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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28화 (128/166)
  • 128화

    “이곳의 저를 찾아가 보는 게 어떨까요?”

    “너를?”

    “네. 아무래도 해답을 찾으려면 이곳의 저를 각성시켜야 할 것 같아서요.”

    각성의 조건이 까다롭다는 것은 안다. 루스벨라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각성했는지를 깨닫는다면 지금 궁지에 몰린 이곳의 그녀에게 각성은 폭력적인 강요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시도하는 게 더 나아.’

    루스벨라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릴리안을 기적처럼 만난 지금을 허투루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의 이방인인 그녀를 어느 누가 또 발견할 수 있을까.

    “각성의 조건은 알고 있을 텐데, 그 아이가 그것을 바랄까?”

    시련이라고 부를 만큼 강한 상실과 고통. 소중한 이를 잃는 것에 필적하는 사건이 일어나야만 비로소 각성할 수 있다. 그때야말로 신성력 보유자가 가지고 있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도 알잖니. 막 각성했을 당시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죠.”

    너무 잘 알아서 그 기억만 도려내고 싶을 정도니까요.

    릴리안이 걱정스럽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에 대해서는 루스벨라도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쪽의 나도 같은 사람이지만, 각성을 원할까?’

    이곳의 그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지옥 같다는 것을 안다. 한때 루스벨라가 가장 우려하던 사태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정략결혼이라는 핑계로 사람을 사들여 학대하고 있는 미친 인간의 소굴에서 죽지도 못하고 사는 것.

    “그러니까 더 만나러 가야겠어요.”

    “직접 물어보려고?”

    “네. 저는 이쪽의 저와 대화를 나눌 수 없으니 고모님께서 대신 의사를 물어봐 주세요.”

    몸이 천 개의 조각으로 갈라지는 듯한 아픔을 감수해야 한대도 각성할 것인지를.

    ‘누군가에게 강제로 시키는 건 역시 내키지 않으니까.’

    조카가 내린 결정에 릴리안은 어두운 녹색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용 복장을 옷장에서 꺼냈다.

    “결정을 내렸다면, 가자꾸나. 한시가 급한 일이니.”

    “좋아요.”

    오랜만에 루스벨라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가지고 있는 목적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가슴이 가벼워졌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잘되기를 바라자.’

    그래야만 했다. 루스벨라는 릴리안을 따라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제발 행운이 그녀에게 따라 주길 빌었다.

    하지만 인간 만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적이 있던가.

    “……신성력이 감지되는데?”

    저 멀리, 수도의 황성 밑 에덴에서 가만히 앉아 잠이나 자고 있던 아벨이 눈을 떴다. 사람의 피처럼 검붉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전에 놓쳤던 그거네.”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대체품이 언제 다 익어 갈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심심풀이로는 제격이겠어.”

    영차.

    아벨이 권태롭게 늘어져 있던 아이의 몸을 일으켰다. 조막만 한 발을 유골의 산에 내딛자마자 금세 어른의 모습으로 변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언젠가 계속되는 삶의 지루함을 해소하고자 어린아이들의 틈바귀에 섞였을 때 배운 노래가 지하 동굴을 울렸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노랫소리가 멈췄을 때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

    릴리안과 루스벨라는 해스워스 자작령으로 향했다. 그곳은 루스벨라가 결혼하여 끌려가듯 간 그녀의 남편 영지였다.

    “이쪽의 루시가 날 바로 알아보면 좋겠는데.”

    “제가 고모님을 몇 년이 지났어도 금방 누구인지 알아챈 것처럼, 이쪽의 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러면 좋지. 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아예 이쪽의 너를 못 만나는 일이야.”

    해스워스 자작의 전 부인들이 어떻게 되었나. 시체가 되어 겨우 저택에서 벗어나거나, 실종 상태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들이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남편의 학대를 법원에 고발하는 일은 없었다. 아예 자작이 부인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누가 찾기라도 하면 아프다는 핑계를 댔기 때문이었다.

    “이쪽의 제가 해스워스의 저택 안에 갇혀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제가 고모님께 보고할게요.”

    여차하면 이쪽의 루스벨라에게 탈출이라도 감행시킬 작정이었다. 각성과 달리 탈출의 경우 자신 있게 그녀가 선택할 것임을 루스벨라는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친정인 지펠론 백작가에 있을 때 늘 그랬으니까.’

    고모인 릴리안은 어머니처럼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몇 년 만에 보는 고모가 친아버지인 지펠론 백작보다 훨씬 나았다.

    릴리안이 도착했다는 소식만 이쪽 루스벨라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맨발로라도 뛰쳐나올 것이다.

    “누구십니까? 신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릴리안과 루스벨라가 탄 마차가 해스워스 영지 앞에 도착하자, 통행을 관리하는 자작가의 사람이 나왔다.

    릴리안은 침착하게, 그리고 우아하면서도 오만한 귀족의 모습으로 그에게 말했다. 매섭고 차가운 눈매가 경비원의 어깨를 절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오르반 백작부인, 릴리안이 왔다고 해스워스 자작부인에게 알려 주게. 자작부인의 고모가 나이니, 내 이름을 들으면 맞이하러 나올 거네.”

    “해스워스 자작부인을 만나러 오셨다고요? 죄송하지만 저희 영주님이신 자작님께선 현재 자작부인과 출타 중이십니다.”

    “정말인가? 혹여 자네 주인이 외부인이 들어오면 그리 대답하라 명령한 것은 아니고?”

    그녀의 말에 지레 찔렸는지, 경비원의 목소리가 한층 격양되었다.

    “사실입니다. 지금 저희 영주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의심이 아니라 합당한 의문일세. 자네도 해스워스 자작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의 전부인들이 어째서 요절했는지 말이야.”

    “그건…….”

    경비원이 우물쭈물거리는 틈을 타 릴리안이 마지막 한 방을 꽂아 넣었다.

    “내가 비록 남편을 잃은 미망인 신세에 자식도 없다 하나, 오르반 백작가가 해스워스 자작가에 비해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 여기네.”

    말해 주게.

    “진정 해스워스 자작부인이, 내 조카가 이곳에 없는가?”

    차분한 릴리안의 목소리는 경비원을 두렵게 했다. 중년의 여성은 손에 무기라고는 하나도 들고 있지 않았으나 말하는 음 하나하나에 기품과 위압감이 깔려 있었다.

    ‘역시 고모님이셔!’

    이보다 더 든든한 천군만마는 없었다. 루스벨라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릴리안의 돌려 말한 고상한 협박을 경청했다.

    “시, 실은…… 거, 거짓말입니다. 영주님께서 자리를 비운 것은 사실이오나, 자작부인께서는 이곳에 아직 남아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체할 것 없군. 당장 내 조카에게 고모가 왔다고 전하게.”

    “그건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어째서지?”

    되묻는 말에 경비원은 난처해하는 표정이다가 이내 눈을 한 번 꾹 감고 토설했다.

    “영주님께서 부인분을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해스워스 자작령의 누구라도 이 명을 어긴다면 목숨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 아이의 혈육이라도 말인가?”

    “예…….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자작부인을 나가지 못하게 막으라 하셨습니다.”

    경비원은 안절부절못했다. 불쌍한 자작부인의 혈육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니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해스워스 자작에게 들키면 어쩌나 걱정했다.

    “돈 주고 사 온 아내라고 강제하는 게 틀림없어요.”

    루스벨라가 분노에 차서 릴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릴리안도 조카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다면 제안하지.”

    릴리안은 가지고 있던 손가방을 열어 지폐 다발을 꺼냈다. 경비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시선이 지폐 다발에 못 박힌 것을 확인한 릴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 돈을 줄 테니, 내 조카를 만나게 해 주게.”

    “쇤네의 목숨값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싶습니다만.”

    경비원은 돈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말인즉, 해스워스 영지를 떠날 마음까지 먹었다는 뜻이었다.

    “배신하는 주제에 요구하는 게 많네요.”

    “비열한 자들은 쌓은 기반이랄 게 없으니 뭐라도 더 챙겨야 하니까.”

    릴리안이 루스벨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한 대답을 들었는지, 경비원이 눈을 샐쭉하게 떴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무얼 말했다고 그러나? 빨리 이 돈 받고 내 조카나 데려오게.”

    그가 뭐라고 더 입을 열기 전에 손에 두둑한 지폐 더미와 자잘한 보석 몇 알을 쥐여 주니 빠릿하게 움직였다.

    “곧 마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받은 값만큼 서둘러 데려와야 할 것일세. 우리도 피차 급한 사람들이니.”

    “예에.”

    경비원은 꽁지에 불이 난 것처럼 후다닥 해스워스 자작가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구나.”

    마차 안에서 릴리안과 루스벨라는 다시 경비원이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기로 했다. 이쪽의 루스벨라가 오면, 그녀에게 탈출하겠느냐 물어보고 그렇다고 말하면 바로 마차에 태워 달아날 생각이었다.

    ‘뒷일은 몰라. 생각하지 말자.’

    해스워스 자작부인인 이곳의 루스벨라가 납치된다면 파장이 크겠지만, 그것까지 루스벨라가 고려할 사항은 아니었다. 이 일로 곤란해질 사람은 지펠론 백작이었으니, 그건 그의 자업자득이라 수습하고 싶은 마음이 티스푼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계획은 순풍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순조로운 흐름이 루스벨라로서는 마음에 걸렸다.

    마치 산 정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리에 절벽이 있어 발을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추락할 것 같은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똑똑.

    “경비원이 돌아왔나 보구나.”

    노크 소리에 릴리안이 반색하며 마차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루스벨라는 지독한 기시감을 느꼈다.

    “문 열지 마세요! 고모님!”

    “으응? 그게 무슨…….”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문이 부서졌다. 부서진 문틈 사이로 검붉은 눈동자와 희디흰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잡았다.”

    루스벨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벨……!”

    건국제 연회가 열렸던 밤의 습격을 연상케 하는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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