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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27화 (127/166)
  • 127화

    조카의 눈물 젖은 고백을 듣고도 릴리안은 그저 은은하게 미소 짓기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니. 그 사람을 구원하고 싶어서 여기 왔고.”

    “그건…… 맞지만…….”

    “나는 이생에 미련이 없지만, 내게 내린 사명을 버릴 수 없어 버티고 있었던 거란다.”

    아무 미련도 없는 늙은 여인의 메마른 손이 루스벨라의 머리칼을 쓸었다. 눈물방울로 흐려진 시야 끝에 은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머리 색이 바뀌었구나. 회색이 아니라, 은색이야.”

    완연한 각성의 증거지.

    “……정말이네요.”

    지금껏 거울을 들여다볼 일이 없어 몰랐다. 루스벨라의 회색 머리칼은 은발이 되어 찬란한 빛을 품고 있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단다. 나는 오래전에 결심을 마쳤고, 언젠가 내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며 생을 연명했으니.”

    릴리안이 소녀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편안했고, 따뜻했다. 루스벨라는 그것을 쉬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째서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세요? 이런 건…… 불공평하잖아요.”

    “내게는 내 남편이 없는 이 삶이 더 불공평하게 느껴져.”

    숨이 멎는 말이었다. 릴리안은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주, 지독히도.

    ‘정략결혼으로 맺어졌는데도 사이가 무척이나 좋으셨지.’

    루스벨라는 기억했다. 릴리안이 그녀의 남편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싱그러운 꽃과 같았는지를. 숨 막히던 지펠론 백작가를 떠나 릴리안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반짝거리던 기간이었다.

    “무의미하던 생을 마지막으로 환하게 장식하고 갈 수 있는 것만큼 값진 것도 없지.”

    “고모님.”

    “루스벨라, 아가. 넌 내가 좋아하던 네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선한 아이였어. 그런 너를 위해 내 남은 삶을 돌계단 삼아 줄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란다.”

    나는 네가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 잃고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라.

    “저는……. 그러니까, 저는…….”

    “이기적이면 뭐 어떠니. 네 행복을 중시하렴. 네게 부여된 사명도 있으니 그 사명조차 네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써먹으렴.”

    인생은 짧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괴롭지.

    “죄송해요. 죄송해요…….”

    “괜찮아. 네가 행복하다면, 나 또한 행복할 거란다.”

    늦은 밤 릴리안만이 들을 수 있는 루스벨라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고요한 밤, 외딴곳에 있는 저택만이 홀로 어둠 속에 파묻혀 울음소리를 덮었다.

    그날, 루스벨라는 릴리안의 품에서 울다 지쳐 잠들었다. 어떻게 영혼 상태에서 잠들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꿈을 꾸었다. 릴리안에 대한 꿈이었다.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고모의 과거는 서글펐다. 그녀의 일생이 찬란하던 시기는 오직 사랑하던 이를 만나 행복하던 때밖에 없었다.

    하지만 릴리안이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은 ‘사고’로 죽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에덴의 신도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희생하겠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꿈이어서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꿈속의 릴리안은 루스벨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던 삶에 발자국을 남길 기회를 어떻게 마다하겠니.”

    그것도 내가 가엾고 안쓰럽게 여기던, 나를 닮은 조카라면.

    “내가 그리워하는 그이처럼,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야.”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어찌 되나요.’

    루스벨라는 묻고 싶었다. 릴리안이든, 그녀를 위해 심장이 뚫려 죽은 데니스든 잔인하기 짝이 없다고. 사랑하던 이를 잃어 죄책감과 그리움에 젖어 괴로워할 남은 사람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을 거야. 죽은 사람은 결국 잊게 되기 마련이니까.”

    ‘아니요. 나는 그렇게는 못 해요.’

    정말 이기적으로 굴어도 된다면, 그녀는 사랑하는 모두를 살리고 싶었다.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그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설령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희생한 사람들을 잊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릴리안의 말대로 신의 안배에 따라 걷는 일이 사명이라면, 그에 따른 죄책감을 짊어지는 것도 그녀가 마땅히 져야 하는 의무였으므로.

    그래서 루스벨라는 꿈에서 데니스처럼 죽음으로 그녀를 위하는 릴리안에게 울면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잊으라고 하셨죠. 이기적으로 굴라고 하셨죠.”

    하지만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사랑하는데,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보내는 게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잊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내 욕심껏 나를 지키던 사람들을 살릴 방법을 찾을 거예요.

    꿈에서 죽어 가던 릴리안의 모습은 어느새 데니스로 바뀌었다. 창백한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의 몸이 수천 마리의 나비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가려 했다. 루스벨라는 신성력을 사용해 거대한 구를 만들어 붙잡았다.

    “나를 정말 사랑하고 아낀다면, 나를 슬프게 하면서까지 내 곁을 떠나지 말아요.”

    제발.

    ***

    악몽을 꾸고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릴리안의 근심 어린 얼굴이었다.

    “무슨 꿈을 그렇게 꾸니. 잠든 내내 불편해하더구나.”

    “그냥 좀, 악몽을 꿨어요.”

    “육신이 없어 영혼만 있는데도 꿈을 꾸다니, 희한하기도 하지.”

    “그러게요.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얼떨떨하네요.”

    멋쩍게 웃는 루스벨라를 보며 릴리안은 손에 들고 있던 담요를 거뒀다. 조카가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 같은 상태임에도 덮어 줄 것을 가져왔단 사실에 루스벨라는 코끝이 찡해졌다.

    “어젯밤에 사람을 풀어 정보를 좀 구해 봤단다.”

    “어젯밤에요? 전혀 그러시는 기색을 못 느꼈는데…….”

    “너, 하루 내내 잠들어 있었어. 네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거나 사라지는 건가 싶어 걱정했단다.”

    ‘그렇게나 많이 잠들어 있었다고?’

    무려 하루나 잠들었다니, 그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속으로 셀레누스를 찾아도 대답이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많이 지쳤었나.’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 겪는 일투성이라…….”

    “하긴, 그렇겠지. 심지어 이곳은 네가 기억하던 현재와 비교하면 너무 달라졌다고 했지. 그동안 축적된 피로가 누적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릴리안은 루스벨라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되었다며 품에서 쪽지 몇 장을 꺼냈다.

    “이게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구한 정보야. 이곳에서의 ‘네’ 근황을 알아봤다. 그리고…… 네가 온 곳에서 남편이었던 자의 병을 고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도 수소문해 봤다.”

    그녀가 건네준 쪽지에는 이곳에서의 루스벨라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내심 아니기를 바랐는데…… 정말 제게 펼쳐질 수 있는 미래 중에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났네요.”

    지펠론 백작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루스벨라와 결혼한 자는 소문 속 내용과 다름이 없어 그녀를 절망에 빠뜨렸다.

    릴리안이 침통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자기 딸인데 혼처를 나쁘게 골라줄 거라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나 자신이 밉더구나.”

    “아니에요. 원래 그런 분이셨잖아요. ……백작님은.”

    “미안하다. 내가 너희 남매들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지켜야 했는데. 내 동생의 이기심에 휘말려 자라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무뚝뚝한 릴리안의 음성 속에서 진심으로 루스벨라와 카일, 레베카에 대한 미안함이 전해졌다. 루스벨라는 그 소리에 마음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괜찮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누군가에게 투정 부리고 싶었던 어린아이가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됐어요. 절 위해 희생하신다는 분이 계속 미안해하신다니 저도 마음이 쓰여요.”

    “듣기 싫으니?”

    “그런 게 아니라…… 어색해서요. 우릴 보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루스벨라는 차마 릴리안에게 시선을 두지 못하고 재빨리 다음 쪽지를 읽었다. 거기에는 데니스의 상태가 어떠한지, 그리고 완전히 회복할 가능성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었다.

    쪽지에서 전하는 내용은…… 좋지 않았다.

    “완전히 낫게 해 주는 게 아니더라도, 절반 정도도 회복시키기 어렵다, 고요…….”

    “가장 실력 좋은 의사와 치유사를 알아봤지만, 사실이 그렇더구나. 데벤테르 후작가의 장남은 치료 시기를 놓쳐서 어쩔 수가 없다고.”

    “그랬, 군요.”

    루스벨라가 손에 쥐고 있던 쪽지가 구겨졌다. 그녀의 간절하던 마음도 함께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안타깝지만, 데벤테르 후작가에서 그를 얼마나 홀대하는지 알고 있기에 의사나 치유사나 그런 식으로 방치되면 얼마 못 갈 거라고 했다.”

    “죽으면 후작가의 위상이 추락할 테니 살려 두기 위해 의사를 부르고는 있지만요.”

    후작가의 일원들에 대한 증오가 피어올랐다. 데니스가 본래도 지병으로 인해 몸이 약하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심각하게 된 원인으로는 역시 카트린이 준 독약 때문일 것이다. 몸속의 장기가 그 일로 인해 대부분 잘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으니까.

    ‘실력 있는 치유사가, 아니 강력한 신성력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그를 치료할 수 있을 텐데.’

    과거인지 평행우주인지 모를 이 세계에서 그런 인물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찾기 힘들 것이다. 이곳의 루스벨라는 각성은커녕 신성력의 존재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내가 그를 치료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는 두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다못해, 이곳의 자기 자신이 각성하여 데니스를 치료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각성 조건을 달성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이곳의 나에게서 신성력을 끌어낼 수 있다 해도 위험이 너무 커.’

    하지만 이 방법이 가장 나은 방법일지도 몰랐다. 릴리안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데니스를 살리면서도 원래의 흐름과 같아질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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