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혹시 그대도 그 아벨이라는 자처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황후 폐하.”
데니스가 끼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황성 지도와 회의에 참여하는 귀족들의 명부가 들려 있었다.
“전략 회의를 할 시간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 귀족 소집이 빠르군.”
“다들 재판 이후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으니까요. 사안이 심각한 만큼, 빠르게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흘긋 내려다본 명부는 귀족들의 이름으로 빼곡했다. 참여하지 않는 자는 거의 없었다. 이름이 보이지 않는 자는 에덴의 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에덴과 손을 잡았어도 현 상황에서는 아군의 탈을 쓸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혼란스러운 시기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이 부분은 신성력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는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후작에게는 미안하지만,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 후작부인과 함께 조금 더 고생해 주게.”
“고생이라뇨. 이 일은 제 의무이기도 하니, 그런 부담은 품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부가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참으로 천생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내포하는 말의 뜻은 둘이 아주 다르게 들렸지만.
‘의무라…….’
이벨린은 데니스의 말을 곱씹었다. 역시, 데벤테르 후작이 이토록 에덴과 아벨에 맞서 싸우려 하는 이유는 황실에 충성하기 위해서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후작부인에게 능력에 대해 자세히 물으려는 순간, 말을 잘랐지.’
그것만으로도 황후는 데니스의 뜻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이 바보였다. 제 아내인 루스벨라에게 정치적인 의도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으로 돌려서 행동한 것이겠지.
그러니 황후의 말을 잘랐다는 무례에 대해서 항의할 생각이 좁쌀만큼도 들지 않았다.
“……제국이 아주 훌륭한 신하를 두고 있었군. 그대를 포함한 데벤테르 후작가에 대한 노고는 황실이 오래도록 잊지 않을 걸세.”
“치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걱정은 감사하오나, 염려는 놓으셔도 됩니다.”
“어째서지?”
“제 아내가 윈체스터 공작이 제공해 준 그의 피로 사특한 사제들의 주술이나 신성력에 대항할 포션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벌써 거기까지……?”
시간은 많지 않았는데. 윈체스터 공작과 데벤테르 후작이 정식으로 협력 관계를 맺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에덴과의 싸움에서 유효한 효과를 내는 포션을 벌써 개발했다고……?’
그것도 후작부인 혼자서?
“제국의 복이지요.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금방 대항책을 마련할 수 있었겠습니까.”
데니스가 왼쪽 가슴 위로 손을 올려 예를 표했다. 이벨린은 베네딕트를 만나면 반드시 경고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황후가, 황태자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데벤테르 후작가를 도발하는 일이 절대 없게 하라고.
특히 후작부인은 그의 역린으로 보이니 더더욱.
“회의장으로 들어가지. 가급적 황성을 덜 훼손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군.”
“정 걱정되신다면 데벤테르 후작가의 이름으로 기부금을 전달하겠습니다.”
“자네가?”
“아마도 저와 제 아내가 가장 많이 부수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후작은 그렇다 쳐도…….’
후작부인이? 성벽을 부순다고?
‘그 유순해 보이는 아가씨가?’
“그래……. 그렇다면 뜻대로 하게.”
이벨린 황후는 데니스와의 대화를 통해 한 가지 정보를 더 얻었다.
연약하고 청초해 보이는 후작부인은 생각보다 더 강해서, 절대로 아벨과 에덴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저렇게 티를 내는 걸 보니 후작부인이 에덴 측에 살해당한다면 벌어질 참극이 상상도 안 되는군.’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데니스는 이벨린의 말에 만족해하며 웃었다. 얼핏 봐서는 도저히 아내가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런 여유는 어디서 생기는 거지?’
일순간 부러움을 느낄 정도여서, 이벨린은 데니스가 감추는 것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더불어 루스벨라가 전장에서 보여줄 힘의 위력도.
***
에덴을 어떻게 토벌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는 그리 길어지지 않았다. 데니스와 아슬란, 그리고 그 둘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베네딕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성전이 길어져서는 안 됩니다. 적들이 황제 폐하를 인질로 잡고, 황성을 점거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성전을 벌인다면 먼저 지치는 건 이쪽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또한, 그렇게 전투가 늘어지는 동안 놈들이 뒤로 무슨 수를 더 쓸지 모릅니다. 거기에 적군의 수장이 되는 인물인 아벨이 부리는 신성력의 한계가 얼마인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싸움을 끝내야 합니다.”
두 사람은 앞다투어 에덴과의 싸움이 길어져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황성이 웬 극악무도한 인간들에게 오래도록 넘어가 있는 꼴을 보기 싫은 것은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동의는 했다.
“후작님과 공작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저희는 적의 전력을 두 분을 통해서만 들었기에 그들의 기량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전투의 기본은 정보였다. 적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이 정석이거늘,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나서는지 귀족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 또한 전면전을 택할 것이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데니스의 말에 누군가 반문하자 루스벨라가 나섰다. 그녀도 관계자이니 마땅히 회의에 참석할 권한이 있다고 황후와 황태자가 발언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접니다. 그러니 안 나올 수가 없겠지요.”
‘아벨은 반드시 나올 거야.’
건국제 연회 당시에도 직접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접 대체품 ‘수거’에 나섰던 아벨이었다. 게다가 요 근래 수하들을 통한 공작은 전부 데니스와 루스벨라에 의해 차단당했으니 독이 바짝 올라 있을 터.
“왜 하필 후작부인을……?”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이 들어오자 루스벨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재판이 열리기 전, 제 남편이 여러분에게 보여 준 바가 있을 겁니다.”
“예, 그러했죠.”
회의장의 귀족들은 푸른 보석 알갱이가 진짜 신성력의 근원인 성력석임을 알고 경악했었다. 고작 부스러기의 힘이 이렇다면, 과연 본체는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도 겁이 났다.
“성력석. 그것이 제게도 있습니다.”
“예? 가지고 있습니까?”
“네.”
“어디에 있습니까? 보석함에 가지고 계신 건가요?”
“아니요.”
루스벨라가 자기 심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가던 시선이 잘게 떨렸다.
“설마…….”
“그게 심장에…… 체내에 있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사람의 신체에 보석이 박혀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심장을 열어서 확인할 수도 없고…….”
귀족들은 말도 안 된다며 루스벨라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루스벨라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신성력도 오러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저는 제 남편과의 수련을 통해 신성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제 심장에 신성력의 핵인 성력석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력석의 존재를 완전히 확신하게 된 데는 데니스가 받은 미래에 대한 예언과 아벨이 습격했을 때 흘린 정보 등의 덕이 컸다.
“저 또한 전투에 참여할 것이니, 아벨이 저를 발견한다면 황성 밖으로 틀림없이 사제들을 이끌고 나올 것입니다.”
“사제들은 저희와 병사들이 상대하게 되겠군요.”
“그렇죠. 아벨의 목적은 오로지 단 하나, 그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제 심장의 성력석이니까요.”
“전면전…… 혹시 남편인 후작님과 같이 싸울 계획이신 겁니까?”
“네. 거기에 윈체스터 공작님도 합류할 겁니다. 아벨은 혼자서 물리칠 수 없는 상대니까요.”
“윈체스터 공작님까지요? 그분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족들은 당황스러웠다. 아녀자인 그녀가 전투에 참여하는 것도 그랬지만, 북방의 든든한 방패로서 경험치가 높은 아슬란까지 데리고 아벨과 싸운다니 다소 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윈체스터 공작님께서는 유일하게 신성력에 저항할 수 있는 혈통을 타고났습니다. 그분의 존재가 필시 아벨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될 테니 빠질 수는 없습니다.”
책상 위로 석양과 같은 빛깔의 포션들이 올려졌다. 묘하게 황금빛이 도는 그 포션들은 공방에서 루스벨라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완성한 신성력 무효화가 가능한 약물이었다.
“이게 공작님의 피로 만든 포션입니다. 모두들 전투 전에 미리 마셔두거나, 상비하고 있다가 위기가 닥치면 복용하세요.”
“사람의 피를 어찌……. 짐승도 아니고.”
“거기다 공작님은 그럼 정체가 뭡니까?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죠?”
연이은 혼란 속에 빠진 이들이 설명을 요구하자 데니스가 손뼉을 쳐 루스벨라에게 몰렸던 주목을 그에게로 돌렸다.
“자, 자.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당장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내일 벌어질 전투에 대한 대처입니다.”
“하나…….”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나와 내 아내, 윈체스터 공작은 황실을 배반하고 에덴에 붙을 일이 없으니 그건 안심하시길.”
붉은 눈이 곱게 휘어져 초승달의 궤적을 그렸다. 데니스의 뼈가 담긴 말에 몇몇 사람들이 그의 말에 꼬투리를 잡으려다 슬그머니 든 손을 내렸다.
‘이러면 굳이 루스벨라가 준 포션으로 적과 아군을 구분할 필요도 없겠군.’
첩자는 제때 솎아 내야 마땅했다. 데니스는 그 인간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는 회의가 파하자마자 붙잡아 지하 감옥에 처박아 줄 것을 다짐했다.
그가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명분과 명예와 같은 허상은 지금과 같은 위기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실리를 추구하세요.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나 확실히 말해 둘 것은, 적들은 우릴 살려 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
“이번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제국 전체의 미래는 없습니다. 당신들은 모릅니다. 아벨이 얼마나 지독하고 잔인한 자인지를…….”
제 목적을 위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벌레 취급하는 살인자가 힘까지 갖춘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인지를 겪어 보지 못한 자는 모른다.
‘그 무지가 사람을 미칠듯한 후회로 밀어 넣는 것인 줄도 모르고.’
데니스는 잠깐의 심호흡 끝에 들끓던 감정을 갈무리하고 귀족들에게 경고했다.
“우리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겁니다. 살고 싶다면 저희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라 주십시오.”
베네딕트도 의견을 더했다. 그는 귀족들의 대화가 오가는 내내 경청하고 있다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끼어들었다.
“후작과 후작부인, 그리고 공작에게 어마마마와 나는 전권을 맡겼다. 우리 모자가 저들에게 가진 신뢰만큼을 요구하지는 않겠지만, 부디 현명하게 따라 주었으면 하는군.”
저렇게까지 황태자가 말하는데 반대할 수가 있겠나. 없지.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 후 회의는 막히는 것 없이 순조롭게 이어져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내일이면.’
동이 트면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아벨과 조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