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이건 반칙인데?”
아벨이 웃는 얼굴로 날린 신성력 창들은 모조리 가로막혔다. 루스벨라가 신성력을 방어막의 형태로 둘렀던 덕분도 있지만, 데니스와 아슬란이 각자 신성력과 오러로 그녀를 보조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루스벨라?”
“괜찮습니까. 후작부인?”
데니스와 아슬란이 검으로 창을 쳐 내며 루스벨라를 뒤돌아봤다.
“저는 괜찮아요. 위력이 너무 커서 그 충격으로 잠시 다리에 힘이 풀렸을 뿐이에요.”
‘엄청난 힘이다. 이전에 겪어서 예상했던 것이지만…….’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두려움을 이겨 내려 루스벨라가 재빨리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신성력을 방패에서 검으로 형태를 변환했다. 데니스와 아슬란은 그녀를 보호하려 아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 괴물.”
데니스의 붉은 칼날과 아슬란의 흰색 오러를 담은 칼날이 아벨을 향해 쇄도했다. 그것을 손 하나 까딱도 하지 않고 새파란 신성력의 창으로 막아내며 아벨이 툴툴거렸다.
“셋이서 나한테 계속 한꺼번에 덤비려고? 너무하네. 정의의 편은 언제나 일대일 싸움만 고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게 너희들이 말하는 정의야?
그렇게 말하며 아벨은 칼날을 쳐 내는 속도를 높였다. 세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로 겨우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전혀 무리도 가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정의를 운운하고 있군.”
“아, 그래. 배신자의 혈통아. 너도 따지고 보면 ‘이쪽’이지? 피라는 게 흐려지는 게 아니니까, 선조의 과업을 너도 이어받았겠지?”
[개소리다. 아가. 심리전에 휘말리는 순간 목이 날아갈 거다.]
‘알고 있습니다……!’
나불거리는 아벨의 주둥이는 싸우는 중에도 계속해서 세 사람의 정신을 무너뜨리려 했다. 아슬란에게는 마리아의 혼이 있었고, 데니스는 굳이 신의 파편이 종알거리지 않아도 알아서 아벨의 말을 차단했다.
[온다. 계약자야! 옆구리를 노리고 있다!]
“고맙…… 아.”
데니스가 옆구리로 다가오는 창을 치워 내려고 했을 때, 작은 방패가 그 창을 쳐 냈다. 루스벨라의 신성력 방패였다.
“제가 엄호할게요. 방어는 제가 책임질 테니, 두 사람은 공격을 전담해 줘요.”
그녀는 훈련의 성과 덕분인지 여러 개의 신성력 방패를 만들어 그것을 자유롭게 운용하고 있었다. 말이 방패지, 바로 아벨처럼 공격용으로 전환할 수도 있기에 보조로는 나쁘지 않았다.
[호오. 내 아이가 많이 성장했구나.]
‘그런 사람이니까요. 저것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팔불출인 거 티 내는 거냐?]
‘……전투 중이니 방해될 말은 하지 마시죠.’
데니스는 성검과 신성력으로 만든 검 두 자루를 이용해 아벨을 몰아붙였다. 아슬란 역시 그의 옆에서 아벨에게 조금의 상처라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쏟아지는 신성력의 공격들은 루스벨라가 방패들로 막아냄으로써 승산이 있다고 보려는 때였다.
“이게 다야?”
시시해.
“뭐…….”
퍽 지루하다는 감상이 드러난 얼굴로 아벨은 공격 방식을 달리했다. 수많은 신성력의 점들이 떠올라 세 사람에게 쏟아졌다.
콰콰광!
그리고 폭탄처럼 터졌다. 루스벨라가 작은 방패들로 방어를 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으윽…….”
루스벨라가 구슬땀을 흘렸다. 그녀가 만들어 낸 방패들이 전부 터져서 흩어진 반동을 겪고 있으니 복통이 밀려왔다.
“두, 두 사람 다 무사해요?”
“괜찮습니다. 이것까지는 예상했던 공격 패턴이라.”
“아직까지는 상정했던 범위 내니까, 이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아요.”
걱정과 달리 데니스와 아슬란은 갑옷이 조금 금이 가고, 자잘한 상처를 입은 것 외에는 무사했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하지만 루스벨라는 덜컥 겁이 났다. 고작 공격의 형태가 변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신성력 방패가 부서졌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녀가 사력을 다해 키운 신성력은 무기력했다. 두려움을 이겨 내고 다시 일어나 신성력을 일으켰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흠, 그래야지. 벌써 나가떨어지면 밟는 재미가 안 나지.”
약을 올리듯 아벨이 빙그르르 제자리에서 돌았다. 그는 전투 상황에 걸맞지 않게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무도회에 입고 나올 법한 연회복처럼 보여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우릴 철저하게 가지고 놀고 있군.”
아슬란이 짓씹듯이 상처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데니스는 말없이 동의했다.
[저 녀석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놈이니.]
[살육을 여흥으로 아는군. 방심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틈을 찔러 볼 수 있기라도 할 텐데…….]
마리아와 신의 파편이 전투를 주시하며 약점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너무 노련해.]
[본인이 어떻게 하면 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벨은 신성력을 폭탄의 형태로 터트릴 줄만 아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채찍처럼 휘둘러 상처를 내고, 어떤 때는 신부가 결혼식 때 두르는 베일처럼 장막을 쳐 그 안에서 가시 형태의 공격이 튀어나오도록 트랩 형태로 공격을 쐈다.
데니스와 아슬란은 그런 아벨의 공격 패턴을 대부분 알고 있음에도 변화무쌍하게 나오는 그의 신성력을 막기 버거워했다. 개중에는 아예 처음 보는 것도 나와서 상처를 입어야 할 때도 있었다.
‘공격에만 치중하고 있는데도…….’
‘방어할 필요가 없을 만큼 우리를 죽일 듯이 몰아붙이고 있어.’
파랗고 붉고 흰빛이 보이지도 않게 빠르게 충돌했다. 아벨에게 죽을힘을 다해 세 사람은 덤볐지만, 상처는 자꾸만 늘어 가기만 했다.
“허억, 허억.”
“끝이야?”
넷이서 검을 부딪치기까지 얼마나 지났을까. 루스벨라와 데니스, 아슬란은 땀범벅이 되어 겨우 검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아벨은 여전히 무섭도록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간만에 내 심기를 거스르는 인간들이 나타나서 조금 기대했더니…… 역시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질 못하네. 대체품도 마찬가지고.”
“누가……! 대체품이야!”
루스벨라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신성력으로 만든 화살을 여러 대 날렸다. 하지만 아벨에게 닿기도 전 그 화살들은 그의 신성력 막에 가로막혀 부스스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강대한 힘을 심장에 품고 있으면서도 각성을 못 하니 거기까지밖에 못 하는 거야.”
‘어느 틈에……!’
사뿐사뿐 걷던 아벨은 순식간에 루스벨라의 앞에 와 있었다. 엎어져 있던 루스벨라의 턱을 쥐려는 아벨의 목을 데니스가 뒤에서 내리치려고 했으나, 신성력으로 만든 거대한 주먹에 의해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커헉! 쿨럭, 쿨럭……”
“데니스!!”
“이봐, 정신 차려라!”
데니스가 강타당한 충격에 의해 피를 토했다. 그것을 보며 아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내상을 입을 정도는 아닐 텐데? 그 정도는 조절했거든. 얼마 만에 추는 죽음의 춤인데. 그런데…… 너, 몸이 망가지고 있구나?”
신성력은 어찌 되었건 그 본질이 치유에 있었다. 아벨은 지금까지 그 능력을 죄 파괴에 써 와서 볼 겨를이 없었지만, 한번 마음먹자 루스벨라와 마찬가지로 엉망인 데니스의 상태가 보였다.
“오…… 가엾게도 내부 장기들이 다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상태잖아? 살아 있는 게 용하군. 심장은 거의 걸레짝 수준이야. 언제라도 멈추는 게 이상하지 않아.”
“……뭐라고?”
루스벨라가 피와 땀에 절어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데니스의 상태를 점검했을 때는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다.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방금 나랑 싸우면서 마지막 생명력을 거의 다 소진하고 있군. 그렇게도 내가 죽이고 싶나?”
“당연한 거…… 아니냐? 널 죽여야 그녀를 지킬 수가 있는데……. 내 목숨 따위야 버려서 얻는 승리면 값지지.”
“미친놈이네. 네가 죽어 봤자 결국 남는 저놈이 더 좋지 않겠어?”
아벨이 뒤쪽에 검을 짚고 겨우 일어나려는 아슬란을 가리켰다. 아슬란이 아직도 루스벨라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을 꼬집는 행동에 아슬란이 움찔했다.
그러나 데니스의 붉은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고요했다.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널 죽일 수 있다면 난 그것으로 내 몫을 다 한 거다. 여한이 없어.”
“그게 무슨…….”
루스벨라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는, 처음부터 그의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이 전장에 뛰어든 것이었다.
“으…… 징그러워. 난 사랑을 외치는 벌레들이 정말 싫더라.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우스워.”
“윽?!”
“그러니까 이 여자의 심장을 갈라 네 절망부터 구경해야겠다. 그쪽이 더 재밌겠어.”
아벨이 루스벨라를 붙잡아 고정시켰다. 신성력으로 붙들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루스벨라는 남은 신성력을 쥐어짜서 아벨의 힘을 잘라 내려 했지만 재생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잘 가. 몇 번째일지도 모를 대체품. 그래도 여기까지 내 신경을 건드린 건 네가 처음이니까, 영광으로 여겨도 좋아.”
‘안 돼……!’
신성력을 장갑처럼 둘러 그 자체로 흉기가 된 손이 루스벨라의 가슴을 향해 뻗어졌다. 아주 쉽게, 길가에 핀 꽃을 꺾듯이 그녀의 심장을 끄집어낼 것이다.
‘이런 끝을 보려고 발버둥 친 게 아닌데.’
살려 줘.
살고 싶어.
나는 살아야만 해.
살고 싶단 말이야……!
절박한 외침과 함께 루스벨라는 다가올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어?”
하지만 심장이 뜯어지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대신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너도 죽일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그림을 바란 건 아닌데?”
“하…… 하하…… 네놈 기분을 더럽게 만들 수 있다니 그것참 속이 시원하다.”
“웃어? 웃음이 나와? 어지간히 단단히 미친놈이로군. 몸이 꿰뚫렸어도 웃는다니.”
찝찝해하며 아벨이 한 번 더 공격을 날렸다. 푸욱, 하고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아…… 아아…… 아아아…….”
“안 다쳐서 다행이에요. 그렇죠?”
데니스의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벨의 손이 뚫고 나와 있었다.
“아아…… 아아아아……!”
“뭐야, 이걸로는 안 죽네?”
아벨은 불쾌해하며 기어코 데니스의 복부에 상처를 더 냈다. 매서운 신성력의 창이 그의 복부를 찢어 놨다.
데니스의 붉은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는 입가에 피를 계속 토하면서도 오로지 세상에 남은 인간이 루스벨라밖에 없다는 것처럼 그녀를 눈에 담았다.
“괜찮아요.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울지 말아요.”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어서 기뻐요.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루비 같던 붉은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아…… 아아……!”
“데니스……!”
떨어진 거리에 있던 아슬란이 데니스의 죽음에 경악했다.
“이제야 죽었네. 바퀴벌레처럼 징그럽게 바르작대더니.”
루스벨라는 아벨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통곡했다. 그녀의 입에서 짐승의 것과 같은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그의 시신이라도 부둥켜 안고 싶었지만 붙잡힌 탓에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눈물방울이 흙바닥 위를 적셨다.
“아아…… 아아아…….”
‘그를 살리고 싶어.’
악몽 같은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자, 이제 너도 네 남편을 따라가게 해 줄게. 같이 죽는 자비 정도야 베풀어 주지.”
아벨은 드디어 고대하던 가장 강력한 성력석을 얻는다는 기대에 환희하고 있었다.
“안 돼!”
아슬란이 비틀거리며 루스벨라에게 뻗어 오는 마수를 치우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이 거리라면 그녀를 구할 수 없어…….’
그녀가 또 죽는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던 순간, 빛이 터져 나와 세상을 밝혔다.
‘내가 그를 살려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