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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30화 (130/166)
  • 130화

    루스벨라가 릴리안의 시신을 부여잡고 우는 동안, 경비원이 혼자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이고, 마님이 도통 오시려 하질 않으셔서 그만……. 히익! 이, 이게 뭐야?!”

    경비원은 바닥에 늘어진 릴리안의 피투성이 시신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벨에게 끔찍하게 살해된 릴리안의 모습이 어찌나 참혹한지, 경비원의 바지춤이 축축하게 젖었다.

    “사, 사람이 죽었다! 누가 좀 도와주시오!”

    그래도 용케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것은 잊지 않았는지, 경비원이 소리를 지르자 해스워스 영지 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모여드는 사람들은 바라보며 루스벨라는 망연히 읊조렸다. 릴리안의 시신을 계속 붙들고 있기는 했으나, 그녀의 숨이 끊긴 이후로는 더는 고모의 육신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님께 연락드려!”

    “사후 처리는 그럼…….”

    “지펠론 백작가에 연락을 해야…….”

    몰려든 인파가 곧 릴리안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루스벨라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무기력했다. 지쳤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길을 나섰다. 이곳에 오기 전에 거쳤던 깜깜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원수를 죽여야 하는데 루스벨라는 이곳에서 실체 없는 유령에 불과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지켜보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화가 나.’

    갈 곳 잃은 분노가 그녀의 마음을 새까맣게 태웠다. 재만 남아 힘없이 부스러지려는 마음을 겨우 붙들고 정신을 차리니, 다시 데벤테르 후작저에 도착해 있었다.

    데니스의 구석진 방, 그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별안간 데니스가 루스벨라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또 왔어?”

    “어?”

    설마 그가 나를 알아보는 걸까?

    하지만 아쉽게도 아니었다.

    “이런 병신이라도 데벤테르 후작가의 성을 따고 싶어 하는 머저리들이 있긴 하네. 질리지도 않나. 이깟 구혼서, 보내면 다 불살라 버리면 그만인데.”

    “아…….”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구나.’

    그가 후계자도 가지지 못하는 약골이라고 소문이 났어도 기어코 청혼서를 보내는 하이에나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뭘 바란 거야, 멍청이처럼.’

    잠시 가졌던 헛된 기대가 우스웠다. 루스벨라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데니스가 항상 누워 있는 침대 근처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을 했다.

    “데니스.”

    “아. 이거 또 벽난로에다 태우려면 골치 아픈데. 내 방에는 벽난로가 없어서 내려가야 한단 말이야.”

    “난 이제 셀레누스 님이 원망스러워지려고까지 해요. 여긴 과거도 아닌 것 같은데…… 그분이 나를 이곳에 보낸 목적이 무엇일까요? 다 끝나면 바로 아벨을 죽이겠다는 각오를 다져 오라는 걸까요?”

    “이만큼 했으면 포기를 하지, 좀.”

    “너무 지쳐서…… 나 조금만 쉴게요. 그때까지 죽지는 말아요.”

    루스벨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대화가 아닌 독백이 이어졌다. 하지만 루스벨라는 꿋꿋이 데니스와 대화하는 것처럼 그가 말을 다 끝내고 나면 입을 열었다.

    “당신마저 여기서 죽어 버리면 정말 나는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그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졸려요. 잘게요.”

    영혼 상태이니 졸리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루스벨라는 피곤했을 뿐이다. 정신적 피로가 아득할 만큼 쌓여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차라리 이곳이 기나긴 악몽이었으면 했다. 눈 뜨고 일어나면 사랑하는 그가 멀쩡히 숨 쉬고 있을 그런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꿈이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루스벨라는 마치 방 안의 가구처럼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

    얼마나 붙박이장처럼 그 자리에 오도카니 있었을까.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고, 새로운 소식들이 떠들기 좋아하는 하인들의 입소문을 통해 들어왔다. 루스벨라는 쥐 죽은 듯이 웅크려 있어도 가끔 들려오는 소문은 쏙쏙 주워들었다.

    주로 안 좋은 소식들이었다.

    “전에 윈체스터 공작님의 약혼녀였다가 파혼당한 그 영애,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라?”

    그 말에 루스벨라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저주는 내가 아니라 아벨이 받았을 텐데……. 이쪽의 내게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귀를 쫑긋거리는 사이 하인들은 더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그 영애의 친정인 지펠론 백작가 사람들이 마차 사고로 다들 죽거나 행방불명 되었다며.”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루스벨라의 몸이 불안감으로 덜덜 떨렸다.

    “백작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쌍둥이 남매는 실종되었다는 거 나도 들었어.”

    “그것 때문에 전에 오르반 백작 부인이 살해당해 돌아가신 것도 다 그 여자 때문이라며?”

    “세상에. 완전 가문 잡아먹는 여자의 탄생이네.”

    “내 말이. 그래서 그 여자랑 결혼한 해스워스 자작이 요즘 겁에 질렸는지 이혼이라도 불사할 것 같던데?”

    “그것까지 이루어지면 정말 오갈 데 없어지는 신세가 되는 건데……. 불쌍한 여자네.”

    “어쩌면 그 여자도 저주로 인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휴. 무서워라. 난 일이나 하러 갈래.”

    깔깔깔. 남의 불행을 이야깃거리 삼아 떠들던 하인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루스벨라는 굳어 있던 몸을 들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루스벨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딴 건 저주가 아니며, 아마도 뒤에서 누군가가 저주처럼 보이도록 우연을 가장한 사고를 이쪽의 그녀 주변에 일으키고 있음을.

    ‘이렇게까지 할 인물이라면 하나밖에 없겠지.’

    아벨. 그리고 에덴.

    이곳에서의 릴리안이 살해당한 비극은 그날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벨이, 에덴이 그날 이쪽의 루스벨라의 신성력을 조금이라도 감지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머리를 굴려 알아내긴 했으나, 루스벨라에겐 이 상황을 타개할 힘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켜볼 수밖에 없나.’

    무력함이 밀려왔다. 여전히 그녀는 유령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애벌레가 고치가 되듯 구석으로 들어가 몸을 구겼다. 악몽이 어서 지나가길 빌었다. 천둥 번개가 다 치고 난 후의 맑은 하늘이 그리웠다.

    ***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데벤테르 후작저 내에서 자잘하지만 여러 사건이 있었다.

    루스벨라에게 유의미한 것들만 뽑아 보자면, 데니스의 주치의가 쫓겨났다. 그가 돌팔이에 치료도 건성건성 하는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내 보석을 훔치려 해?!”

    “히익, 사, 살려 주십시오!”

    그 의사가 하필이면 겁도 없이 카트린의 보석함에 손을 댔기 때문이었다.

    시원찮은 진료비에 만족하지 못하던 그는 어느 날 후작저 내에서 친해진 시녀와 은밀한 연애를 즐기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시녀가 카트린의 보석함을 관리하는 시녀였고, 보석에 눈이 먼 의사가 시녀를 꾀어 야금야금 보석을 훔치다 걸렸다.

    ‘자업자득이네.’

    그것만은 루스벨라에게 유일하게 통쾌한 사건이었다. 욕심만 잔뜩 부리다 알거지 신세로 쫓겨난 의사의 소식을 들으며 루스벨라는 새로운 걱정을 품었다.

    ‘그럼 이제 누가 데니스를 진찰하지?’

    못마땅한 실력의 의사였지만, 데니스를 애물단지로 여기는 데벤테르 후작저에서 과연 아픈 그를 위해 제대로 된 의사나 치유사를 섭외해 올지는 미지수였다.

    “이 기회를 계기로 내가 죽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네.”

    데니스는 여상히 그런 소리나 중얼거렸다. 침대에 항상 누워 있고 매일 기침하느라 창백한 그의 몸은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았다.

    루스벨라 역시 그런 그를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데니스의 몸 상태는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이지, 내일이라도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루스벨라는 늘 불안했다.

    그런데 예상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새로운 치유사를 데려왔어요. 도련님.”

    “뭐? 누가?”

    “카트린 부인께서 은혜를 베푸셨어요. 감사히 여기세요, 도련님.”

    데니스를 지극히 싫어하는 카트린 부인이 치유사를 한 명 데려온 것이다. 딱딱하게 제 할 말만 전하고서 돌아가는 하인을 보며 데니스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뭐야. 이건 새로운 고문 방법인가? 그 치유사, 알고 보면 치유가 전문이 아니라 독살이 전문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데니스. 카트린이 이상한 자를 데려왔을 것 같아.’

    루스벨라는 이제 말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혼자 생각으로만 데니스의 말에 답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카트린 부인이 무슨 변덕으로 치유사를 섭외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게 절대 데니스에게 호재로 작용하지는 않을 거란 의심이 피어올랐다.

    “일단 두고 보면 알겠지. 날 살리러 온 사람일지, 아니면 돈 받고 날 죽이러 온 사람일지는.”

    데니스는 피 섞인 기침을 계속 토해 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도 루스벨라처럼 일말의 기대도 하고 있지 않았다. 여차하면 이전의 그 돌팔이 의사처럼 쫓겨나길 바라고 있었다.

    “도련님, 새로운 치유사가 왔습니다.”

    “……들여보내든가.”

    “자, 얼른 들어가세요. 오늘부터 당신이 모셔야 할 이곳의 첫째 도련님이십니다.”

    “……뭐야. 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있어? 예의가 아니잖아.”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치유사라기보다는 어느 빈민가에 있을 법한 부랑자로 보였다. 그는 온몸을 낡고 검은 로브로 칭칭 가리고 있어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게, 도련님. 이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카트린 부인께서도 허락하신 옷차림입니다.”

    “그래도 얼굴은 봐야 할 거 아냐. 앞으로 계속 마주칠 사람인데.”

    그 말의 요지는 이거였다. 저 인간이 카트린의 수하일지 아닐지 모르는데 얼굴도 못 보면 내가 어떻게 안심하겠느냐고.

    “그렇다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도련님께서 후회하지나 마십시오.”

    하인이 검은 로브의 치유사를 툭툭 건드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하인이 그 치유사의 얼굴을 덮는 로브를 벗겼다.

    “무슨…….”

    “보시다시피 이런 사정이라서 카트린 부인께서도 허락하신 겁니다.”

    로브에서 얼굴을 드러낸 사람은 심한 화상을 입은 흔적이 엿보였다. 아직도 상처가 남았는지, 붕대로 곳곳을 동여맨 모습이 처참했다.

    “거기다 목도 상하여 말도 거의 못 하는 상태이니, 도련님께서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잘…… 부탁…… 드립니다…….”

    갈라지고 깨진 목소리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치유사가 말하는 모습은 안쓰러웠다. 무뚝뚝한 하인도 치유사가 얼굴을 드러내길 꺼려 하자 금방 로브를 덮어 줬다.

    ‘방금 그 목소리…… 설마?’

    “당신…….”

    루스벨라만이 눈앞의 치유사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오랜만에 소리를 냈다.

    저 사람이, 지금 여기를 왜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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