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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19화 (119/166)

119화

***

날이 밝았다. 루스벨라는 밤새워 뒤척이다 결국 뜬눈으로 아침 해를 맞이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새벽하늘을 바라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여느 때와 똑같이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신성력을 이용한 훈련과 대련을 진행했다. 사실상 마지막 훈련에 두 사람은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고 묵묵히 서로의 신성력을 맞부딪혔다.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붉고 푸른 칼날이 소리 없이 충돌했다.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실전이라 생각하며 대련을 한 탓에 두 사람 모두 땀에 흠뻑 젖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떨려요.”

긴장으로 인해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괴물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날을 맞이했다는 고양감이 루스벨라를 한껏 채웠다.

‘항상 이맘때쯤이면 지쳐서 잔디밭 위를 굴렀는데…….’

숨이 차서 헉헉거려도 지금은 더 싸우고 싶었다. 그녀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힘이 무한대로 솟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더 하고 싶은데.”

“안 돼요. 힘을 아껴야 이따 전투에서 온전히 기량을 발휘할 수 있죠.”

“역시 그런가요?”

루스벨라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신성력을 거뒀다. 검의 형태로 빛나던 신성력은 빛 가루로 흩어져 사라졌다.

부서져 흩어지는 신성력의 잔해를 보며 루스벨라가 데니스에게 말했다.

“걱정이네요.”

“뭐가요?”

“결국 내게 맞는 신성력의 형태는 만들어 내지 못했잖아요. 데니스와 같은 검의 형태로만 대련을 해 왔고…….”

“실력이 부족하지는 않잖아요.”

“제가 원하던 목표치까지는 달성하지 못한 게 아쉬워서요. 적어도 데니스만큼은 해내고 싶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의 성취를 낸 것도 대단한 거예요.”

“그래도요.”

루스벨라의 몸이 잔디밭 위로 벌러덩 늘어졌다. 동이 터 오자 저택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웅성거림이었지만, 루스벨라도 데니스도 그것을 기꺼워했다.

“저는 이만큼이나 성장해 준 당신이 자랑스러운걸요, 루스벨라.”

데니스가 그새 루스벨라의 머리카락에 붙은 풀잎을 떼어 정돈해 주었다. 그 사소한 동작에도 루스벨라는 심장이 가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대련 직후여서, 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재판 때의 입맞춤도 같이 생각나서는…….’

그녀는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어 두었다. 아벨을 처단하는 일이 끝난다면, 그를 놓아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후 데니스가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지는 궁금하여, 물어보기로 했다.

“데니스.”

“네.”

“에덴과 아벨을 처치하고 나면, 당신은 뭘 하고 싶어요?”

사명을 완수한 잊힌 신의 대리자인 데니스는 과연 무엇을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가 오직 이 일을 해내기 위해 달려온 것 같아서, 그래서.

“글쎄요.”

데니스가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것을 웃음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루스벨라는 그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난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적어도 당신을 자유롭게 해 주는 일은 가장 먼저 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군요.”

차차 그려 가면 될 일이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데니스의 붉은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인형의 유리알 눈동자처럼 보여서 루스벨라는 그의 뺨 위에 손을 올렸다.

“루스벨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용기가 났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 일이 끝난다면…… 그럼…… 나와 진짜 연인이 되지 않을래요?”

루스벨라에게 두 뺨이 붙잡힌 데니스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놀라서 확장된 그의 동공을 바라보며 루스벨라는 꾹꾹 차오르는 감정을 눌러 말했다.

“지금처럼 내 생존을 위해 결혼한 부부가 아니라…… 진짜 연인부터 한 걸음씩 밟아 가도 될까요?”

“…….”

할 말을 잃은 데니스 앞에서 루스벨라는 자기 자신을 신성력으로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쳤어. 루스벨라 지펠론.’

분명 이 일만 끝나면 데니스를 놓아주겠다고 이혼 서류까지 미리 준비해서 서명까지 받아 놓았는데. 그랬는데 인제 와서 뻔뻔하게 연인이 되어 달라는 청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민망했다.

‘……거절당해도 할 말은 없겠지.’

아벨을 처단하고 나면, 그녀를 옭아매는 족쇄는 더는 없겠지만……. 그래도 데니스와 동등한 선에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는 가진 것이 아주 많았고, 그녀는 없었다. 지금의 루스벨라에게서 데니스라는 거대한 보호막을 뗀다면 그녀에게 남는 장점이라고는 오직 하나,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조차도 데니스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힘이고.’

“저는…….”

그래서 데니스가 붉은 입술을 열어 대답하려 할 때, 그녀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저는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못 됩니다.”

무슨 의미일까.

“내가…… 싫은 건가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는 감히 당신의 연인이라는 감투를 쓸 수 있을 만큼의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말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그의 빛나는 금색 머리통을 봤다. 그는 쩔쩔매고 있었다. 마치 평민이 사실 귀족의 핏줄이어서 신분 역전이 되었으니 당장 저택으로 가야 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것처럼,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거 혹시…… 당신이 모자라서 나와는 어울릴 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데니스가 루스벨라와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제국 내 최고의 신랑감으로 손꼽혀 밀려오는 청혼서의 파도에 휩쓸렸을 것이다. 아름다운 외모, 부유한 가문, 젊은 나이에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다는 크나큰 장점.

이 모든 조건을 가지고서도 그가 자신감 없이 그녀 앞에서 축 어깨를 늘어뜨리다니…….

그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볼을 가볍게 늘렸다. 양손에 들어오는 그의 부드러운 뺨이 발갛게 변했다.

“왜 그런 못된 생각을 해요, 왜.”

“루스벨라?”

뺨을 늘여서 그의 발음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곧 일어날 전투의 심각성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나 강해 보이기만 하던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있구나.’

“전혀 부족한 사람 아니니까, 제대로 대답해 줘요. 데니스, 끝나고 나랑 연애할 생각, 전혀 없어요?”

그녀의 직설적인 말에 데니스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워했다. 우물쭈물거리는 그의 표정에서 본디 또래 귀족 청년들이 가질 법한 풋풋함이 느껴졌다.

“저는…….”

겨우 데니스의 답변을 들으려던 순간이었다.

“급보입니다!”

정찰을 나갔던 부대가 굵은 비지땀을 흘리며 복귀했다. 그들의 얼굴이 새벽하늘처럼 퍼렇게 질려 있었다.

“저, 적들이…… 황제 폐하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제시했습니다.”

데니스는 순식간에 어리숙하던 표정을 버리고 날카로운 기세로 그에게 물었다.

“그게 뭐지?”

“저어…… 그것이…….”

정찰 부대의 선봉장이 루스벨라를 흘끗 쳐다보며 눈치를 봤다. 그것에서 이미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편하게 말해 봐라. 뭐라고 지껄였는지는 들어야 하지 않겠나.”

“나도 괜찮으니 말해 보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냥의 신호탄이 쏘아지기 전의 감각이 밀려들었다.

“황제 폐하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데벤테르 후작부인을 그들에게 넘기라 하였습니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어느 한쪽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피의 사냥이.

***

“어어, 저기 온다.”

멋대로 황성을 점거한 에덴 측의 말단 사제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군사들을 목격했다. 황실에 충성하는 제국 귀족들의 군대였다.

“저기 앞에, 저거 데벤테르 후작 부부랑 윈체스터 공작이지?”

“맞는 것 같은데? 하나는 금발, 다른 하나는 회색 머리, 공작이야 검은 머리칼이니 확실하네.”

“투구도 쓰지 않고 오다니 배짱이 두둑하네. 거기다 힘없는 아녀자인 후작부인까지 싸우러 온 건가? 갑옷 차림이잖아.”

흥미로운 상황에 바로 그들은 그들의 주인이자 반역도인 아벨에게 보고하러 갔다. 아벨은 황금과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옥좌에 비뚜름하게 앉아 그들의 보고를 들었다.

“그것들이 왔다고?”

“예. 요구 조건을 들으려는 것인지는 모르오나 후작부인도 동행한 것을 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정말 내 말을 듣는 착한 어린양일지는 가서 확인해 봐야 알겠지.”

아벨은 양지로 걸어 나온 이후부터 줄곧 성인의 모습이었다. 허리 너머까지 길게 드리워진 백발이 그의 걸음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렸다.

“가자, 버러지야. 밖의 군사들이 너를 구하러 온 구원군일지, 아니면 버리러 온 반역도일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지.”

“으으, 사,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황제는 정말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아벨의 발치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처음에 가졌던 영생에 대한 욕망도 잊고 살려 달라 외치는 것이 아벨은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걸 확인하러 가야지. 응?”

황제의 목에 매어 놓은 목줄을 개처럼 끌고 아벨은 성벽으로 걸어갔다. 캑캑거리며 네발로 기어가는 황제는 이제 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안녕? 내 요구 조건은 잘 들었나?”

아벨은 그렇게 끌고 온 황제의 멱살을 잡고 귀족들의 군사들에게 보여 주며 웃었다.

목줄에 매여 캑캑거리는 제국의 황제는 정말이지 불쌍해 보였다. 몇몇 귀족들이 각오하고 왔음에도 침음했다.

“한 가지만 묻지.”

가장 선두에 선 세 사람 중 하나인 아슬란이 아벨에게 물었다.

“데벤테르 후작부인을 데려가서, 죽일 생각인가? 그녀가 가진 성력석을 갈취하려는 게, 네놈의 목적이냐?”

“음? 취조하는 거야? 지금 내가 갑이고, 너희들이 을인 거 모르겠어?”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봐?

“크으윽!”

아벨은 즉시 쇠약해진 황제의 목에 신성력으로 만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댔다.

“이게 죽어도 괜찮겠어? 그냥, 닥치고 그 여자를 내놔.”

내가 저 여자를 데리고 뭘 할지는 관심 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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