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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29화 (129/166)
  • 129화

    “예전에 놓쳤던 걸 이제야 찾았네.”

    아벨이 싱긋 웃었다. 겉으로 보기엔 미남자의 훈훈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잔뜩 겁에 질린 루스벨라는 릴리안에게 소리쳤다.

    “도망치세요! 고모님! 저 사람이 에덴의 수장이에요!”

    ‘아벨에게도 내 모습이 보일까? 목소리가 들릴까?’

    그런 걱정이 덜컥 심장을 조여 왔다. 만일 아벨도 신성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릴리안처럼 그녀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소멸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모님을 구하는 게 우선이야.’

    루스벨라는 필사적이었다. 어렵게 만난 혈육이었다. 희생하는 것이 괜찮다는 릴리안을 여기서 잃으면 그나마 잡았던 희망 한 자락도 사라지는 셈이었다.

    “저게 제가 말했던 아벨이에요. 붙잡히면 끝이에요. 빨리 도망쳐야…….”

    말끝이 흐려졌다. 루스벨라도 알고 있었다. 저 괴물에게 한 번 눈에 띈 이상, 도망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전에 루스벨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였다. 그 자리에 데니스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진즉 죽은 목숨이었다.

    ‘각성한 신성력을 쓸 수만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무엇이라도 바꿀 수 있을 텐데.

    그때였다.

    릴리안이 고개를 돌려 루스벨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만 벌려 조카에게 그녀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지금이 나의 사명을 이룰 때구나. 아가.’

    미안하다.

    “안 돼……. 뭘 하시려는 거예요, 고모님! 어서 도망치세요! 달아나야 한다고요!”

    루스벨라가 목이 아프도록 도망치라고 릴리안에게 미친 듯이 경고했지만, 릴리안은 듣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를 더욱 똑바로 펴고 우아하고도 다분히 귀족적인 어투로 아벨에게 물었다.

    “누구길래 귀족의 마차에 함부로 타려는 것이지? 매우 불쾌하군.”

    “음? 상황 파악이 안 돼?”

    “그쪽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알 까닭이 있나? 마부, 마부는 무엇하는가? 어서 이 불청객을 내쫓지 않고.”

    “흐으음……. 힘이 약한 경우인가.”

    보통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신성력의 기운을 알아차리고 도망치려 하던데.

    아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을 듣고 릴리안이 인상을 팍 썼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도망은 왜 치지? 그리고, 초면에 계속 반말을 쓰다니. 그게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가?”

    “뭐어……?”

    릴리안의 말에 아벨이 어이가 없어 대꾸를 못 했다. 외관상으로만 봤을 때 둘의 나이 차이는 상당했으나, 아벨 쪽이 월등히 오래 살아왔으니 릴리안의 말이 가소롭게만 여겨졌을 터다.

    “어서 나가게. 되먹지 못한 자인 듯하니 마차의 수리비는 청구하지 않겠네.”

    훠이훠이 저리 꺼지라는 의미로 릴리안이 손을 휘젓자 아벨이 폭소했다.

    “푸흡, 아하하하하하하하하……!”

    뒤로 목을 젖혀 가며 소리 내어 웃는 아벨을 두고 루스벨라는 어떻게든 릴리안을 설득하려 애썼다.

    “고모님, 제발 도망치세요. 도망가셔야만 해요. 고모님마저 잃으면 저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거예요.”

    릴리안의 어깨를 붙들고 루스벨라가 울면서 애원했다. 조카의 얼굴과는 달리 평온한 표정의 릴리안이 여전히 입만 움직여 말했다.

    ‘아니, 너는 이겨 낼 수 있을 거란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게 주어진 사명이 헛된 것이 아니라면, 너는 지금보다 강해져 저 괴물 같은 사내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야.’

    “그깟 사명이 무엇이길래……!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야만 하는 건가요!”

    이렇게 고통만 줄 거라면, 이런 능력 따위는 바라지 않았을 텐데.

    “이깟 신성력……. 버릴 수만 있었다면 진작 버렸을 거예요.”

    울면서 말하는 거라, 발음이 뭉개졌다. 루스벨라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못 하고 릴리안을 붙들고 오열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겠지.’

    “…….”

    ‘괜찮을 거란다, 아가. 결국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너란다. 신이 안배한 길이 너무나 고통스러워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달리면 네가 원하던 것이 주어질 거야.’

    사랑한다. 루스벨라.

    “안 돼요, 안 돼요, 고모님……!”

    릴리안이 루스벨라에게서 멀어졌다. 한참을 웃어 대던 아벨이 릴리안의 멱살을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루스벨라의 뻗은 손길은 닿지 않았다.

    “아주 웃기는 대체품이네. 완전 하급에 품질도 좋지 못하면서 입만 살아서 터는 게 걸작이야.”

    루스벨라는 소금 기둥처럼 굳었다. 아벨이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너무나 수치스럽게도 그를 보자 덜컥 겁이 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맹수를 두고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것 놓지 못하겠나? 하는 짓을 보아하니 시정잡배에 불과한 청년이었군. 이곳 영지의 경비대에 넘기기 전에 그만하게. 내 마지막 경고일세.”

    “그깟 벌레들 따위 백 명이 몰려와도 소용없어.”

    하지만 아벨은 오롯이 릴리안에게만 시선을 주었다. 루스벨라는 그에게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 세계의 다른 인간들처럼 그에게 루스벨라의 존재는 인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성력이 나를 볼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단 건가?’

    하지만 릴리안만큼은 루스벨라를 봤다. 그녀가 버릇처럼 말하던 사명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너를 위해 희생할 운명이란다.”

    ‘설마…….’

    등골이 서늘했다. 루스벨라는 릴리안과의 만남이 이 답답한 과거 같지 않은 과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열쇠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라…… 정말 고모님의 말씀처럼 이 모든 게 그저 필연이었던 건가……?’

    내가 어떻게 해도 고모님이 아벨에게 죽는 게 예정되어 있었던 거야?

    나 때문에?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거지?

    거기까지 결론이 닿자 루스벨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릴리안은 괜찮다고 했지만, 죄스러워 절망에 빠진 눈으로 그녀를 한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벨이 검붉은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여태까지 봤던 대체품들 중에 가장 재미있었어. 굳이 회수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미약한 힘이지만, 이거라도 가져가지 뭐.”

    “무슨…….”

    컥.

    “아아아아아아악!”

    싫다. 또 그때와 똑같은 장면이 재현되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비명을 질렀다. 데니스가 죽던 그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릴리안의 가슴이 아벨의 손에 뚫려 피가 흘렀다.

    “으아……. 아아아…….”

    숨도 못 쉬고 꺽꺽거리는 루스벨라는 엉금엉금 기어 릴리안의 발치로 갔다. 신성력을 퍼부어 주면서, 릴리안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루스벨라의 노력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릴리안이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긴 했어도, 신성력은 릴리안에게도 작용하지 않았다.

    황금빛의 신성력이 부질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벨라는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그녀가 미칠 것 같았으므로.

    “컥……. 네, 네놈…….”

    놀랍게도 릴리안은 아벨에게 심장이 뽑힌 상태에서도 숨이 붙어 있었다.

    아벨은 릴리안에게서 탈취한 성력석을 보고 품평했다.

    “역시나. 이런 밀빛의 성력석이라니 최악이잖아. 기껏해야 열 번? 그 정도만 사용하면 닳겠네.”

    “닥쳐, 이 개자식아!”

    루스벨라가 욕을 하며 아벨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도 예상했듯이 아벨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닿지 못했다. 유령처럼 아벨의 몸을 통과하여 망연자실했을 뿐이다.

    마차는 순식간에 릴리안에게서 흐른 피로 흥건해졌다. 조카를 보러 오겠다고 단정하게 멋을 낸 드레스도 거무죽죽하게 피로 물들어 버렸다.

    “이렇게 하급인 것을 알았으면 굳이 내가 귀찮게 올 필요도 없었는데……. 아, 짜증 나.”

    촤악. 아벨이 릴리안을 관통하던 팔을 뺐다. 그의 손에는 피로 물든 밀빛의 성력석이 들려 있었다.

    “재미없어. 얼른 돌아가서 쉴래.”

    “어딜 간다는 거야……. 내놔. 그건 고모님의 것이야. 너 따위가 훔쳐 갈 물건이 아니라고!”

    거기 서란 말이야.

    루스벨라가 절규하며 뱉은 말을 들은 것일까. 아벨이 에덴으로 귀환하려 신성력을 쓰려던 순간 멈칫했다.

    “……뭐야?”

    그가 멈춘 것은 루스벨라의 목소리를 들어서는 아니었다. 피 웅덩이 속에서 겨우 그의 발목을 붙잡고 색색거리는 릴리안 때문이었다.

    “너를……. 저주한다. 영겁의…… 시간을 거스른 자여. 신의…… 자리를, 넘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해쳤던 자여. 나의 원통함이…… 네가 죽인, 이들의…… 원한에 닿아, 너를 기필코 궁지에 몰아넣을 것이다.”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도 릴리안이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만은 생생했다.

    루스벨라는 똑똑히 봤다. 저주를 퍼붓는 동안 릴리안의 녹색 눈동자가 밀빛으로 번쩍이는 것을. 그것을 아벨도 목격했는지, 잠시 굳은 얼굴이 되었다.

    “재수 없게. 신성력의 핵인 성력석도 빼앗긴 주제에 무슨 저주를 퍼붓는다고.”

    굳은 얼굴도 잠시, 아벨은 불쾌해하며 릴리안의 식어 가는 몸뚱어리를 발로 걷어찼다. 릴리안은 힘없이 마차 바닥 위를 굴렀다. 루스벨라는 그녀의 머리가 좌석에 찍히기 전에 붙들어 세우려 했지만, 이제 더는 고모의 육신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고모님.”

    릴리안이 저주를 마치고 절명해 있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고모의 시체를 껴안고 루스벨라는 구슬피 울었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눈물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했다.

    “아아…… 으아아아…….”

    릴리안의 품에 고개를 파묻은 탓에 루스벨라의 눈물은 흡사 피눈물처럼 보였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신을 두고 아벨은 ‘수확’한 성력석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에덴으로 귀환했다.

    “죽여 버릴 거야.”

    홀로 남은 마차 안에서 루스벨라가 중얼거렸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아벨 그 자식을 반드시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증오에 차서 릴리안의 시체를 부여잡고 울던 루스벨라는 그 말만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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