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23화 (123/166)
  • 123화

    ‘말도 안 되는 논리잖아.’

    루스벨라는 하녀장의 억지 주장에 실소했다. 그 말대로라면 당시 선대 후작이 총애하던 정부 둘과 그녀들의 아들들 역시 후작저 내에서 존중받을 권리가 없었다.

    “나, 나도 아버지의 아들이야. 내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는 이러지 않았잖아.”

    어린 데니스가 소심하게나마 반박하자 하녀장은 뜨끔하면서도 다시 버럭 그를 윽박질렀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잖아요? 도련님께 일일이 식사를 전달할 만큼 저희는 한가하지 않다고요.”

    “여기서 일하는 고용인들 많잖아.”

    “선대 후작부인께서 살아 계실 적에 광증으로 그만두고 나간 사람들이 많아서요. 저흰 바빠요.”

    “…….”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바위에 대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린 데니스는 결국 포기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을 하녀장은 승리의 증거로 여겼다.

    ‘저열한 기쁨인 줄도 모르고 뿌듯해하네.’

    루스벨라는 이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얼굴을 찌푸렸다. 불편했다. 의식 속 세계라 하기엔 너무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혹시…… 이곳은 과거인 걸까?’

    나는 데니스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있는 걸까?

    ‘그게 맞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이곳에 보낸 셀레누스 님의 의도는 무엇이지?’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데니스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일로 그녀를 보낸 거라면, 과거를 아예 뒤바꿀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심란해하는 루스벨라의 귓가에 나직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먹을 것은 줘. 아버지께서 내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저택에서 시체를 치우고 싶진 않을 거 아냐.”

    “그, 그거야 당연하죠.”

    “알았으면 내가 가져가려던 빵 줘. 햄이랑 치즈도. 앞으로는 바쁜 하인들 귀찮게 만들지 않고 알아서 가져다 먹을 테니까.”

    “……그러시든가요.”

    하녀장은 막힘 없이 자기 의견을 전달하는 데니스에게 기가 눌린 것인지 수긍했다. 데니스 말마따나 그가 굶어 죽기라도 한다면 일이 복잡해지니 못 이기는 척 승낙한 것이다.

    데니스는 하녀장이 보는 앞에서 우유도 한 잔 따라서 방으로 돌아갔다. 하인들이 들르지 않아 청소가 되지 않은 방은 먼지가 쌓여 더러웠다.

    “잘 먹겠습니다.”

    허겁지겁 조악한 샌드위치가 아이의 입 안으로 넘어갔다. 어찌나 급하게 먹던지 루스벨라는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한참을 콜록거리며 급하게 먹던 데니스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어머니께서 멀쩡히 살아 계셨더라면……. 적어도 이런 취급은 받지 않았을 텐데.”

    배는 채웠지만, 허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철저히 혼자 버려졌다는 것을 절감하니 외로움이 살갗을 파고들어 뼈까지 침투했다. 먹던 빵의 부스러기를 입가에 잔뜩 묻히고 웅크리고 있으려니 기침이 쉴 새 없이 터졌다.

    “콜록, 콜록. 아, 또 시작이야…….”

    데니스는 기침에 쿨럭이다 겨우 서랍장 안의 약병을 찾았다. 병 안에는 얼마 남지 않은 알약들이 들어 있었다. 하나를 목구멍에 털어 넣고 소년은 힘없이 낡은 시트 위에 누웠다.

    약을 삼켰어도 그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파……. 콜록. 언제까지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거지?”

    흐릿한 붉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루스벨라는 그것을 전부 지켜보며 자기의 일인 것처럼 괴로워했다.

    ‘닮았어.’

    예전에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에게서 학대받으며 자란 자신과 겹쳐 보였다.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까 더 참혹하잖아.’

    아픈 아이를 챙겨 주는 사람이 어떻게 단 한 명도 없을 수가. 어린 데니스는 홀로 병마와 싸우며 어둡고 비좁은 방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차라리 어머니와 함께 죽었다면 좋았을까.”

    “그건 절대 아니에요!”

    외마디 비명을 지르듯 루스벨라가 극구 부정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공허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내가 살아 있는 걸 바라지 않아. 하녀장의 말이 아예 틀리다고 할 수는 없잖아.”

    나 같은 건 세상에 없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낡은 이불을 뒤집어쓴 소년이 흐느끼며 한 말들은 너무 아팠다. 루스벨라도 어느 순간부터 함께 울고 있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은 자라서 누군가를 구원해 주게 되어요. 나는 당신이 내 곁에 없으면 이제 안 돼요…….”

    안아 줄 수 없는 어린 데니스의 왜소한 몸 위로 루스벨라는 닿는 흉내라도 내 봤다.

    그리고 끙끙거리던 소년이 잠들자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역시…….’

    데니스의 뒤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그녀는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었다. 못된 하녀장이, 집사가, 선대 후작과 그 정부들이 하는 일까지도 전부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후작저를 벗어나 그녀의 집인 지펠론 백작저에도 갈 수 있었다. 영혼 상태에서는 아예 날아갈 수 있어 전혀 지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어린 그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결론을 내렸다.

    ‘의식 세계 속이 아니야.’

    데니스의 의식 세계 속이었다면, 그녀는 그가 본 시점으로만 세계를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거나 흐릿하지도 않았다. 진짜 현실처럼 생생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보내진 이곳은 데니스의 어린 시절, 즉 과거야.’

    그녀는 과거를 보고 있었다. 데니스 데벤테르가 가장 약하고 불행하던 시기를.

    ***

    ‘셀레누스 님께서 날 여기에 보낸 까닭이 뭘까.’

    루스벨라는 한동안 멍하니 어린 과거의 데니스를 관찰하며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리 유령처럼 떠도는 신세라 해도 어린 데니스의 곁을 떠나기는 힘들어서, 그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걱정되었으니까.

    “야! 거기 버러지!”

    ……지금처럼.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루스벨라는 그게 설마 어린 데니스를 지칭하는 단어일 거라고는 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다.

    “내 말 안 들려? 버러지답게 귀도 먹었어?”

    “……또 너희들이야?”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치켜떠?”

    데니스가 귀찮다는 듯이 반응하자 그의 이복동생들은 발끈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다고 데니스가 겁먹지는 않아서, 그들은 더욱 씩씩거리며 이복형을 욕했다.

    “얼마 전에 주방에서 음식을 훔치다 걸렸다며?”

    “쥐새끼처럼 말이야. 빈민굴의 도둑놈들처럼.”

    “가문에 먹칠하지 말고 빈민굴로 들어가는 건 어때? 너, 병신에 가문 내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얼굴만은 반반하잖아?”

    “맞아. 형 말대로 차라리 그 얼굴 팔아서 장사라도 하는 건……. 으악!”

    주먹이 날아왔다. 무시하려 했으나 몸을 팔라는 이야기에 참지 못한 데니스가 이복동생 중 하나의 얼굴을 때린 것이다.

    “그딴 모욕적인 말 다시는 내게 하지 마. 역겨우니까.”

    “저게……! 후계자 후보인 우리를 때려? 죽고 싶어?!”

    “어, 어머니가 가만있지 않으실 거야! 아버지도!”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협박이란 협박은 다 하는군…….’

    애당초 어린 데니스의 행동은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정당방위였다. 거기다 루스벨라는 그와 받은 훈련을 통해 가격한 주먹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에이씨, 너 때문에 엄청 아프잖아!”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뭐야?”

    “지금 말 다 했어!”

    정작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것은 데니스인데, 그의 이복동생들이 되레 더 성을 냈다. 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얄팍하고 부스러지기 쉬운 것인지를 눈앞에서 보자 루스벨라는 더 화가 났다.

    ‘고작 저런 사람들 때문에 데니스가…….’

    그 좁고 어두침침한 방에서 홀로 끙끙 앓으며 괴로워해야 했단 말인가.

    ‘내가 개입할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건 할 수 없었다. 과거를 멋대로 바꾸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짓인지, 루스벨라는 이 시간대에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렇게 두 손 놓고 지켜봐야만 한다니……. 너무 내가 무력하게 느껴져.”

    루스벨라가 한숨을 쉬는 와중에도 데니스의 버릇없는 두 이복동생들은 그를 멸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긴, 넌 다치면 이를 엄마도 없으니 센 척이라도 해야겠지.”

    “맞아. 꼴에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지키지 못하면, 네게 남는 게 뭐가 있어? 병든 닭 같은 몸뚱어리?”

    왁왁 울어 대는 오리처럼 시끄럽게 주둥아리만 놀리던 놈들을 보고 데니스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한심하긴. 너흰 그거라도 못하면 열등감이 해소가 안 되나 봐?”

    “……뭐라고?”

    “내가 비록 병에 걸리고, 약해졌지만 그 전의 성취에 너흰 발끝도 못 쫓아오잖아. 아, 얼마 전엔 가정교사 하나가 도저히 너흴 못 가르치겠다며 때려치웠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던데.”

    그러자 데니스를 조롱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붉게 물들었다. 루스벨라는 그것을 보며 통쾌한 한편, 어린 데니스에게 그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조마조마해졌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이복동생 중 한 명이 잔뜩 독기가 오른 눈으로 데니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너…… 두고 봐. 우리 어머니께서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병신이 주제도 모르고 나불거리다 어떤 꼴이 되는지 이 기회에 톡톡히 깨닫게 해 주지.”

    “마, 맞아! 형님 말씀이 옳아. 우리 어머니도 네가 목숨 붙이고 살라는 걸 다행으로 알고 있으라고 했는데. 경고를 어긴 건 너야!”

    끝까지 그들은 데니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고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반성하는 태도도 없었고, 그들이 받은 모욕감을 되돌려 주겠다는 복수심만 차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나.”

    데니스도 이복동생들의 경고가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을 알아서, 걱정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에요. 당신이 뭐라고 반응했어도 저들은 아마 당신을 괴롭혔을 테니까.”

    “하지만 분했단 말이야.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억울했단 말이야.”

    “괴롭고 슬픈 마음마저 억누르면 병이 나니까……. 잘했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당신이 지금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고, 외로울 당신을 껴안아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화가 나요.”

    들리지 않아도 루스벨라는 어린 데니스가 듣는 것처럼 꾸준히 말을 걸었다.

    과거의 세상, 아무도 그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 익숙하고도 이질적인 시간선은 너무나 고독했기에.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과거 속에서 정신을 붙들기 위하여.

    ‘분명 나를 과거에 보내신 뜻이 있을 거야. 그걸 찾아서, 현재로 돌아가야만 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구해야만 해.

    그리고 며칠 뒤,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