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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33화 (133/166)
  • 133화

    “물론, 이에요. 제가…… 제, 가 최선을, 다해서, 도련님을, 치료할게요.”

    “정말이지?”

    “그, 럼요…….”

    “허튼소리이기만 해 봐. 그때는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았어?”

    헛된 희망은 싫었다. 그래서 어설프게나마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협박했는데도 이쪽의 루스벨라는 푸스스 웃었다.

    “그러, 세요. 만일 정말, 치료가, 안, 된다면요.”

    쉭쉭거리고 불안정한 목소리임에도 그녀는 자신의 실력에 큰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데니스는 그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

    그 후로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갔다. 마치 고양이가 털실 공을 마구 흩트려 놓는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나열되어 사라졌다.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셀레누스의 배려인지는 몰랐다. 루스벨라는 이제 그저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우웩. 이런 걸 먹어야 해? 맛없는데.”

    “나으, 시려면, 잘, 드셔야, 해요.”

    치유사로서의 루스벨라는 데니스를 성심성의껏 돌봤다. 치유사라기보다는 꼭 친누이 같았다.

    ‘내게 어머니나 다른 혈육이 있었다면 이러했을까?’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을 할 때면 데니스는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너무 익숙하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내 뒤통수치는 거 아니야?’

    루스벨라는 봤다. 데니스가 꼬박꼬박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의 치료를 받으면서도 불안해하는 모습을. 그는 때때로 밤중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깼다.

    “나 아직 살아 있는 거 맞지……?”

    몸을 더듬어 상처 없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데니스는 숨죽여 울었다. 악몽 때문이었다. 언제 곁에 있는 누군가가 배신할지 모른다는 뿌리 깊은 불신 때문에.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는 헌신적으로 그를 치료해서, 그의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기본적으로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의 치유력이 월등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음식이나 영양제, 깨끗한 환경을 갖추기 위한 예산은 데니스가 갖고 있던 작고한 어머니의 패물을 팔아다 충당했다.

    살아갈 의욕이 없어 구석에다 처박은 탓에 먼지만 쌓여 가던 패물들이 빛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데니스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죠. 어머니……?”

    그렇지만 유품이기도 한 패물이 줄어들수록 죄책감은 쌓여 갔다. 그럴 때마다 루스벨라는 들리지 않아도 그에게 따스한 말을 건넸다.

    “괜찮을 거예요. 괜찮아. 잘하고 있어요.”

    “얼른 나아서 후계자 자리를 되찾으려고 노력할게요.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한 사람으로서의 몫은 해 볼게요.”

    들리지는 않아도, 데니스는 혼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건강해지려 노력했다.

    꾸준한 노력 덕에 창백하던 얼굴이 다홍빛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발갛게 혈색이 돌았다. 하릴없이 침대에서 누워 있기만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것 봐. 나 이제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어!”

    “축하, 드려요. 도련님.”

    “각혈도 안 해. 속도 안 쓰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는 걸까? 너무 신기해.”

    날이 갈수록 초롱초롱해지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는 치유사로서 뿌듯해했다. 그녀 자신은 치료할 수 없어 여전히 화상 자국이 남은 몸을 붕대와 검은 로브로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조금만 더 치료하시면 보통의 건강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지실 거예요.”

    “이게 다 네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데니스가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껴안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접촉에 검은 로브의 몸뚱이가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 에요. 저를, 믿어 준,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응.”

    가공할 위력의 치유력은 듣도 보도 못한 힘이었지만, 데니스는 한 번도 치유사에게 묻지 않았다. 황금빛의 치유력은 대체 어떻게 발휘할 수 있으며, 그녀를 쫓는 악당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처음부터 폐를 끼치기 싫어 흉수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여자였다. 데니스에게 저택 내에서 그의 취급이 왜 이렇게까지 형편없는지를 굳이 묻지 않은 것을 보면 암묵적으로 개입하지 말라는 선을 그은 것으로 인식했다.

    데니스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무슨 일 때문에 살해 위협까지 받았는지, 신분은 무엇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실 위태로웠다. 외나무다리 위에서 손을 붙잡고 걷는 것과 같았다. 서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신뢰를 쌓는 것은 어려웠으므로.

    ‘그렇지만 치유사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데니스는 이쪽 세상의 루스벨라를 믿고 싶었다. 삶의 의욕을 놓았다가 겨우 붙잡은 이에게는 인간관계가 절실했다. 정작 본인은 외로운 것조차 몰랐지만.

    “있잖아.”

    “네.”

    “날 다 치료하면, 그땐 뭘 할 거야?”

    “글, 쎄요…….”

    붕대로 감춰진 얼굴은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어지지 않고 늘어지는 문장은 힘이 없었다.

    “모르, 겠네요. 생각이…… 안, 나요.”

    그녀는 정말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어투였다. 녹색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데니스는 그 시선에서 익숙한 공허를 읽어 냈다.

    ‘삶에 더는 미련이 없을 때나 보일 수 있는 눈빛이잖아.’

    그녀는 살고 싶어서 이 저택에 치유사로서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보이는 모습은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 안 해 뒀어?”

    “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하다못해 심각한 화상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처음에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데니스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는 이쪽 세상의 루스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화상은 당장 의사나 치유사에게 가 봐야 할 수준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상처를 가리기만 했지.’

    완전히 그녀의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은 것처럼. 숨죽이면서.

    “……그렇구나.”

    “언젠가는, 생기, 겠죠.”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다는 생각에 유대감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생기 넘치는 눈을 보고 싶어졌다.

    “그러면 혹시 내가 다 나은 후에도 곁에 있어 줄래?”

    충동적으로 한 말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하던 녹색 눈동자가 깜짝 놀란 것이 보였다.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왜, 요?”

    “그, 그거야 넌 내 은인이니까! 은인에게 보답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아니야?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이미, 저는, 절, 이곳에, 고용한, 카트린 부인의, 돈을 받고, 왔는, 걸요.”

    검은 로브 속 머리가 갸웃거렸다. 덤으로 도련님 돈 없으시잖아요, 라고 얄미운 말까지 들었다. 데니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거랑 이거랑은 달라! 나는…….”

    나는 내가 다 나은 후에도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는 여기까지가 그의 진심이라고 봤으나, 사실 틀렸다. 데니스는 그의 치유사가 필요했다. 단순히 치료를 도울 치유사가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에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고 같이 있고 싶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이씨, 몰라! 싫으면 가 버려!”

    어쩐지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혈색은 좋아졌으나 아직도 깡마른 다리로 도도도 달려가 침대 위로 엎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려 이불을 뒤집어썼다.

    “도련, 님? 왜, 그러, 세요? 제가, 너무, 놀렸, 어요?”

    종잇장 같은 몸으로 어찌나 빨리도 뛰어갔던지, 이쪽 세상의 루스벨라는 구슬땀을 흘리면서 데니스의 뒤를 쫓아왔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정말 놀라서 묻는 목소리. 걱정하고 염려하는 말투.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

    엄연히 그녀도 환자인데, 그는 제 사정만 생각해서 그녀를 배려하지 않았다. 이러니 그의 이복형제들과 아버지의 정부들이 그를 멸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괜히 너한테 화를 냈어. 아까 했던 말도 그냥 못 들은 척해 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리는데, 머리카락에 무언가 닿았다. 그녀의 손이었다.

    “저를, 걱정하셔서, 그러신, 거죠?”

    “……응.”

    “그렇, 다면. 곁에, 있을게요.”

    “정말? 정말로?”

    “갈 곳도, 없는, 걸요. 도련, 님이야말로, 나중에, 약속…… 무르지, 마세요.”

    “안 어길게! 꼭 지킬 테니까……!”

    너만큼은 내 곁에 쭉 있어 주면 안 될까?

    그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 입을 꾹 닫았다. 말끝이 흐려지자 또다시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하실, 말씀, 더 있지, 않으셨어요?”

    “아니야! 없어! 전혀! 없어!”

    양손을 부채로 젓듯이 크게 휘젓는 모습을 보며 검은 로브 사이에서 자그맣게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였다.

    “뭐야. 지금 나 비웃는 거지! 그렇지!”

    “아니, 에요. 큽…….”

    “웃는 거 맞잖아!”

    두 사람이 조금 아웅다웅하면서 서로에 대한 정을 쌓아 갈 때, 그를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저건……!’

    루스벨라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자마자 그쪽으로 날아갔다.

    데벤테르 후작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풀숲에 누군가 있었다.

    “아벨 님의 말씀이 옳았군. 대체품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어.”

    ‘역시, 아벨의 신도구나!’

    예상은 했다. 이쪽 세상의 루스벨라가 데니스와 만났을 때부터 예견한 일이었다.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했을 뿐.

    “제발 저들을 그냥 둬! 이미 상처받을 대로 받은 사람들이야. 이제야 겨우 일어서기 시작했는데…….”

    들리지도 않을 부탁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기실 들려도 들어주지 않을 말이어서 더욱 슬펐다.

    아벨의 첩자는 한참을 두 사람을 지켜봤던 것인지, 손에 든 노트가 빼곡하게 글자로 차 있었다.

    “어서 아벨 님께 보고해야겠어. 지난번 ‘수확’ 때 저걸 놓쳐서 많이 상심하셨는데, 이번에야말로 만회할 수 있는 기회겠지.”

    “빌어먹을. 하지 말라고!”

    상스러운 욕설까지 해 가며 영혼 상태로나마 그 첩자를 공격하려 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안 돼…….”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먹구름이 그들에게로 닥치고 있었다. 한 걸음도 쉬지 않고서, 무섭도록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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