺼져. 네 낯짝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니까.”

    결국 이미 빼앗은 리스냐 성이 자기 것이 되었으니 주기 싫다는 소리였다. 루이스와 카트린 부인이 저리 뻔뻔하게 나오니 힘없는 데니스로서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랑 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다른 정부와 그 아들은 분명 나중에 지옥에 떨어질 거야.”

    “하. 무슨 수로? 성서에서나 그렇게 쓰여 있지, 난 지금 아주 잘 살고 있는걸.”

    너야말로 살아 있는 이 순간 자체가 네겐 지옥 아니야?

    “너 이 자식……!”

    데니스가 기어이 참고 있던 분노를 터트리며 루이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가뿐히 그를 피했다.

    “이거, 끌어내.”

    루이스가 바깥의 시종들을 불렀다. 건장한 시종들이 바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루이스가 지시하는 대로 데니스를 붙잡았다.

    “놔! 놓으라고! 가도 내 발로 갈 거야!”

    “이 집안의 개새끼가 말이 많네.”

    짝. 데니스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하얀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만 왈왈 짖어 대고 다시 네 그 구석진 방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어. 조만간 널 이 집안에서 완전히 없애 버릴 생각이거든.”

    “개새끼는 너겠지! 정부들이 들어오고, 너희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내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어. 반성은 하지 못할망정…….”

    “반성?”

    루이스가 낄낄거리며 웃더니 다시 한번 더 매서운 손놀림으로 데니스의 뺨을 때렸다. 이번엔 반대쪽 뺨이었다.

    “반성 같은 건 약해빠진 패배자들이나 하는 거야. 너 같은 것들 말이야.”

    “…….”

    “그러게, 멍청하게 자기 것을 빼앗기지 말았어야지. 지키지도 못하고 뒤늦게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응?”

    양 뺨을 맞은 아픔보다 루이스의 그 자신감에 찬 말들이 더 충격이었다. 고통스러웠다. 우위를 점한 자의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니야…….”

    “아니긴. 결과를 직시해. 멍청한 데니스. 넌 패배자고, 난 승리자야.”

    루이스가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패배자는 말이 없는 게 미덕이지. 그만 추하게 굴고 돌아가서 쫓겨날 날이나 기다리라고. 자, 끌어내!”

    “알겠습니다, 가주님.”

    이미 시종들은 루이스를 새 가주님으로 칭하고 있었다. 카트린 부인과 루이스 손에 후작가가 완전히 떨어졌다는 증거였다.

    ‘정말 다 끝났구나.’

    허무했다. 데니스는 인형처럼 몸을 축 늘어뜨리고 시종들이 그를 끌어내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럴 힘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데니스를 질질 끌어다 다시 방 안에다 집어넣었다. 그리고 협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주님을 귀찮게 하지 마세요, 도련님. 조용히 계시면 이럴 일도 없잖습니까.”

    “맞습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내지 말고, 하던 대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세요. 후작님이 위독하신 와중에 분란을 일으켜서 좋을 게 뭐랍니까?”

    “쯧.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저희들 일거리만 늘어나잖습니까.”

    “…….”

    얄미운 루이스의 말 중에 그건 진실이었다. 이 저택에, 후작가에 더는 데니스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

    ‘나는 헛된 꿈을 꾼 걸까.’

    차가운 현실에 심장이 얼어붙었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퍼렇게 질려서 우두커니 서 있는 데니스를 보고 이쪽 세상의 루스벨라가 달려왔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 어요?”

    걱정하는 사람의 따스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충격에 휩싸인 데니스에겐 그것마저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넌 다 알고 있었어? 내가 건강해지려고 하는 게 아무 소용도 없다는 일인 걸?”

    “네?”

    “말해 봐. 너도 어쨌든 카트린 부인의 허락하에 이 저택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잖아.”

    대답해 줘. 알고 있었어?

    데니스가 아버지인 후작을 만나러 가겠다며 나서기 전에 이미 그녀는 난색을 표했지만, 그는 그것은 잊은 것처럼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

    “아니, 에요. 지금, 도련님이, 너무 충격을, 받으셔서, 그런, 거예요. 도련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 어요.”

    “알고 있었냐고.”

    “저택, 내부가, 카트린 부인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너도 알고 있었다는 거지? 그 말은?”

    뒤에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데니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표시였다.

    “그만해. 너도 바깥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거잖아. 듣고 싶지 않아.”

    “그게, 아니라…….”

    “저리 가라고 했잖아!”

    베개가 날아왔다.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는 어렵지 않게 베개에 맞지 않고 그걸 받기까지 했으나 오히려 그 행동이 데니스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너는 내 편인 줄만 알았는데……. 너도 똑같은 거짓말쟁이였어. 난 그런 위선적인 사람은 필요치 않아.”

    “도련, 님.”

    “가 버려. 네가 줬던 것들 다 가지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더는 널 보고 싶지 않아.”

    그는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치유사가 잘못한 것은 없었음에도 그는 화를 낼 대상이 필요했다. 마치 루이스가 예나 지금이나 데니스를 조롱거리로 삼는 것처럼 그도 죄 없는 그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제가, 떠나길, 원하세요?”

    검은 로브가 잘게 떨렸다. 언뜻 붕대 사이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상처가 더 중요했던 데니스에게 그런 것은 당장 챙겨야 할 요소가 아니었다.

    “그래. 진짜 떠나 버려.”

    “……그렇다면, 알겠, 어요.”

    검은 로브가 등을 홱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데니스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훗날 죽도록 후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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