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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17화 (117/166)
  • 117화

    ***

    교단 내부는 뒤숭숭하기 그지없었다. 재판에서 진 벨로트를 비롯한 아벨의 심복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토설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샅샅이 뒤져라!”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신성한 신의 부름을 받는 신전을 어지럽히다니……!”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오. 무엇보다, 죄인들의 진술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니 불응한다면 모두 체포하라는 명이 있었소.”

    항의하는 사제들 앞에 황태자의 명을 받고 출동한 귀족이 죄인들이 자백한 문서를 내밀었다. 입으로 말할 수가 없으니 필담으로 적은 증거 자료였다.

    “명백한 증거도 있겠다, 이를 방해한다면 그쪽도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여 잡아가겠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건 여태까지 제국의 적을 숨겨 키우던 교단 측이겠지.”

    수도의 대신전에서 기도를 올리던 추기경은 들이닥치는 군사들에 의해 황망한 낯이 되었다. 영문을 모르던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게 설명하는 대신, 베네딕트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수사관들은 발 빠르게 수색의 의무를 다할 뿐이었다.

    “푸르게 빛나는 보석 부스러기가 있는 사제들이 있다면 모두 잡아들여라!”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계략으로 아벨의 심복들을 잡아들였다고는 하나, 중앙인 대신전에도 그의 끄나풀이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를 대비해 데니스와 아슬란이 베네딕트에게 압수 수색 요청을 했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하지만 때가 이미 늦었는지, 일부 사제들의 방은 텅텅 비어 있었다.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사제 몇몇이 사라졌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멋대로 신전을 나가고서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증언도 받았습니다.”

    “에덴의 소속원이라는 증거는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아…… 꼬리 자르기를 한 것 같고요.”

    베네딕트의 명을 받고 움직였건만, 쓸 만한 수확이 없었다. 이미 날래게 몸을 피한 이들을 놓쳤다는 비보를 들은 장군은 탄식을 내뱉었다.

    “하면, 황태자 전하의 말씀대로 황궁이 이미 적들의 손에 넘어갔단 말인가…….”

    믿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교단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놈들의 흔적을 보니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데벤테르 후작이 진짜 신성력을 보여 줬던 때부터……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던 건가.’

    그걸 몰랐던 제국의 귀족으로서 뼈아팠다. 데니스와 아슬란이 회의에서 귀족들에게 에덴과, 아벨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다면 평화에 취해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게 다행이지.’

    놀랍게도 데벤테르 후작가와 윈체스터 공작가가 협력하여 군사와 자금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황후와 황태자의 안전을 지켰을뿐더러 향후 벌어질 전투에 대해서도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신전을 이 잡듯이 뒤진 후 축 처진 어깨로 수색대의 지휘관인 장군이 복귀 명령을 내렸다.

    “이만 돌아간다. 건진 것이 있다면 들고 오도록.”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아무 소득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색 중 교단이 헌금을 착복하여 에덴에 은밀히 전달하였다는 장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맨 처음 수색대원들을 보고 식겁하던 추기경의 비밀 서재에서.

    ‘저건……!’

    미처 치우지 못한 비밀 장부가 드러나자 추기경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추기경.”

    “나, 난 모르는 일이오! 누가 나를 모함하기 위해 이런 짓을……!”

    “거짓말은 그만두고, 같이 갑시다. 황태자 전하께서 반역자들의 얼굴을 오붓한 장소에서 면담하시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소.”

    추기경의 발뺌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손짓하자 병사들이 추기경을 붙들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놔! 신을 모시는 사제를 이렇게 개돼지처럼 끌고 가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당신이 발을 딛고 사는 이곳은 땅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주인이신 황실에 대한 반역을 꾀하는 건 중죄입니다.”

    제국민으로서 당연한 사고방식이었다. 멀리 있는 신보다 황족의 명령이 더 가깝고 지엄한 법이었다. 하물며 교단의 권위가 약해진 현시대에서는 더욱 그랬다.

    ‘살아 있는 신께서 이제 곧 완전해지시거늘……!’

    추기경은 아벨의 사람이었다. 여러 해 크게도 해 먹은 만큼 치워야 할 증거도 많았으므로, 그는 적폐의 산물을 치워야 하는 의무를 지고 남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병사들이 신전을 헤집어 놓을 줄은 몰랐지……!’

    곧 아벨이 제국과의 전면전에 들어간다는 정보를 아는 이상 순순히 잡혀갈 수는 없었다. 추기경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차피 들킨 것, 숨길 것도 없다고 판단해 덮어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을 벗어 버린 것이다.

    “네놈들도 살고 싶다면 이미 집어 삼켜진 황실을 저버리고 우리의 신의 발치에 매달리는 게 나을 것이다! 벌레처럼 짓밟혀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커헉!”

    추기경이 세뇌를 발동하려던 찰나였다. 어디서 매운 주먹 하나가 날아와 추기경의 안면을 강타했다.

    “뚫린 입이라고 다 나불거려도 되는 건 아니다.”

    “윈체스터 공작 각하!”

    추기경의 어금니를 날려 버린 인간은 아슬란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추기경을 잡아끌고 아슬란이 수색대에게 말했다.

    “어서 복귀하지.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아, 예! 예!”

    ***

    황후와 황태자를 모시고 있는 데벤테르 후작저가 아벨을 상대하기 위한 요새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데니스도 루스벨라도, 후작저의 외부인인 아슬란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건 이벨린이었다. 그녀는 유력 귀족의 사저를 황궁 대신으로 쓰는 것이 영 찜찜했다.

    “불편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황후 폐하?”

    “난 없네만…… 후작저를 이런 식으로 써도 괜찮나?”

    “안 괜찮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국의 적을 물리쳐야 하는 일인데, 신하 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죠.”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황후, 이벨린은 오랜 시간 황궁의 실세로서 군림한 덕에 사람 간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일에 뛰어났다. 그녀는 확신했다.

    데벤테르 후작의 진짜 목적은 황실에 도움을 줬다는 거창한 빚을 지우는 게 아니라, 에덴과 아벨이라는 주적 자체를 치워 버리는 데 목적을 뒀다고.

    ‘거기에 동원되는 수단이 나와 베네딕트, 그리고 황실에 충성하는 귀족들이고.’

    “왜 그러십니까, 황후 폐하?”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루스벨라가 데니스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는 이벨린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황후는 손을 내저었다.

    설령 황실에 대한 충성심으로 데벤테르 후작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해도, 현 상황에서는 딱히 방도가 없었다. 데벤테르 후작가가 가지고 있는 광대한 부를 조건 없이 적을 토벌하기 위해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으니까.

    “후작부인은 내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없는가?”

    “달리 바라는 것은 없사옵니다. 황후 폐하.”

    “갑작스러운 객으로 눌러앉게 되어 내 민망하여 그렇네. 후작의 노고에 보답할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 말에 루스벨라는 조금 고민했다. 황후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하나의 기회이자 시험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기회지. 하지만…….’

    “저는 이대로도 충분합니다, 황후 폐하.”

    “……의외의 대답이로군?”

    “제 남편이 제가 원하던 모든 것들을 채워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는 바라는 것이 욕심으로 느껴질 정도로요.

    “그런가…… 부부 사이가 아주 좋군. 부럽네.”

    수줍게 웃으며 행복을 말하는 루스벨라의 얼굴을 보며 이벨린은 씁쓸해했다. 황성에 붙잡혀 있을, 그녀와 베네딕트를 버린 황제 생각이 나서였다.

    솔직한 심경 토로에 루스벨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냉정하게 실리를 따져 황태자와 황후가 올바른 선택을 내렸다고 봤으나, 가족이라는 사이를 완전히 쉽게 떨쳐 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루스벨라는 조용히 이벨린의 발치로 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옵소서, 황후 폐하. 저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가족을 생각하는 그 마음까지 이용하려는 악랄한 자들입니다.”

    “그래. 들었네. 사람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놈들이라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에덴과 손을 잡기로 한 순간부터 이미 그들과 같은 야차가 되기로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지금도 보십시오. 결과가 어떠합니까.”

    이벨린이 쥔 치맛자락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녀의 우아한 얼굴 위로도 같은 흔적이 고통스럽게 새겨졌다.

    믿고, 또 믿었던 가족에게 끝내 배신당하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괴롭고, 심장을 통째로 뜯어내는 것 같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가.

    “저는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선택과 행보를 지지합니다. 저도, 제 남편인 데니스도. 힘닿는 데까지 두 분을 도와 에덴을 물리칠 것입니다.”

    “……고맙네.”

    이벨린은 그녀도 모르게 루스벨라의 손을 붙잡았다. 사람의 손에서 느껴지는 미지근한 온기가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래. 수단으로 이용당하건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중요한 것은 에덴이 멋대로 점거한 황성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 일에 자존심을 조금 내팽개치는 게 뭐가 대수랴.

    “약한 모습을 보여서 부끄럽군. 방금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해 주게.”

    “염려 마시지요. 저는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루스벨라가 싱긋 웃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녹안에 스민 미소를 본 이벨린은 그녀의 웃음이 굉장히 데니스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카락 색도 어쩐지 회색보다는 은발에 가까워 보이는 것 같고…….’

    기분 탓일까. 루스벨라가 진짜 신성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녀가 점점 달리 보이고 있었다.

    존재감의 문제가 아니라, 어쩐지 점점 가지고 있는 색소가 옅어지고, 밝아지는 것 같아 눈을 의심하던 차였다.

    ‘그녀에게 더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건가?’

    아벨이라는 자가 노리는 그녀의 심장 속 성력석이…… 과연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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