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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22화 (122/166)

122화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안구를 태워 버릴 것 같은 섬광이 몇 분간 이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이트 아웃 현상에 아슬란은 루스벨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걱정했다.

“각성인가? 드디어?”

아벨은 심드렁하니 눈 부신 빛을 신성력을 이용한 막으로 차단시켰다. 주술을 섞은 탓에 다소 탁해진 검푸른 기운이 마치 천막처럼 아벨의 시력을 보호했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아벨 님께서 부리신 기적인가?”

제국군도, 에덴의 신도들도 광범위한 빛의 출현에 앞을 볼 수가 없어 싸움을 중단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으니 자칫했다가는 아군을 죽일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전투 중이던 모두가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때,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시신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가지 마요.

“날 두고 떠나지 말아요…….”

시신은 아직 따뜻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성력으로 치유하려 해도 움푹 꺼진 심장과 복부 등의 상처만 회복될 뿐이지, 꺼진 이의 숨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세상이 온통 흰빛으로 물든 가운데 그와 그녀만이 붉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고 그녀는 울었다. 그녀의 눈물이 경직되어 가는 그의 뺨을 타고 흘러 피눈물이 되었다.

그때였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음을 토하던 그녀의 머리칼 위로 따스한 손이 얹혔다.

[각성에 성공했구나. 축하한다.]

“……누구십니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루스벨라는 울음을 멈추고 위를 쳐다보았다.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길고 흰 머리칼을 가진 사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흰 머리칼만 보고서 그게 아벨인가 싶어 주춤했던 루스벨라는 곧 의심을 버렸다.

‘아니야.’

직감이 말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루스벨라와 데니스를 무도하게 죽이려던 괴물도 아니었다.

[경계할 것 없다. 나는 너희들의 편이니.]

발밑까지 끌리는 장발을 한 청년은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남성과 여성의 중간에 서 있는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이였는데, 눈은 찬란한 황금빛이었고 내딛는 걸음마다 그 존재감이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몹시 친숙한 힘의 원천이 느껴졌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의 근원이.

“혹시…… 데니스와 계약한 신이십니까?”

[그렇다.]

“봉인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랬지. 그래서 잊힌 신으로서 잠들어 있어야 했고.]

잊힌 신, 셀레누스가 자애로운 눈으로 루스벨라를 내려다보았다. 꿇어앉은 채 데니스의 시신을 붙잡고 울던 루스벨라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평생 들어 보지도 못한 신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데, 데니스를 살려 주세요. 신이시여, 제발 이 사람을 살려 주세요.”

짓무른 눈으로 루스벨라는 사랑하는 이를 살려 달라고 셀레누스에게 애걸했다. 황금과 상아를 실로 짜내어 만든 것 같은 성의(聖衣)의 끝자락이 그녀의 피로 물든 손에 더러워졌다.

[그게 너의 소원이니? 내가 기다려 온 나의 아이야?]

“네. 저는…… 이제 이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제발, 제발 이 사람을 살려 주세요.”

[알겠다.]

희소식에 루스벨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울음을 뚝 그친 그녀의 미소가 화사하게 퍼졌다.

“정말이신 건가요!”

[물론이지. 나를 기나긴 잠에서 깨운 너는 아주 특별한 아이지. 그러니 내가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루스벨라는 셀레누스의 앞에 무릎으로 기어가 엎드렸다. 그녀는 울면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에게 계속 감사를 전했다.

그녀를 일으키며 셀레누스가 말했다.

[일어나렴. 다만 네가 바라는 이를 살려 주기 전에,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단다.]

“어디에 가시나요? 그, 그사이에 데니스의 시신이 썩기라도 한다면…….”

데니스의 시신에서 남은 온기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루스벨라는 불안해했다. 그녀의 눈에 서린 절박함을 지그시 바라보며 셀레누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아니라 네가 다녀오게 될 거란다.]

“제가……요?”

[내가 그토록 바랐던 아이인 너를 사랑해서도 있지만, 내 계약자이자 지금까지 훌륭하게 계약 조건을 이행해 준 거슬러 온 자에게 작은 선물을 해 줄까 해서.]

‘작은 선물?’

“그게 데니스를 살리는 데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 할게요.”

[가 보면 알게 될 거란다. 내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셀레누스가 웃으며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루스벨라가 앉은 자리에 금색으로 빛나는 진이 생기면서 그녀를 따스하게 감쌌다.

“자, 잠시만요. 저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저 사람은 그럼 그동안 어떻게 되는 거죠?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세요!”

[걱정하지 마라. 네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너무 놀라지 말렴. 이 모든 것은 내 계약자가 이뤄 낸 기적이니까.]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셀레누스의 모습이 흐려졌다. 진이 발동한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셔야…… 으아아!”

[행운을 비마. 돌아왔을 때는 많이 달라져 있겠구나.]

온통 새하얗기만 하던 빛의 공간에서 어두운 틈으로 빠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끝없이 추락하는 나락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

루스벨라는 아득한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죽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뭔가 이질적인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스벨라는 제 몸의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몸이 지나치게 가벼워. 아까까지 아벨과 싸움으로 인해 축적된 피로도 사라졌어.’

게다가 갑옷 차림이 아니라, 가벼운 외출용 드레스 차림이었다.

육신을 벗어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맴돌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영혼 상태로 끝없는 어둠 속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혼의 상태임을 인식하자 추락이 멈추고, 어둠 속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출구가 어디지?”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녀 혼자만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밤하늘을 거니는 반딧불이가 된 기분이었다.

‘셀레누스 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일까.’

그녀가 가야 할 도착지는 어디인지, 그게 어째서 데니스에게 선물이 되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걷자. 끝이 없을 리가 없어. 이 어둠을 헤쳐 나가다 보면 반드시 빛이 나올 거야.”

그런 마음으로 루스벨라는 걸었다. 영혼 상태여서 그런지 지치지 않는 것은 소소한 행운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작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출구구나!’

저기로 가면 데니스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루스벨라는 달렸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휘저으며 나아가는 걸음은 어느새 빛 앞에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어둠에서 빠져나온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확실히 데니스가 맞았다.

그러나 루스벨라가 알고 있는 다정한 데니스는 아니었다.

“배고파.”

“……데니스?”

‘……지금보다 어리게 보이잖아.’

“배고파. 너무 배가 고파.”

그녀가 알고 있던 그보다 몸집이 작고, 왜소하며 굶주림에 시달리는 소년이었다.

“데니스? 당신…… 맞아요?”

루스벨라가 어린 데니스의 앞에 서서 그에게 말을 걸어 봤지만, 꼬르륵거리는 소년의 빈 위장 소리만 들렸다. 소년은 그녀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러다간 굶어 죽겠어.”

“내 말이…… 안 들려요? 잠깐만…….”

루스벨라가 손을 뻗어 어린 데니스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은 그의 몸을 투과했다.

‘아.’

닿지 않는구나.

‘영혼 상태로 와서 그런가.’

정황상 어린 데니스에게는 루스벨라의 목소리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 왜 보내진 거지?’

이건 과거일까, 아니면 데니스의 의식 속 세계인 걸까?

***

목소리도 접촉도 닿지 못하는 상황이니 당장은 어린 데니스를 지켜봐야만 했다.

‘셀레누스 님께서 무언가 생각이 있으셔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 거야.’

굶주림에 지친 데니스가 주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러고는 식료품을 훔쳤다.

굳이 그의 집인 데벤테르 후작저임에도 ‘훔쳤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소년의 행동이 도둑처럼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들키기 전에 얼른 가야 해…….”

어린 그는 고작 치즈와 빵, 얇은 햄 조각을 가져가는 일에도 심하게 눈치를 봤다. 두리번거리며 다시 그의 가장 구석지고 칙칙한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후작저에 초대받지 못한 외부인 같았다.

‘따지고 보면 여긴 그의 집인 데벤테르 후작저인데…….’

그녀가 알고 있는 데니스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데니스는 이곳이 남의 집인 것처럼, 자신이 불청객인 것처럼 굴었다. 그가 그럴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아주 오래 학습된 것처럼 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이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짐작하지 못하던 루스벨라에게 단서를 제공해 준 날카로운 목소리가 있었다.

“어머나, 도련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하녀장인가? 옷차림이나 입고 있는 하녀복에 단 브로치를 보니 맞는 것 같은데.’

소년이 품에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빵과 치즈와 햄이 바닥으로 툭 떨어질 뻔했다.

“나, 난 배가 고파서……. 아무도 내 식사를 챙겨 주지 않길래…….”

“그렇다고 쥐새끼처럼 밤에 식료품을 훔쳐 가요? 도련님의 어머니이신 선대 후작부인께서 그리 가르치셨나요?”

매섭고 따가운 말이 아이를 내리쳤다. 루스벨라는 그 하녀장에게 무어라 항의하고 싶었지만, 들리지 않으니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들먹이지 마. 그분은 나를 잘못 가르치신 적 없어.”

“흥! 그래요? 그럼 지금 행동, 설명하실 수 있으세요?”

“그건…… 여, 여긴 나도 사는 집이야. 그러니까 이것쯤이야 꺼내 먹을 수 있잖아.”

어린 데니스가 겨우 용기를 내어 하녀장에게 맞섰다. 루스벨라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응원했다.

‘정말 잘못한 건 하녀장과 이 저택 내의 모든 고용인들인데.’

아무리 홀대받는다고 해도 엄연히 그들이 모셔야 할 도련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데니스가 너무 배가 고파 참지 못하고 주방에 몰래 숨어든 것만 봐도 하인들이 얼마나 제 할 일을 다 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요? 도련님께서 이 저택에서 가지신 것이 정말로 있던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긴 내가 사는 집…….”

“후작님께서 도련님을 버리셨는데, 후작님이 가지신 것이 도련님의 것이 되지는 않잖아요?”

“…….”

“저희의 봉급을 주는 주인은 후작님이시죠. 도련님이 아니라요. 그러니 식사를 가져다주지 않는 것도, 도련님이 음식을 훔치면 안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요.”

말해 보세요. 저희가 도련님의 수발을 들 이유가 뭐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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