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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32화 (132/166)
  • 132화

    ***

    이쪽의 루스벨라는 치유사로서 성실하게 일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데니스를 찾아가 정성스럽게 돌보고, 치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데니스는 괜한 희망을 주지 말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저리 가라니까! 어차피 내 몸 상태는 이미 글렀다고. 조금 낫게 해준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 래도…… 속는 셈, 치고, 받아, 보세요.”

    하지만 데니스는 치유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화상으로 인해 붕대로 칭칭 감아 놓은 얼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녹색 눈동자를 보면 불가항력이 되고 말았다.

    “저, 는 도련님 생, 각보다…… 유능한, 치유사예요. 믿어, 보셔도 괜찮, 아요.”

    “……정말? 하지만 카트린 부인이 내게 그런 훌륭한 실력의 치유사를 보낼 사람이 아닌데.”

    데벤테르 후작가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첫째 도련님. 그게 데니스였다. 그가 여태까지 건강이 나쁜 상태로 목숨을 부지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은 역시나 카트린 부인이었다.

    영혼 상태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루스벨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린 부인이 의사든, 치유사든 데니스에게 보냈다면 그 목적은 숨만 붙여 놓는 데 있지, 완치시켜 놓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 데니스가 낯선 치유사인 루스벨라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카트린 부인은 까탈스럽고 변덕스러운 데다 데니스에겐 잔혹한 사람이었다.

    ‘언제 마음을 바꿔서 날 죽이려고 할지 몰라.’

    아마도 그녀의 아들인 루이스가 정식으로 데벤테르 후작이 되는 날이 오면, 데니스는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저택에서 사라질 것이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창백한 피부의 청년이 녹색 눈동자의 상처투성이 치유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너를 믿게 만들고 싶다면, 증명해 봐. 너는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대신 살려 낼 거라고.

    “그걸 못한다면 나는 널 이 저택에서 내쫓을 거야.”

    “그건 좀 너무하지 않을까요, 데니스.”

    영혼 상태의 루스벨라가 냉정한 데니스의 말에 작게 불평했다. 어쨌거나 이쪽 세계의 자기 자신이었으니 편들어 주지 않기도 어려웠다.

    “이불도 받았으면서.”

    “이불, 받으셨, 잖아요.”

    ‘응?’

    순간 루스벨라는 자신의 말을 다른 루스벨라가 들은 줄 알고 당황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저 이쪽의 루스벨라가 갈라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제 의견을 전달한 것뿐이었다.

    “이, 이불이 왜.”

    “그거, 카트린 부인에게, 서 받은, 돈 전부를, 털어 넣은 거예요.”

    “그, 그게 어쨌는데.”

    ‘데니스……. 말을 자꾸 더듬고 목소리가 작아지는데요.’

    양심에 찔렸는지 데니스의 까칠하던 태도는 무른 양파처럼 쭈그러들었다. 이 와중에도 침대에 누워 폭신한 이불을 끌어안은 것은 덤이었다.

    “저, 는 지금, 한 푼도…… 없, 어요. 어, 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고요.”

    “……고용인들을 위한 식사가 지급될 텐데?”

    “저한테, 밥, 안 줬어요. 도련님, 한테, 이불 사 줬다고…… 다들, 없는 사람, 취급했어요.”

    “…….”

    꼬르륵.

    때맞춰 위장이 굶주림을 못 참고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이쪽의 루스벨라가 적잖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창피한 것 같았다.

    ‘카트린 부인이 자기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자마자 버렸구나.’

    루스벨라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감시꾼 노릇까지 잘하라고 내준 돈을 홀라당 거슬리는 데니스의 침구를 사기 위해 썼으니 얼마나 고까웠을까.

    그렇다고 자기 손으로 내칠 명분은 딱히 없으니, 고용인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빵 한 덩이, 스튜 한 숟가락이라도 치유사에게 내주지 말라고.

    ‘이쪽의 내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굴복할 순간을 기다렸겠지.’

    아니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저택에서 달아나는 것도 좋고.

    어느 쪽의 결말이 나건 카트린 부인은 손해 볼 게 없었다.

    “사람이 무슨, 밥으로 치사하게…….”

    데니스가 씩씩거렸다. 식사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이었다. 그도 카트린 부인과 다른 정부 때문에 굶주린 적이 허다했기 때문에 분노는 더 심했다.

    “그래서, 너 지금 따돌림당하는 상태라는 거야?”

    “맞, 아요. 이, 거면 증명이, 충분하지, 않나요……?”

    검은 로브 속 손 부분이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손마저 화상을 입은 것인지 그것조차도 붕대로 돌돌 감겨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네?”

    “너 말이야. 날 언제 봤다고 그렇게 헌신적으로 구는 이유가 뭐냐고.”

    뭔가 목적이 있을 거 아냐.

    이불과 굶주림에 이은 2연타 양심 공격에 주춤거렸던 데니스였지만, 그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하긴 했어.’

    데니스나 루스벨라나 가장 의아하게 여겼던 점이었다. 왜, 어째서 이쪽의 루스벨라는 이곳 데벤테르 후작저로 흘러들어 왔으며, 데니스에게 잘해 주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치유사, 니까요. 환자를, 위해, 애쓰는 건, 당연…….”

    “거짓말하지 마. 모든 치유사나 의사들이 너처럼 행동하지는 않아. ……돈 몇 푼에 매수되는 것도 허다하다고.”

    기본적으로 데니스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카트린 부인의 말을 따르고, 그의 말은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계속 치유사로서 행한 일이라고 하는 건 좋지 않아. 그는 절대 그걸로 넘어갈 위인이 아니니까.’

    루스벨라는 조용히 이쪽 세계의 자신을 바라봤다.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 차례였다. 그러지 않으면 데니스는 주저하지 않고 새 이불을 치유사의 손에 들려 주고 나가라고 명할 터였다.

    “넌 정체가 뭐야? 왜 내 곁에 있으려는 거지?”

    “…….”

    정적이 감돌았다.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못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대답 못 하겠어?”

    “…….”

    “그럼 나도 널 믿을 수 없어. 호의는 고마웠지만, 여기서 나가야…….”

    데니스가 축객령을 내리려는 그때였다.

    “……때문, 이에요.”

    붕대로 감은 얼굴의 입이 작게 달싹였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죽기 싫기…… 때문, 이에요. 저, 는 쫓기고, 있어요. 저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너를 누가 죽이려고 하는데?”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도련님도, 저 때문에, 화를, 입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가 반만 가린 진실을 고백하는 것을 보며 루스벨라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저 심각한 전신 화상은 아벨에게서 빠져나올 때 입은 상처겠지.’

    아벨과 에덴의 광신도들이 그녀를 습격했을 때 모든 것은 명백해졌을 것이다.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는 저주받지 않았다고. 그녀 주위의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해 간 것은 아벨과 에덴의 소행이었음을.

    그녀를 불태워 죽이려는 그 화마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갈 곳이, 없었어요. 살고, 싶은데, 이대로라면, 죽을 게, 뻔했어요.”

    “그래서?”

    “그때 마침, 치유사나 의사를, 구한다는 모집문을, 봐서…… 데벤테르, 후작저, 같이, 힘이 센, 가문이면, 적어도,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인이나 시종들과 같은 고용인들에게 사람들은 신경을 덜 쓴다. 아벨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판 남이고 초면인 가문의 하인으로 숨어들어 갈 줄은 몰랐겠지.’

    그것도 사실 신분이 귀족임에도 하인 신세를 자처하면서 살고 있을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이쪽의 루스벨라는 화상으로 인해 본래의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였다. 신분을 속이기에는 최적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거예요.”

    덥썩. 가늘고 힘없는 데니스의 허연 팔이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에게 붙잡혔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놔!”

    “가만히, 좀…… 있어, 보세요. 해치려는 게, 아니, 니까…….”

    붙잡은 손을 통해 황금빛 에너지가 부드럽게 물결치더니 데니스에게로 흘러갔다. 태양을 머금은 것처럼 환한 황금빛의 신성력에 잠시 데니스는 말을 잃고 홀린 듯이 그것을 응시했다.

    ‘어……?’

    그러다 변화를 눈치챘다. 항상 무겁기만 하던 그의 몸이 서서히 가벼워지고, 항상 지박령처럼 들러붙어 있던 만성적인 피로나 두통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몸이, 많이, 상하셨어요. 제, 치료를 받으시면…… 꾸준히 받으면, 완전히 낫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너……. 어떻게…….”

    데니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이제까지 받은, 실력 없는 의사와 치유사가 건성으로 했던 치료를 상기하면, 지금의 치유는 가히 기적에 가까웠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치유력은 드물어. 거기다 돌팔이들이 왔어도, 가끔씩 정확한 진단을 내린 사람들의 말로는 난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는데.’

    카트린 부인이 마시게 한 독이 문제였다. 그것 때문에 데니스의 장기 대부분이 망가져 평생 침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선고받아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 상처투성이의 초라한 치유사가 고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잘됐다.’

    영혼 상태의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텅 비어있던 눈동자에 차오르는 감격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그녀가 지켜본 그는 살아 있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가 그에게 다시 희망을 주고 있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희망을 가져 봐도 되는 걸까.”

    이 세계에 루스벨라가 원하는 소원이라면 그것이었다. 이곳의 데니스도, 루스벨라도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것.

    더는 이곳이 과거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더 기울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정말…… 정말 네가 나를 치료해 줄 수 있어?”

    “물론, 이에요. 제 치유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믿어 볼게.”

    이번에는 반대로 데니스가 이쪽 세계의 루스벨라의 손을 붙들었다. 그녀가 상당히 당황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너를 믿을게. 네가 원하는 대로 널 해치려는 자들에게서 너를 지키려고 나도 노력할게.”

    그러니까…….

    “나 좀, 제발 도와줘.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아. 이런 삶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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