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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25화 (125/166)

125화

***

‘데니스, 데니스는 어디 있지?’

루스벨라는 의식을 차리자마자 데니스를 찾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여전히 영혼 상태로 그 비좁고 구석진 데니스의 방에서 깨어났다.

“쿨럭…… 쿨럭…….”

“이런, 상태가 계속 나쁘군요. 나아지지가 않아요.”

“그러시겠지……. 쿨럭.”

이제 그 방에 어린아이는 없고, 십 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소년이 있었다. 마르고, 눈가가 퍼석하고, 생기가 없이 자란 메마른 소년 하나가.

“데니스……?”

그동안 많이 앓았는지, 진한 금발의 색이 빠져 흐릿한 레몬색이 되었다. 붉은 눈동자도 죽은 생선의 눈처럼 텅 비어 있었다.

의사가 건성으로 진찰해 주는 것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데니스는 낯설었다.

“어떻게, 약을 더 드릴까요?”

“또 진통제인가?”

“제가 진료비로 받는 돈으로는 도련님께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거든요. 어떻게…… 뭐 다른 것으로라도 내실 수 있다면야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요.”

탐욕스러운 눈의 의사가 원하는 것은 재물이었다. 아마 선대 후작부인이 남긴 유산이라도 있으면 내놓으라는 무언의 눈짓에, 데니스는 침묵했다.

“그런 것 포기했으니, 돌아가. 내게는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조차 없으니 치료를 한다고 해서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을 거니까.”

“쯧. 그러니 도련님이 계속 침상 위를 못 벗어나는 겁니다. 다른 귀족 영식들은 다들 승마며 무도회며 욕심껏 찾아다니는데, 이렇게 병석에만 머물러서야…….”

데니스는 의사의 쯧쯧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에게는 무언가를 바란다는 욕심 자체가 사치였으니까.

‘이런 몸으로 뭘 할 수 있겠어.’

카트린이 준 독을 마신 이후, 데니스는 죽지는 않았다. 대신, 죽는 게 나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

처음부터 정말 죽이고자 먹인 독은 아니었지만, 약한 데니스의 몸에는 극독처럼 작용했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후 침대 위를 벗어나기도 여의치 않은 삶, 약이 없으면 숨쉬기도 버거운 삶을 살게 되어 그는 모든 의욕을 잃었다.

“환자가 이리 비협조적이니 치료가 더딘 겁니다.”

“그렇더라도 상관없어.”

의사가 데니스를 은근슬쩍 탓하는 말을 했지만, 그것조차 무시했다. 데니스는 지쳐 있었다.

‘아버지의 정부들에게서 고용되어 온 의사 주제에 자꾸 신경만 긁는군.’

그러다 내가 무언가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즉시 내 몸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려고 할 거면서.

결혼 시장에서 매물로서의 가치도, 정적으로서의 위험도 떨어졌지만 이복동생들과 그들의 어머니인 정부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든지 데니스가 비상하려는 순간 그의 날개를 잘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그리고 바깥에도 내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아프니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다. 다른 귀족들과의 교류는커녕 목숨 부지하기도 바쁘다. 쌓아 놓은 것은 고작해야 무료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본 서적의 지식뿐.

데니스 데벤테르라는 인간은 이대로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비루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다.

“뭐…… 그럼 저는 또 진찰할 때가 되면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든가.”

의사는 늘 그랬던 것처럼 데니스를 안타까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떠나갔다. 실망감은 들지 않았다. 마모된 마음은 이제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미를 두지 못했다.

“차라리 몸이 가루로 부서져 사라진다면 좋을 텐데.”

앙상한 뼈대가 드러나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는 데니스 옆에 루스벨라는 앉아 조용히 속삭였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주려 애쓰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지금은 괴롭겠지만…… 당신은 이 모든 설움을 털고 일어나 아름답고 강한 사람으로 거듭날 거예요.”

그러니까,

“사라진다는 말만큼은…… 하지 말아요. 그럴 리가 없는데, 당신이 정말 내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무서워.”

달의 뒷면을 본 것 같았다. 강한 줄만 알았던 사람의 이면은 이토록 춥고 외로웠다. 너무나 차갑고, 혹독한 계절을 겪고 있는 그가 어서 빨리 따뜻한 봄을 맞기를 바랐다.

“다 지겨워.”

그러나 루스벨라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현재의 데니스의 나이가 지났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졌다.

그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

‘어째서 현재의 흐름대로 흘러가지 않는 거지?’

과거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데니스의 나이가 스무 살이 넘었다. 성년식도 없이 지나간 그의 생일날, 루스벨라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왜…… 데니스에게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지? 분명 그는 예언을 받아 셀레누스 님과의 계약을 해서 많은 것이 달라져야 하는데…….”

이상했다. 데벤테르 후작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데니스는 계속 아팠다. 허약한 그에게서 후작가를 단숨에 장악했던 무력과 카리스마는 티스푼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쿨럭…… 이젠 기침을 하면 피도 나오네.”

그는 점점 쇠약해지기만 했다. 다 꺼져 가는 촛불처럼 연약하기만 했다. 루스벨라가 지푸라기 같은 희망의 끈을 가지고 계속 기다려 봐도 그의 처지는 나빠지기만 하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어째서……?’

혼란스러움에 빠진 루스벨라에게 답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존재가 인식되지 않으니 홀로 답을 구해야만 했다.

“이게 셀레누스 님께서 날 과거로 보낸 이유일지도 몰라.”

그 믿음 하나만으로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곁을 벗어나 과거의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사람들 주위로 다가가 엿듣기만 하면 되니 그 점은 편리했다.

“윈체스터 공작님이 약혼녀와 파혼했다며?”

“요즘 그 이야기로 시끌시끌하지.”

‘……아.’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듣게 된 소식은 달갑지 않았다. 아슬란에게서 루스벨라가 파혼당한 시기였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자신의 이름에 껄끄러웠지만, 불편한 마음을 참고 이야기를 들으러 다녔다.

“공작님의 전 약혼녀였던 지펠론 영애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공작님을 찾는다던데.”

“버림받은 충격이 컸나 봐. 그러다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 아니야?”

“모르지. 조만간 그녀가 신문 1면을 장식할지도.”

“내기나 해 볼래?”

남의 불행을 두고 깔깔 웃는 사람들에게 질려 다시 데니스의 곁으로 돌아왔지만, 그 조롱 섞인 말들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으니까.’

첫사랑이었다. 루스벨라에게 있어 아슬란은 생애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었고, 그만큼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끝은 비참했다. 그녀는 아슬란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녀의 세상도 무너졌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 놓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페이가 나타나 주어서 슬픔을 털고 금방 일어날 수 있게 되는데……. 설마 이것도 현재와 다르게 나올까?”

우려했던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페이가…… 없어.”

몇 번이고 지펠론 백작가의 자신을 지켜보러 갔지만, 그녀의 친구였던 페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은 루스벨라를 방치했고, 성질이 날 때는 그녀를 마구 구박했다.

결국에는 지펠론 백작이 루스벨라를 예전과 똑같이 정략결혼을 이용해 팔아 버렸다.

“결혼하거라. 네 혼처는 윈체스터 공작가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부유하니 가서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지.”

“……말도 안 돼. 이 사람은 사교계에서 기피하는 인물이라고요. 게다가 전 부인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었다는 사람인데……. 전 싫어요. 절 그 사람에게 보내지 마세요, 아버지. 제발…….”

루스벨라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가 그녀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것도 데니스가 아닌 상대의 재취 자리로 가야 하는 상황으로.

‘대체 이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과거 속이라고 확신을 했는데, 그녀가 아는 현재와 다른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애원하는 루스벨라의 손을 뿌리치고 지펠론 백작이 차갑게 말했다.

“이미 네 몫의 지참금을 받았다. 이 결혼은 무를 수 없어. 너 같은 것을 받아 줄 가문이 얼마나 있다고 징징거리느냐. 감사히 여기고 내일 결혼식이나 잘 준비해라.”

“안 돼요……. 싫어요! 제발,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아버지!”

운다고 변하는 것은 없었다. 결혼식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루스벨라는 원하지 않던 결혼을 한 뒤 학대당하는 삶을 이어 가는 다른 과거 속 그녀의 인생을 지켜보다 도망쳤다.

“누가, 누가 나 좀 구해 줘!”

다른 과거 속 루스벨라가 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낯선 과거 속에서 미쳐 가는 루스벨라가 한 말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주 절박하게 무언가 달라지거나, 또는 그녀가 제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길 바랐다.

‘이대로라면 이 과거 속에서 나는 곧 아벨에게 살해당하고 말 거야.’

아니, 이미 이걸 과거라 볼 수 있나?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쇠약해진 몸에 어떤 희망도 없이 죽어 가는 데니스를 구하고 싶었다. 진짜 과거인지도 모르겠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그녀 자신을 구하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아벨이 그녀를 죽이고 성력석을 갈취하는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무작정 찾아다녔다.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어머나. 루스벨라, 네가 어째서 지금 여기 있는 거니?”

그러다 발견했다. 기어코 영혼 상태의 그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을 발견했다.

“제가…… 보이세요? 정말로?”

“무슨 소리니. 너야말로 결혼 후 남편의 영지에만 있다고 들었는데, 이 시간에 나를 만나러 오다니 정말 이상하구나. 거기다 난 네게 내가 어디 있다는 정보도 흘린 적이 없는데.”

“고모님께서…… 정말 제가 보이세요? 네?”

“너…… 결혼 이후에 많이 힘들었니? 하긴, 오라버니 그 인간이 널 제대로 된 인간과 결혼시킬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음?”

루스벨라는 힘껏 고모인 릴리안에게 가서 안겼다.

‘따뜻해.’

인간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루스벨라의 마음을 데웠다. 눈물이 났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가 알고 있는 현재와 비틀린 조각에 의아했다.

릴리안은 루스벨라가 알고 있는 현재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동생인 지펠론 백작이 작위를 물려받은 후, 친정과 연을 끊고서 실종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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