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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20화 (120/166)

120화

예의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가 없는 말에 아슬란이 인상을 구겼다. 듣는 귀가 역했다.

“협상은 결렬이다.”

“음? 뭐야. 그럼 황제라는 놈이 죽어도 괜찮다는 거야? 황실에 충성하는 놈들만 왔다면서…… 이거 좀 실망인데?”

아벨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황제의 목 근처로 더 깊이 신성력으로 만든 칼날을 기울였다.

“힉, 히익! 뭐, 뭣들 하는 건가! 윈체스터 공작! 당장 그 발언을 철회하게, 얼른!”

겁에 질린 황제의 목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황제는 졸도할 것처럼 굴었다. 아벨은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황제의 발버둥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데, 데벤테르 후작! 후, 후작부인이야 나중에 새로 들이면 되지 않겠는가. 응? 자네는 아직 젊고 부유하니 재혼이야 얼마든지 가능…….”

명백히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루스벨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제가 여성에 대해 평소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너무 확고하게 드러나서 구역질이 치솟았다.

‘그래서 황후 폐하나 황태자 전하도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 놓을 수 있었던 건가?’

치를 떨며 루스벨라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싫습니다.”

“……응?”

“싫다고 했습니다, 폐하. 그런 쓰레기가 되는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군요.”

데니스가 화사하게 웃으며 황제의 말을 받아쳤다. 데니스의 성격을 잘 아는 아슬란은 지금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빡 돌았군.’

존댓말을 사용하는 게 용했다. 속으로는 황제를 오체분시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텐데. 황제는 지금 아벨에게 잡힌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어느 쪽에 잡혀도 죽음은 확정인가…….’

황후인 이벨린도, 황태자인 베네딕트도 황제의 죽음이 필요하다면 허가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황실의 수치가 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황제가 그들을 버리고 적들의 요구를 수용해 감금시켰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슬란은 덤덤하게 말하던 이벨린의 모습을 기억했다.

“수치로 여겨 기밀로 덮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앞으로 후손들이 배우고 경계해야 할 언동이라 여겨 알리는 것일세.”

“황제 폐하께서…… 그러셨습니까.”

“그래. 그러니 저들이 황제 폐하의 목숨줄을 두고 장난질을 한다면, 절대 들어주지 말게.”

“하오나 그래도 명색이 황제 폐하이신데…….”

주저하는 귀족들 앞에서 이벨린은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제국의 어버이 자리를 차지한 이라면,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이 마땅하지. 하나 폐하께서는 그를 지키지 않고 놓으셨네.”

제국이 황제 폐하를 지킬 명분을 그분 스스로 놓은 거지.

“……황후 폐하.”

“설령 그 대상이 나나 황태자였어도 똑같이 하라고 명했을 걸세. 괘념치 말고, 그대들은 그대들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 주게나.”

황후가 단단히 마음을 붙잡고 명령한 것을 귀족들은 어길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 아녀자를 자기 대신 희생하라고 부추기는 추한 모습까지 보게 되자 그나마 남아 있던 동정심마저 휘발되어 사라졌다.

“아아…… 부황께서 마지막까지 날 쪽팔리게 만드는군.”

루스벨라와 데니스, 그리고 아슬란의 뒤에 서 있던 베네딕트가 한탄했다. 그는 귀까지 틀어막고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모처럼 옳으신 말씀을 하시는군요, 전하.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데니스가 여전히 빡 돌은 미소를 은은하게 뿌리며 그에게 동조했다. 제국군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자 당황한 황제는 더 악을 썼다.

“뭐, 뭣들 하는 건가! 당장 후작부인을 넘기지 않고! 나는 제국의 황제다! 주군을 살리려 애쓰지는 못할망정 험담이나 하다니……!”

하지만 황제가 발악할수록 그의 말을 들으려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전투 준비에 단단히 돌입하여 긴장감이 돌았다.

베네딕트는 아예 쐐기를 박았다. 루스벨라에게 발언권을 넘겨주면서.

“데벤테르 후작부인, 그대가 폐하의 부름에 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루스벨라는 회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은색의 갑옷 차림이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그녀는 단순히 아녀자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사로서 이 자리에 있었다.

“폐하께 고하나이다.”

덤덤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주는 울림이 있었다. 아벨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황제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분노로 붉어져서 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베네딕트 너 이놈……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저버리다니, 그러고도 네가 자식이더냐?! 황후, 황후는 어디 있지? 어떻게 감히 한낱 쓸모없는 계집에게 내 처우를 맡기다니……!”

시끄러운 황제의 뒤통수를 아벨이 거세게 내리쳤다.

“크윽!”

“좀 닥쳐 봐. 안 들리잖아.”

‘어디, 대체품이 뭐라고 떠드는지 구경이나 해 볼까.’

좋은 여흥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아벨이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저희는 폐하를 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적이자 살인자인 에덴과 손을 잡고 나라를 망칠 뻔한 암군이십니다.”

“저. 저! 네가 뭘 안다고 그리 자신 있게 지껄이느냐!”

“에덴이 살인자인 것은 부정하시지 않으시네요.”

루스벨라의 허탈한 말에 황제는 허를 찔려 주춤했다.

“그, 그건…….”

“윈블 자작 영애의 죽음 뒤에 폐하께서 관여하신 것을 압니다. 그녀는 저를 싫어했고, 괴롭혔으나…… 설마 그녀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줄은 몰랐죠.”

저 뒤에서 윈블 자작이 눈물을 흘리며 루스벨라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피곤함에 잠시 눈을 살짝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것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대체품을 오랫동안 노려 온 에덴이 사람을 죽여 그 심장을 갈취함으로써 신성력을 유지했음을 모르시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는 개인의 욕망을 위해 제국민의 목숨을 희생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지요.

“모, 모함이다! 경들은 무엇 하는가! 저 발칙한 계집의 입을 막지 않고……!”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추악함에 황제는 기겁하여 아벨에게 붙잡힌 상태로 귀족들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부황. 후일 역사서에 더 추한 모습으로 기록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베네딕트, 네가 정말 나를 버리는 게냐!”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요. 저를, 어마마마를, 그리고 제국을 먼저 버린 것은 부황이십니다.”

딱 잘라 선을 긋는 모습에 황제는 결국 할 말을 잃고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와 우울, 체념과 포기가 섞인 비참한 패배자를 보던 아벨은 난데없이 황제를 돌바닥에 내팽개쳤다.

“으윽!”

“쓸모가 없는 건 너네, 버러지야. 굳이 내 손을 더럽힐 이유도 없겠어. 어차피 이대로 놔두면 알아서 저 개미 떼에게 죽겠군.”

몹시 하찮고 더러운 것을 보는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황제의 표정이 잠깐 밝아졌다.

“그, 그럼! 사, 살려 주시는 겁니까!”

“어쩔까?”

퍽.

“어……?”

“그러고도 살 수 있다면 네 명줄이 긴 것을 인정해 주마.”

순식간이었다. 아벨이 묶여 있는 황제를 걷어차 성벽 아래로 추락시킨 것은. 워낙 얼떨결에 당한 일이라 황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성 아래로 떨어졌다.

“이런……. 머리부터 떨어지셨어. 지금 당장 의사에게 데려간대도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겠군.”

베네딕트가 망원경으로 쳐다본 황제의 상태는 처참했다. 불행히도 그는 머리를 바닥에 세게 박아 몸을 경련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전장이 익숙한 아슬란 또한 황제의 숨이 끊어져 가는 것을 알아챘다. 그의 걱정스러운 말에 베네딕트는 애써 태연한 낯을 가장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건 아니지 않나. 차라리 잘되었다고 치세. 어차피 부황께서는 아군에게 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테니…….”

황제의 바르작거림이 멈췄다. 그가 붕어했다. 욕심을 지나치게 부리던 삶의 말로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베네딕트는 황제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제국군에게 명령했다.

“적들이 폐하를 기어코 살해했다. 이는 우리 제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의 증거인 바, 지금부터 전투를 시작한다!”

“와아아!”

“제국에 영광을! 반역도에게는 죽음을!”

“돌격하라!”

그리하여 훗날 제국의 역사서에 꼭 등장하게 되는 교단의 반란 진압이 시작되었다.

***

“벌레들이 용을 쓰는군. 밟혀 죽겠다고 스스로 덤벼드니 상대해 주어야겠지.”

아벨은 베네딕트가 전투를 선포하자마자 훌쩍 뛰어 성 밖으로 내려왔다. 그걸 보고 뒤늦게나마 에덴의 신도들도 황성 밖으로 나왔다.

“우리의 신에게 영광 있으라!”

“겁내지 말고 적을 섬멸하라!”

에덴의 신도들은 제국군에 비해 그 수가 적었으나 신성력 부스러기를 주머니에 꼭꼭 챙겨 들고 전투에 돌입했다. 죽음을 부르는 사신과도 같은 신이 그들의 편이었다. 겁보다는 상대를 다 죽여 버리겠다는 악한 희열감이 폐부를 채웠다.

“자, 놀아 보자고.”

심장을 갈라 성력석을 뽑아내기 전의 의식으로 치지.

아벨이 검붉은 눈을 요사스럽게 빛내며 제국군에게 덤벼들었다. 무시무시한 성력이 사람들을 덮쳤다.

“으아악!”

“사, 사람 살려!”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비규환이었다. 사람을 지키고 치유해야 할 성력이 피를 보고 있었다. 제국군은 그에 맞서 그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병장기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크윽!”

“가, 감히 진짜 세례도 받지 못한 잡것들 주제에……!”

에덴 측이 강하다고는 하나, 제국군도 만만치 않았다. 양측이 죽이고 죽는 난전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원했던 대로 네 사람이 한자리에 마주했다.

“오랜만이야. 대체품. 드디어 다시 만나네.”

그동안 날 방해한 건 재밌었어?

섬뜩하게 웃으며 신성력으로 만든 푸른 칼날을 몇 개씩이나 만드는 아벨은 소름 끼쳤다. 루스벨라와 데니스, 아슬란은 침착하게 검을 꺼내 들고 그와 싸울 준비를 했다.

“너를 오늘 이 자리에서 처단할 거야.”

“흠, 무슨 수로? 아직 각성도 못 한 덜 익은 과실 주제에.”

“입 다물어. 난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그래? 그럼 어디 해 봐. 누구 말이 옳은지.”

히죽이는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스벨라는 다급히 신성력으로 방패를 만들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콰아앙!

“춤을 추자. 피와 살점이 흩날리는 죽음의 춤을.”

흥얼거리는 아벨의 목소리는 즐겁기만 했다.

이윽고 루스벨라를 향해 수십 개의 푸른 신성력의 창이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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