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붕대로 감아 얼굴을 감췄지만, 빛나는 녹색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잖아.’
이쪽 세계에서의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치유사로서 와 있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왔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엄청난 고생을 했으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얼굴의 화상은 뭐지?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걸 보면 전신 화상을 입은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는 아예 이곳의 루스벨라에 대한 소문이 뚝 끊겼다. 하인들의 입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불길하고 끔찍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루스벨라는 방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는 신문들의 기사를 읽었다.
병약한 데니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바깥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하는 일이었으니까.
곧 그녀는 어렵지 않게 이곳에서 가문이 어떤 끝을 맞이했는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지펠론 백작가에 일어난 의문의 화재 사고」
「해스워스 자작과의 이혼 후 지펠론 백작가에서 머무르던 루스벨라 지펠론 영애는 과연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미 한 차례 가주인 지펠론 백작과 어린 쌍둥이 남매들을 불행한 마차 사고로 잃었던 여인이었으나, 끝내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 사고로 인해 생사가 불분명해졌다.
이혼 후 오갈 데 없었던 그녀가 친정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용의자여서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 낸 가엾은 피해자여서일까.」
그 기사를 읽자마자 피가 차갑게 식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고가 아니야.”
날 죽이려고 낸 불이구나.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쪽의 루스벨라가 심하게 다친 일은 그놈들의 소행 탓임을.
아벨과 에덴은 완전 범죄를 계획했을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이쪽의 루스벨라는 평판도 바닥이니, 저주받아 죽었다는 소문에 수긍할 거라 여기면서.
관심도 없는 여자의 죽음에 누가 타살 의혹을 제기할까.
“고모님처럼 죽여서 성력석을 빼내려고…….”
마차에서 심장이 뚫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 가던 릴리안을 떠올렸다.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둔 고모의 뒤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러라고 고모님께서 나를 살리신 게 아닐 테니까.’
무기력하던 몸에 오랜만에 활기가 차올랐다. 분노였다. 여전히 루스벨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적어도 힘든 상황일지라도 외면하지는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도.
“목소리가…… 흉해서…… 죄송, 합니다.”
그사이 이쪽의 루스벨라가 다시 듣기 힘든 목소리로 데니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녀를 데리고 온 하인마저도 인상을 찌푸렸지만, 데니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됐어. 이런 환자를 치유사라고 데리고 온 카트린 부인이 이상한 사람이지.”
“도련님!”
“뭐. 어쩌라고. 어차피 후계자가 카트린 부인 소생인 루이스로 낙점된 거 아니었어? 병약한 나는 완전히 관심 밖의 일일 텐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다가는 화를 입으실 수도 있습니다.”
데니스의 말이 옳았다. 데벤테르 후작가의 후계자는 기어이 카트린 부인의 아들, 루이스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카트린 부인은 나름의 자비 겸 조롱으로 데니스에게 치유사를 보낸 것이었다.
‘일부러 그와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이쪽의 나를 선택한 건가.’
그렇다면 상당히 악취미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카트린 부인에 관해서는 데니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얼굴을 굳히고 하인의 말에 비아냥거렸다.
“네가 카트린 부인에게 애완견처럼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치지만 않으면 내 생활은 늘 그랬듯 조용하겠지.”
“그건…….”
하인이 정곡을 찔렸는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데니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 집에 어디 마음 편하게 둘 곳이 있던가.
‘대다수가 이미 카트린 부인의 사람들인걸.’
“귀찮아지는 건 바라지 않으니, 물러가. 카트린 부인께는 치유사를 보내 줘서 감사하다고 전하든가.”
“……알겠습니다.”
감사를 전해 달라는 건 반어법임을 저 하인이 모를 리 없었다. 적당히 충직해 보이는 저 하인은 결국 카트린에게 모든 것을 고할 것이다.
하지만 데니스는 두렵지 않았다. 이미 병들고 지친 몸뚱어리는 한계에 다다랐음을 그에게 계속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조금 더 죽는 날이 앞당겨진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어.’
그는 지쳤다.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하며 겨우 연명하는 삶에는 넌덜머리가 났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카트린 부인의 끄나풀이 사라졌다. 데니스는 그 즉시 침대에 털썩 엎어져 치유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충고를 해 줬을 뿐이다.
“맘대로 해. 너도 결국 카트린 부인의 사람이겠지? 날 치료하는 게 아니라 죽이거나 괴롭히는 게 목적일 테니 지금 당장 꺼져 주면 고맙겠어.”
“…….”
“목 상태 안 좋은 거 아니까, 대답 안 하고 도망쳐도 상관없어.”
까칠하게 덧붙이면서 데니스는 아예 이불마저 뒤집어썼다. 환자가 쓰기에는 너무 낡은 이불이었다. 초라하다 못해 궁색하기까지 한 이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쪽의 루스벨라가 돌연 몸을 일으켜 나갔다.
“저기. 어딜 가는 거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거지? 그렇지?”
루스벨라는 발만 동동 구르며 이쪽의 자신이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굳이 따라가지 않은 이유는, 어쩐지 이곳의 자신이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직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내가 화재에서 살아남아서 후작저에 온 게 과연 우연일까. 난 아니라고 믿고 싶어.’
그녀 자신을 믿어 보고 싶었다. 다른 삶의 궤적을, 그것도 최악으로 치닫는 생을 살고 있었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다.
‘돌아올 거야. 분명.’
그래서 오랫동안 굳어 있던 입을 열어 이쪽의 그녀를 배웅했다.
“잘 갔다 와! 기다리고 있을게!”
데니스의 생각은 아주 달랐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치유사를 이불 너머로 빼꼼 쳐다보더니 툴툴거렸다.
“흥. 역시나 도망칠 기회를 주니까 가네.”
“다시 올 거예요.”
“차라리 잘됐어. 이런 끔찍한 저택에 있어 봤자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루스벨라의 말이 들리지 않으니 여전히 일방통행과 같은 이상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녀는 타인을 불신하고 홀로 고립된 데니스가 가여웠다.
‘사실 외롭고, 자신처럼 피해자가 생기질 않길 바라는 마음이 큰 거면서.’
이쪽 세상의 그는 그녀가 알고 있는 데니스처럼 강하지는 않았지만, 선한 것은 똑같았다. 루스벨라는 그 사실이 정말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작게 데니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닿지 못하더라도, 애정은 그대로였기에 이제는 버틸 수 있었다.
“괜찮겠죠? 난 이곳의 내게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 보려 해요. 설령 그 끝이 좋지 못하더라도……. 이곳의 끝을 본다면 나 또한 돌아갈 수 있겠죠.”
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이곳에 보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째서 이것이 데니스를 위한 선물인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을 루스벨라는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홀로 고통에 짓눌려 가던 그녀가 진정 미쳤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이상하게도 그런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루스벨라의 말을 듣지 못하는 데니스는 오한이 들었는지 부르르 떨었다.
“겨울도 아닌데, 왜 자꾸 추운 거야? 이 방에 진짜 유령이라도 있나.”
어떻게 보면 반은 맞는 소리였다. 루스벨라는 머쓱해져서 데니스에게서 떨어졌다.
“유령은 무슨. 지긋지긋한 감기 기운이겠지. 카트린 부인의 새 감시꾼도 쫓아냈으니 잠이나 자야겠다.”
그러고 데니스는 삐걱거리고 딱딱한 그의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었다. 낡은 이불로 몸을 칭칭 감고서.
몇 시간이 지난 후, 그에게 한 인영이 다가왔다.
***
‘으음…….’
아침이 밝았다. 데니스는 작은 창문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침대 위에서 뒤척였다.
누군가 그를 불렀다.
“도련님…… 아, 침입니다. 일어나셔서, 치유를, 받으셔야죠.”
“싫어……. 5분만 더 잘래.”
“안, 됩니다. 일어……나세요.”
“졸리단 말야……. 좀 봐줘.”
비몽사몽한 상태로 대꾸하자 상대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졸린 상태에서도 데니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이씨. 누군데 자꾸 날 깨우는 거야? 모처럼 이부자리도 푹신한데 그냥 내버려 두지!’
거기다 그는 이 후작저의 천덕꾸러기였다. 누가 그를 아침부터 깨워 가며 챙길 리가 있겠는가.
“저리 가……. 난 더 잘 거야.”
유달리 오늘따라 푹신한 침구에 몸을 파묻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냥 이대로 자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푹신해서 좋았…….
‘응?’
잠깐만.
‘내 침구가 그렇게 쾌적하고 푹신할 리가 없잖아?!’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부실한 몸은 일으키는 것조차 어려워 눈만 동그랗게 부릅뜨고 주위를 살피자, 어제 도망친 줄 알았던 화상 입은 치유사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으, 으악! 뭐, 뭐야?!”
“뭐, 긴요. 시중……을 들, 려고.”
“너, 너 도망친 거 아니었어? 뭐야! 여기 왜 있어!”
얼굴이 새빨개진 데니스는 재빨리 침구로 몸을 돌돌 말고 치유사를 노려봤다.
치유사, 루스벨라는 차분하게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가리켰다.
“어, 제 나간…… 것은 도련님의 그, 침구를 바꾸려고…… 한, 일이었어요.”
“뭐? 이, 이건 언제 바꾼 거야!”
“어, 제. 주무실, 때…….”
“필요 없어! 도로 가져가!”
하지만 도로 가져가라는 호통과 다르게 이불을 잡은 손가락은 펴지질 않았다. 너무 오랜만의 뽀송한 이불이었던 터라, 몸이 머리의 명령을 듣길 거부했다.
“좋아, 하시는…… 거 같은, 데요.”
“아니야! 그, 그것보다 이건 어떻게 사 온 거야! 돈이 어디서 났다고…….”
그 말에 이쪽의 루스벨라는 조금 상처를 받았는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데니스도 합, 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민망함에 사과를 하진 못했다.
“카트린, 부인께서, 저를, 고용하실 때…… 주신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걸 사용했다고? 날 위해서?”
“도련님은, 제가, 치료해야 할, 환자……니까요. 당연, 한 거, 아닌가요.”
목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쉭쉭거리는 호흡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불안정했고, 그래서 듣기 싫었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든 책임감과 강직함, 그리고 바보 같을 정도의 순수함은 데니스를 당황하게 했다.
‘뭐야. 그깟 돈 받았으면 화상 자국 치료하는 데나 쓸 것이지…….’
미련함에 기가 찼지만 데니스는 차마 그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맘대로 하든가!”
“그, 럼 계속, 남아 있어도, 되는 건가요.”
“맘대로 하랬지!”
“알겠,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