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
“데니스 도련님, 주인어른께서 찾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네. 오랜만에 함께 식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준비하시고 식당으로 내려가시지요.”
딱딱한 말투로 데니스를 데려오라 전달받은 시종은 문 앞에 서서 데니스를 기다렸다. 어린 데니스는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싶어 얼떨떨했다.
‘아버지께서 그동안 전혀 나를 먼저 찾지 않으셨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명을 내리셨을까. 곰곰이 고민하던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달력을 봤다.
“……아!”
‘내 생일이구나!’
챙겨 주지 않으니 표시할 필요도 없어 방치되던 달력 속 오늘은 분명 데니스가 태어난 날짜였다. 본인도 잊고 있던 사실을 다른 사람이 일깨워 줬다는 게, 너무 기뻐서 심장이 기분 좋은 울림을 냈다.
‘항상 밥도 따로 먹고, 난 겨우 끼니를 굶지나 않으면 다행인 일이었는데…….’
아버지가 날 먼저 찾으셨어.
그렇다면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소년의 마음이 설렘으로 인해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항상 시무룩하던 얼굴에는 약간이나마 홍조가 돌았다. 그 변화를 루스벨라는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쁜 예감이 드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데니스가 데벤테르 후작가를 장악하고 나서도 반성하지 않던 선대 후작이었다. 갑자기 변덕을 부려 방치하던 아들에게 잘해 줄 이유가 없었다.
“데니스, 안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가지 마요.”
들리지 않지만 루스벨라는 최선을 다해서 어린 데니스에게 가지 말라고 말했다. 어쩌면, 어쩌면 그에게 제 목소리가 닿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고.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속히 움직여 주십시오.”
“그, 금방 준비하고 내려갈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러나 루스벨라의 걱정 어린 목소리는 허공에서 흩어졌다. 시종의 재촉에 쫓긴 데니스는 겨우 단정한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나왔다. 그것조차도 이복동생들의 것에 비하면 너무나 소박하여 부끄러운 것이었다.
“가자.”
“네.”
무뚝뚝한 시종을 따라 데니스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후작저가 몹시 조용했다.
하지만 데니스의 부푼 마음은 그것조차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너무 오랜만에 가족에게서 챙김을 받는 것이라 들떠서였다.
‘아버지께서 내 생일을 기억하고 계셨구나. 집 안이 조용한 건…… 깜짝 생일 파티를 해 주시려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기대를 놓을 수 없었다. 루스벨라도 알았다. 저 어린 소년이 얼마나 가족의 정을 갈구했는지. 자신을 버린 아비가 다시 돌아봐 주기를 얼마나…… 간절하고 애타게 바랐는지.
‘……이대로 그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헛된 기대임을 알고 있어서,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길쭉한 식탁 주위로 후작가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가장 상석에 후작이, 양옆으로 그의 정부 둘과 아들 둘이 각자의 어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데니스의 말 뒤로 시종이 식당 밖에서 문을 닫으며 물러갔다.
“제 할 일은 다 했으니 물러가 보겠습니다. 주인어른.”
“그래. 수고했다.”
끼이익. 문이 닫혔다. 루스벨라는 그런 단순한 소리조차도 폭풍전야의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생일을…… 기억하고 계신 게 아니었구나.’
데니스는 겨우 표정 관리를 했지만, 마음속의 실망감이 울컥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생일 파티라 하기엔 식당엔 그 흔한 파티용 장식 리본 하나도 없었다. 식사는 평범했고, 선물 꾸러미도 없었다.
“저를 왜…… 부르셨나요?”
‘기대하지 말걸. 그럼 실망할 일도 없었을 텐데. 바보같이…….’
한 조각 품었던 희망이 무너지자 말을 하는 것도 힘겹게 느껴졌다. 결코 좋은 의도로 부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참으로 한심하게도.
“왜 불렀냐고 했니?”
후작의 정부 중 한 명이 사나운 어조로 데니스의 말에 반응했다. 밝은 금발에 주홍빛의 세련된 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데니스의 앞으로 다가와 다짜고짜 뺨을 때렸다.
“데니스!”
“네가 한 짓이지!”
짜악. 뺨을 때리는 매서운 타격음이 후작가의 조용한 식당을 울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던지, 데니스의 고개는 90도로 돌아가 있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카트린 부인.”
어두운 눈동자로 억지로 차분함을 가장하여 묻는 아이에게 후작의 정부, 카트린은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번에 정식으로 후작부인이 되려는 걸 방해받았어. 누군가 익명으로 법원에 투서를 보낸 탓에.”
“저는 그게 뭔지 모릅니다. 억측으로 이렇게 사람을 때리는 건 옳지 않은……”
“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네 어미를 살해한 것 같으니 저런 여자가 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투서였다는데!!”
분을 못 이겼는지 카트린은 부들부들 떨다 결국 한 번 더 데니스의 뺨을 쳤다. 아까 쳤던 곳과 똑같은 자리였다.
“그만해! 아이한테 무슨 짓이야!”
루스벨라만이 소리를 지르며 데니스의 앞을 막아섰지만, 소용없었다. 카트린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독 집 안이 오늘따라 조용했던 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저는 정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독한 것. 그렇게 맞아 놓고도 제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는구나. 뻔뻔하기도 하지! 너 때문에 나는 누명을 써서 후작부인 자리는 평생 오르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카트린은 평민이었다. 그녀는 후작의 총애가 아니었다면 호화스러운 드레스나 보석은 만지지도 못할 빈곤한 소작농의 딸이었다. 그런 그녀의 미모에 반해 후작이 정부로 삼았고, 그녀는 처음 올 때 약속받은 것처럼 후작부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꿨다.
한데 그것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제국 내에서 귀족과 평민의 결혼은 상당히 까다로웠기에, 어떤 흠도 잡혀서는 안 되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살해 누명을 쓴 것이다.
‘실제로 데니스의 어머니인 선대 후작부인은 살해당한 게 아니라 광증으로 인해 앓다 죽었지.’
두 정부들이 선대 후작부인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무성한 소문은 돌았으나, 그들은 후작부인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니 더 길길이 날뛰는 것이었다.
“정말 저는 결백해요. 저라는 증거도 없잖아요.”
울지도 못하고 퉁퉁 부은 뺨을 하고 무죄를 주장하는 데니스에게 카트린이 날카롭게 솟은 눈꼬리를 홱 돌렸다.
“증거가 없다니? 내 아들인 루이스가 네가 밤에 몰래 투서를 작성해서 보내는 걸 봤다는데!”
“……뭐라고요?”
“넌 지금 내 아들의 말이 틀리다는 거니? 하, 내 참. 거짓말쟁이가 감히 어디서!”
“거짓말쟁이는 내가 아니라 루이스예요!”
데니스는 억울함에 결국 눈물이 터져 루이스에게로 달려들었다. 히죽거리며 제 어미가 데니스를 몰아붙이는 것을 구경하던 못된 소년은 데니스가 그의 멱살을 잡자 당황했다.
“뭐야! 이, 이거 놔!”
“내가 그렇게 미웠어? 말도 안 되는 짓까지 꾸며서 나한테 뒤집어씌울 만큼?!”
“나는 모르는 일이야! 어머니! 이 녀석 좀 치워 주세요!”
“내 아들에게서 떨어져! 천박하고 더러운 것 같으니라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카트린이 루이스에게서 데니스를 떼어 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데니스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옷이…….”
기껏 신경 써서 입은 옷이 더러워졌다. 얼룩이 묻은 옷자락을 내려다보는 데니스의 마음이 검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저게 데니스가 가진 옷 중에 가장 좋은 것이었는데…….”
루스벨라의 마음도 미어졌다. 서글펐다. 그를 도와줄 수 없어서, 그리고 상처받는 모습을 위로해 줄 수 없어서.
그때까지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적우적 스테이크를 씹어 먹었다. 다른 정부와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태연히 맛있는 식사를 즐기며 사태를 방관했다.
꼬르륵.
위장마저 데니스를 돕지 않는 것인지, 밥을 달라는 소리를 냈다. 루이스가 그를 비웃었다.
“으하하. 완전 거지네, 거지. 비루한 게 마구간의 늙은 노새만도 못하다.”
“…….”
배고픈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니 괜찮았지만, 가족들의 앞에서 이러니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데니스는 다시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고 고개를 들려다, 후작의 다른 정부와 눈이 마주쳤다.
“저런. 가엾기도 하지.”
“……!”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주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설마…….’
데니스는 집안의 두 정부 사이에서 나름의 힘겨루기가 이루어지고 있단 사실을 알았다. 카트린이 후작부인이 되면, 다른 정부는 그저 정부로 여전히 멸시받을 것도.
‘그것, 때문에 나를 이용했구나.’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남도 가질 수 없다는 저열한 심보로 저지른 진짜 범인이 특정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걸 밝힐 방법은 전혀 없었다.
‘말해 봤자 아무 소용 없어.’
더 맞기나 하겠지. 아님 무시당하거나.
이게 현실이고, 이곳이 그의 자리라는 것에 절망한 데니스는 겨우 일어서더니 체념한 눈빛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한테 저는 뭐예요? 이럴 거면 차라리 죽이지.”
“어머, 죽고 싶었니? 그럼 말을 하지.”
카트린이 반색하며 아름답게 세공된 황금잔에 무언가를 따랐다. 포도주와 닮은 검보랏빛 액체였다.
“마시렴. 정말 네가 죽고 싶다면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환했다. 죄책감도 없었고, 희열에 차 있기까지 했다.
“안 돼. 마시면 안 돼!”
“……그래요.”
“안 돼!”
루스벨라는 현재의 데니스가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그가 자처해서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준비한 독을 마시려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데니스는 기어코 그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으로 네가 예뻐 보이기까지 하구나.”
“쿨럭, 컥…….”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지옥 속에서 아이는 피를 토하다 쓰러졌다.
“안 돼! 제발, 제발 죽지 말아요……!”
어린 데니스가 쓰러지는 광경은 루스벨라에게 패닉을 일으켰다. 그녀가 두고 온 현재의 데니스가 심장이 뚫려 죽는 것을 떠오르게 한 것이다.
‘그만해, 제발.’
그녀는 울면서 빌었다. 닿지 못할 신성력을 뿜어내며 기적을 바랐다.
‘이 사람을 제발 구해 줘.’
고통스러움에 신음하던 루스벨라의 의식이 결국 끊겼다.
일어난 순간부터는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