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그 후로 루스벨라는 혼자 불안에 떨었다.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와 데니스에게 에덴이 둘을 감시하고 있노라고 말해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속이 터졌다.
‘고모님을 잃은 것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갈 수는 없는데…….’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경고해 봤자 애당초 그녀의 존재는 이 세상과 유리되어 있으니 전달해 줄 방법도 없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거야? 이대로?’
불안과 초조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루스벨라와 달리 그녀가 지켜보는 두 사람은 평온했다. 폭풍의 눈과 같았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데니스가 건강을 거의 완전하게 회복했다는 것이었다.
“어떠, 세요? 지금, 제가 봤을 때는…… 더 치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마지막 황금빛 신성력을 부어 주고 나서, 꼼꼼하게 진찰까지 마치고 나니 더 해 줄 것이 없었다. 이쪽 세상의 루스벨라가 처음 데니스를 만났을 때 몸속 곳곳에 보였던 균열은 깨끗하게 메워져 온전해졌다.
치유사인 그녀의 말을 듣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 보던 데니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아픈 데가 하나도 없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 이에요.”
“다 네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정말.”
벅차오르는 마음에 데니스는 덥석 치유사를 껴안았다. 엉겁결에 안기게 된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는 갓 잡힌 생선처럼 파드득 떨었다. 타인과 스스럼없는 접촉이 너무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
그녀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데니스를 토닥여 줬다. 그녀도 그에게 정이 들어 이러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부터 해야 할까? 아버지에게 먼저 가 볼까?”
다 죽어 가는 산송장처럼 깡말랐던 청년은 어느새 살이 적당히 오른 미남이 되어 있었다. 피부에는 윤기가 흘렀고, 붉은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두 눈은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그래서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도 행복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도련님이, 알아서, 하셔야지요.”
“쳇.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되게 기념비적인 날이잖아, 오늘.”
“그럴, 줄, 알아서, 준비했어요.”
“어? 뭘? 그럴 돈 없었을 텐데?”
“……조용히 좀, 하세요.”
돌아가신 후작부인의 패물을 팔아 치료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귀한 것은 진작에 빼앗겨 남은 게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기 사용인들이 따뜻하게 대해 줬을 리는 없고.’
그 때문에 붕대를 감은 손으로 내민 작고 소박한 케이크 하나에 정말 깜짝 놀랐다.
“받, 으세요. 완치, 축하, 케이크예요.”
“……이거 네가 준비한 거야?”
“네.”
생크림을 짠 모양이 어설펐다. 삐뚤빼뚤한 데다 중간에 망쳤는지 고치려는 흔적도 엿보였다. 시내의 어떤 디저트 가게에서든, 아니면 이곳 저택의 주방에서든 이런 형편없는 케이크는 본 적이 없었다.
‘본래 신분이 어쨌거나 귀족이니 저런 케이크는 만들어 본 적이 없었겠지.’
둘을 지켜보던 루스벨라는 이쪽 세상의 자기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빤히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굳이 그녀가 케이크를 축하 선물로 택한 이유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유모와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이겠지.’
“딸기 케이크네?”
“네. 딸기, 는, 좋은 것을, 구하진, 못했, 지만요.”
포크로 한 입 베어 물자 생크림과 딸기가 쌓인 층이 나왔다. 생크림은 얇게 발라져 있었고, 딸기는 조금 무르고 작은 것들만 빵 사이에 올려져 있었다. 절대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는 초라한 케이크였다.
하지만 데니스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케이크를 가져와서 바꾸자고 해도 내놓지 못할 것이었다.
“맛있어.”
“진짜, 요?”
“응. 진짜. 너 제빵에도 소질이 있구나?”
씩 웃으며 열심히 케이크를 입에 밀어 넣는 데니스였다. 고작해야 손바닥 크기만 했던 케이크는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좋아, 해 주시니, 다행, 이에요.”
‘애쓴다…….’
루스벨라는 그 광경을 보면서 상황의 심각성도 잊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데니스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씹는 턱의 움직임이 너무 느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케이크를, 그것도 퍽퍽한 빵을 겨우겨우 씹어 삼키는 게 티가 났다. 이쪽 세상의 그녀는 그런 걸 모르는 것 같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꿀꺽. 다소 힘겹게 입 안에 남은 케이크를 모조리 목구멍 너머로 삼킨 데니스가 말했다.
“몸도 다 나았으니까,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어.”
“후작, 님을요?”
“응. 적자인 나한테 이제 잡을 흠이 없어졌으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복동생들이랑 후계자 싸움을 해야지.”
이미 카트린 부인의 아들인 루이스가 후계자로 낙점된 상황이었지만, 데니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직 해 볼 만할 거야. 내가 몸이 약해서 얼마 안 가 죽을 거라고 생각해 지지하지 않은 후작가의 가신들도 건강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돌아설지도 몰라.’
그게 여의치 않다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결혼하실 때 지참금으로 가지고 온 리스냐에 위치한 성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조용히 살 테니, 어머니의 유산만은 내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괜찮, 을까요? 그러다, 도련님께, 나쁜 마음이라도, 품은 사람이…… 나타, 난다면.”
검은 로브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루스벨라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데니스는 건강해졌다는 기쁨에 차서 아무것도 안 들리는 상태 같은데……. 위험해.’
데니스가 나은 시점이 어린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후작부인이 죽고, 정부들이 들어와 후작저에서 위세를 부린 지 십수 년이 흘렀다.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적자를 후계자로 밀어줄 사람들이 밀려나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거기다 돌아가신 후작부인의 유품인 값비싼 패물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아 갔던 인간들이, 유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리스냐의 성을 내줄 생각이 있을까.’
없을 거다. 이곳에 들어와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전혀 가능성이 없었다.
현재 리스냐 성은 카트린 부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 후작 몰래 다른 애인과 휴가를 즐기려 내려가는 용도로 쓰고 있었다. 겉으로는 요양을 하러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녀는 다 알았다.
풍경이 빼어나고 이미 요긴하게 쓰고 있는 성을 그녀가 도로 내줄 생각은 없을 게 분명했다.
‘설령 후작이 선심을 써 성을 데니스에게 도로 돌려주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야.’
오히려 해코지하려 들 것이다. 정당하게 상속받아야 할 사람인 데니스만 죽어 없어지면 될 일이니까.
“괜찮을 거야. 너도 나한테 매일같이 말했잖아. 다 괜찮아질 거라고.”
“그건…….”
“뭘 그렇게 걱정해. 내 몸이 낫는 거야말로 내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을 기적이었는데.”
이게 해결되었으니 다른 일들도 다 잘될 거야.
발갛게 달아오른 데니스의 뺨은 장밋빛이었다. 그의 눈과 입이 단꿈에 차서 장밋빛 미래를 말하는 것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내가 리스냐 성을 받게 되면, 나랑 같이 그곳으로 휴가를 가자.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니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그, 래요. 좋을, 것, 같아요.”
신나서 앞으로의 계획을 줄줄 늘어놓는 데니스에게 이쪽 세상의 루스벨라는 도저히 초를 칠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기대된다는 말만 했다.
“아버지를 만나고 올게!”
“네. 다녀, 오세요.”
***
데니스는 그의 치유사가 남은 돈으로 간신히 마련한 새 옷을 입고 제 방을 나섰다. 발걸음에 들뜸이 묻어나지 않게 절제하는 게 너무도 어려웠다.
‘아버지도 깜짝 놀라시겠지.’
이미 오랜만에 방 밖을 나선 그를 보고 휘둥그레진 시선을 따갑게 느낀 터였다. 거의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었으니까.
그동안 그를 버려뒀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마저 일순 잊고 다시 행복을 꿈꿨다.
“저택에 저런 사람이 있었던가?”
“뭔가 낯이 익은데…… 누구지?”
중간에는 그런 소리마저 들었다. 그게 이미 잔뜩 기대감으로 부푼 마음을 더 으쓱이게 해서 데니스는 더욱 가슴을 폈다.
그리하여 아버지인 후작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위풍당당한 자세로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아버지. 저예요. 데니스입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
“아버지?”
하지만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 시간에는 반드시 후작가의 일을 처리하실 텐데.
“실례지만 들어가겠습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단지 예의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니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그가 만나고 싶어 하던 데벤테르 후작이 아니라, 뜻밖의 인물이 앉아서 책상 위에 구두를 올리고 있었다.
“……루이스? 네가 왜 여기에?”
“뭐야. 넌 누구야? 이 저택의 천덕꾸러기 신세인 놈과 상당히 닮긴 했는데…….”
루이스도 처음에 데니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데니스를 사칭한 하인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나야. 데니스. 네 이복형.”
“뭐? 뒈진 거 아니었어?”
여전히 입버릇은 개나 준 놈이었다. 루이스와 그다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데니스는 본론부터 꺼냈다.
“그보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너는 또 왜 여기에 그런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거야? 아버지가 아시면…….”
“아버지가 아시면, 뭐? 이미 그 양반은 앓아누운 지 오래인걸.”
“……뭐?”
“소식이 느리구나? 하긴, 방구석에 처박혀서 하인들조차 무시하는 신세였는데 뭘 알고는 있겠어?”
비아냥거리는 어조에 데니스의 뺨이 차갑게 식었다.
“말조심해. 아버지의 상태가 어떤지나 털어놔.”
“흠.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네 태도가 건방지기 짝이 없지만, 자비를 베풀어서 알려 줄게. 조만간 내가 작위를 이어받을 테니까. 고마워하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루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야. 아버지는 위독하셔. 누군가 독을 먹여 그분을 해하려 했던 모양이야. 얼마 안 가서 돌아가시겠지.”
그리고 넌 이 저택에서 쫓겨날 거야, 멍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