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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26화 (126/166)
  • 126화

    실종되었다고 알려졌던 고모가 왜 멀쩡하게 살아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벅차오른 루스벨라는 그녀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너…… 무슨 일이 있었구나. 설마 남편이라도 죽이고 온 거니?”

    “그런 거 아니에요…….”

    우는 와중에도 웃음이 피식 나왔다. 하기야 이곳에서의 ‘자신’의 남편이라면 어쩌면 그런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스벨라는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질 것 같아요. 해 드릴 말이…… 너무 많아서요.”

    “그렇다면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내 집으로 가자.”

    릴리안은 조카의 어깨 위에 그녀가 걸치고 있던 숄을 덮어 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다정한 호의는 통과되는 몸 때문에 허공을 짚는 것으로 끝났다.

    “……세상에, 루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릴리안에게 루스벨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된 사정이 있어요.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

    릴리안의 저택은 아담하고 아늑했다.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는 방 안에서 릴리안 혼자 차를 따랐다.

    “제가 어째서 이런 유령과도 같은 상태가 되었냐면…….”

    해가 질 무렵에 시작한 이야기는 달이 휘영청 떠오른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아벨과 에덴, 데니스와 데벤테르 후작가, 그리고 교단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와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이 낯선 과거 같지 않은 과거로 떨어진 것까지.

    워낙 긴 이야기여서 영혼 상태인지라 목이 아프지 않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된 거예요.”

    “…….”

    새치가 언뜻 보이는 회색 머리칼의 릴리안은 턱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루스벨라는 긴장에 침을 꼴깍 삼켰다.

    ‘믿지 않으시면 어쩌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워낙 오랜만이라, 그녀의 이야기가 상당히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대로 고모님께서 날 이상한 유령 정도로 치부하고 쫓아내시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슬픔에 모든 것을 놓고 봐야만 하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시죠? 믿지 않으시는 게 당연…….”

    루스벨라가 절박함에 치맛자락을 꾹 눌러 잡고 말하려던 때였다.

    “믿는다.”

    “……네?”

    “믿는다고 했다. 네 이야기. 거짓이 아닐 거라 믿어.”

    “어…….”

    순간 루스벨라는 할 말을 잃었다. 릴리안의 입에서 너무나 쉽게 나온 믿는다는 말이, 믿기 힘들어서. 그렇게 누군가에게 쉽게 믿는다는 소리를 들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있는 루스벨라를 향해 릴리안은 차를 호록 들이켜며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어디 허투루 거짓말을 하던 아이니? 게다가 그렇게 파들파들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떨면서 하는 이야기가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나를 속여서 얻을 것도 없고.”

    릴리안의 표현에 루스벨라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비 맞은 강아지라니, 얼마나 처량하고 절박해 보였으면.

    “이런 늙은 여자 하나를 속여서 득 될 거야, 재산을 가로채는 일뿐인데……. 네 현재 상태를 보면 그것도 아니고.”

    “음, 그렇죠.”

    영혼 상태에서 다른 것에 접촉하지도 못하는데, 재산을 탐낼 이유가 없었다. 어색하게나마 웃는 루스벨라에게 릴리안은 한 가지를 물었다.

    “네가 신성력을 가졌다고 했지?”

    “네.”

    “그렇다면 보여 줄 수 있겠니?”

    “물론이에요.”

    이곳에 던져진 이후로 신성력은 단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지만, 신성력은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어? 그런데 색깔이…….’

    “황금빛이로군.”

    본래는 푸른색이었던 신성력의 빛깔이 바뀌어 있었다. 가짜 성력 증진제를 만들 때 살짝 비치던 그 황금빛이었다.

    “각성해서 그런 것 같아요.”

    “각성해서 그런 것이겠지.”

    ‘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정답을 말한 릴리안의 말에 루스벨라가 입을 벌렸다.

    “뭐 하니, 그렇게 있으면 멍청해 보인단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아셨어요?”

    “나이가 들면 아는 게 많아지는 법이거든.”

    루스벨라가 겪어 온 이야기를 하면서도 각성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릴리안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하는 불안감이 차올랐다. 눈앞의 릴리안이 과연 정말 그녀의 아군일 것인가에 대해서.

    ‘데니스의 곁에만 머무르느라 신성력을 가진 이와의 만남은 없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스벨라는 에덴의 신도와 마주치는 것을 최대한 지양했다. 에덴에 소속된 사람들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으므로.

    “얼버무리지 마시고요. 대답해주세요. 고모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왜. 내가 네 적일까 봐 그러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래요. 고모님이 제 적이라면, 저는 전력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어요.”

    바로 전투 준비에 들어가는 루스벨라를 보며 릴리안은 미심쩍은 미소를 지었다. 적이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루스벨라는 잔뜩 긴장했다.

    “내가 네 적이었다면 널 발견했을 때 바로 죽였겠지. 안심하렴. 난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단다.”

    “정말이신가요?”

    “네가 나를 죽여 얻을 게 없는 것처럼, 나도 너를 죽여 이득 될 게 없지. 오히려 난 네가 내 앞에 와 있다는 게 신의 안배로 보이는구나.”

    냉정하고 무뚝뚝한 릴리안의 입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루스벨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어렸을 때 이후로 뵌 적이 없어 마지막의 그 무서운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아는 릴리안은 절대 신을 믿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너무나도 쉽게 신의 존재를 긍정하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신의 존재를 확신하세요?”

    “그거야 당연히 나 또한 너처럼 신성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예?!”

    충격적인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루스벨라와 달리, 릴리안은 초연했다. 내일 저녁으로는 닭고기 스튜가 좋겠구나, 라고 여상히 말하는 것 같았다.

    “각성했다고 그랬지.”

    “……네.”

    “나는 너만큼의 위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나 또한 각성했다. 내 남편이 죽은 그날에.”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 현실성이 없었다. 거기다 의문만 더 증폭되었다.

    “그런데 왜 집안과 연을 끊고 사시는 건가요? 위험할 텐데.”

    “그거야 네 아비이자 내 동생인 놈이 꼴 보기 싫어서도 있지만……. 너처럼 살아남기 위해서지. 죽지 않으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다치거나 죽는 것을 보는 건 차라리 자기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고통을 느끼게 해 줬다. 릴리안의 잠적을 루스벨라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가지 않는 게 있어.’

    루스벨라의 기억 속에서 릴리안은 실종 후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실제로 지펠론 백작을 제외한 릴리안의 여동생들이 그녀를 찾으려 사람을 풀어 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결국 몇 년째 릴리안을 찾을 수 없자 수색을 중단하고 그녀가 죽었다고 판단하여 사망 처리를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님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어.’

    루스벨라가 어릴 때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성인이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니, 이곳이 진정 루스벨라가 아는 세상의 과거라면 릴리안 또한 살아 있어서는 안 됐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 묻겠습니다.”

    “해 보렴.”

    “어떻게…… 살아 계시는 건가요? 제가 아는 현실에서 고모님은 돌아가신 것으로 아는데. 여긴…… 여긴 너무 이상해요. 제가 아는 세상과 달라요.”

    데니스가 계속 불행한 것도, 페이가 없는 것도, 고모님께서 살아 계신 것도.

    “제가 미친 걸까요? 이미 전 죽어서 지옥에 와 있는 걸까요?”

    “그건 아니야.”

    불안해하는 루스벨라를 릴리안이 끌어안았다.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내가 받은 사명과 관련이 있는 것 같구나.”

    “사명, 이요?”

    화르륵. 반짝이는 불꽃이 타올랐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신성력이었다. 루스벨라의 것과 비슷한 빛깔을 띠는 힘이었다.

    “밀색의 신성력…….”

    “이게 내가 사명을 받았다는 증거란다.”

    하지만 달랐다. 신성력의 색은 연하고 탁했다. 릴리안이 제 입으로 말한 것처럼 위력도 훨씬 약했다.

    “나는 이 세상에 도래할, 신이 선택할 구원자를 위한 희생양이란다.”

    릴리안이 가진 힘의 최대치를 발휘했다. 루스벨라는 그녀의 심장에 박힌 성력석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너희 어머니의 장례식 때 말했지. 너와 나는 같은 길을 걸을 거라고.”

    “무슨……. 아.”

    기억났다.

    어렴풋이 들었던 말. 그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저 자신과 닮은 녹색 눈동자가 몹시도 슬픔에 잠겨 있다는 것만 알았다.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역할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나는 너를 위해 세상에 준비된 눈가리개구나.

    “너를 노리는 흉악한 자들로부터 너를 지키기 위해 내가 있구나.”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보가 나열되어 실에 꿰인 것처럼 연결된다. 이곳과는 다른 릴리안의 죽음, 에덴과 아벨, 성인이 된 이후에야 표적이 된 그녀 자신까지.

    ‘내가…… 고모님의 죽음 덕택에 살아 있을 수 있던 것인가.’

    “그건, 그건 동의할 수 없어요. 저는 더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수 없어요.”

    이미 데니스를 눈앞에서 잃었다. 그런데 릴리안마저 그녀를 위해 죽는 모습을 본다면 정말 미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릴리안은 죄책감에 바들바들 떠는 루스벨라의 고개를 붙들어 똑같은 녹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얘야.”

    “……네.”

    “너도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란다. 네가 나를 잃으면 슬퍼하듯, 나 또한 조카인 너를 잃으면 슬프겠지.”

    왜 내게서 너를 위해 희생할 기회를 빼앗으려 하니?

    “저는 그 정도의 가치가 없어요!”

    루스벨라가 울면서 소리쳤다. 그녀의 눈물은 바닥의 카펫에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

    “제가 누군가의 목숨을 딛고 일어나야만 한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얼굴을 평생 기억하며 그들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요.”

    이기적이게도 나는 나를 위해 죽어 간 사람들의 삶이 아깝지 않을 만큼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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