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아벨이 황제를 추궁하여 황태자와 황후의 행방을 알아내려던 것은 당연하지만, 실패로 끝났다.
“뭐야, 이 인간 어디 갔어?”
“설마 아벨 님을 배신하고 황후, 황태자랑 같이 도망친 것 아니야?”
“에이, 고문받는 취미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러겠어? 그냥 죽는 게 낫지.”
황제가 수많은 황궁의 빈방 중 어느 한 곳에 갇혀 있는 탓에, 아벨과 에덴의 신도들이 그를 발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여기! 여기다!”
한참 동안 수색한 끝에 에덴의 신도들은 황제를 찾아낼 수 있었다. 황후와 황태자가 갇힌 방과 최대한 흡사하게 감금 처리를 해 놓은 방을 보고 아벨은 문을 부쉈다.
우지직.
“사람 돌아 버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집안이네. 이번 황실은…….”
아벨이 이를 갈며 체통도 버린 채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던 황제의 멱살을 잡아챘다. 곱게 자란 황제는 끼니를 굶은 탓에 저항할 힘도 없었다.
“켁, 케켁…….”
“어디 있어? 네 부인과 아들 새끼 말이야.”
“누, 누군데 감히 내게 그딴 식으로 말을……!”
에덴의 장로가 나서서 이분이 우리의 신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매서운 타격음이 울렸다. 황제의 고개가 돌아가 있었고, 아벨이 표정 없는 얼굴로 손을 들고 있었다.
“어디서 황제 주제에 내 앞에서 눈을 부릅떠? 진짜 건방진 게 누구지?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봐?”
“뭐, 뭐……. 넌 누구냐!”
“나? 네가 아내랑 자식새끼 버려 가면서까지 원했던 영생을 줄 수 있는 신.”
아벨의 말에 황제는 눈을 부릅뜨더니 경악했다. 상황 파악을 마친 금빛 머리통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우웁.”
“닥쳐. 네 목소리 듣다가 대가리 실수로 깨 버릴 것 같으니까.”
우악스럽게 황제의 볼을 틀어쥐어 말을 못 하게 잡아 둔 아벨이 인상을 썼다. 마음 같아서는 멍청하게 인질들에게 급습당해 역으로 갇힌 황제를 열 번은 더 죽이고 싶었다.
모시는 신의 더러운 성격을 익히 아는 장로 하나가 조심스럽게 아벨에게 말했다.
“아벨 님. 그래도 죽이시면 안 됩니다. 황제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 대가리는 멍청해도 쓸모가 없지는 않지. 나도 알아.”
영생에 대한 탐욕으로 눈이 멀어 어리석은 판단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명색이 제국의 황제였다. 유유히 빠져나간 황후와 황태자도 황제의 목숨을 저울질하면 외면할 수는 없을 거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후작 애새끼와 배신자의 혈통인 공작 놈도 마찬가지지.’
결국 얽매인 것이 많은 인간이 지게 되는 싸움이었다. 아벨은 소중한 것이 없는 신이라 자신 곁의 누굴 죽여도 상관없었지만.
“커헉! 컥!”
“살려는 줄게. 하지만 좋은 대접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접어야 할 거야.”
아벨에게 있어 인질의 의미는 일회용 쓰레기에 불과했다. 목적으로 하는 단물만 쏙 빼내면, 황제는 곧바로 폐기 처분할 생각이었다. 특별히 아벨이 사랑하는 신성력으로 단칼에 목을 잘라서 죽이려고 했다. 쓰레기여도 몸값이 좀 비싼 쓰레기였으니까.
‘그러니 먹고 버릴 쓰레기에게 최상의 대우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게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아벨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끌어내. 창고든 감옥이든 알아서 처박아 놔. 죽지만 않게 끼니 챙기고.”
“약속과, 다르잖아……!”
“반말 자꾸 하면 입부터 도려낸다?”
아벨에게서 터져 나온 살기가 황제의 전신을 덮었다. 끅끅거리며 숨도 못 쉬는 황제에게 아벨이 속삭였다.
“멍청한 황제야, 그거 알아? 넌 네 나라를 파멸로 이끌 최악의 선택을 한 거야.”
난 아무도 살려 둘 생각이 없거든.
“……!”
“그러니 네 잘못된 선택에 후회하며 피눈물 흘릴 준비나 해. 물론 영생 따위는 네게 과분한 것이니 주지 않을 거야. 영면에 들 준비나 해.”
잔인한 선고에 황제는 발악하려던 것도 멈췄다. 눈앞의 폭군은 진심이었다. 더 반항해 봤자 정말로 목숨을 잃는 개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진실로 미쳤던 게로구나.’
“울어? 다 늙은 아저씨가 우는 꼴 추하니까 눈알 파내기 전에 그쳐.”
아벨이 짜증을 내며 하는 협박에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황제는 깊이 후회했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황후와 황태자의 구원을 기다렸다.
‘도와주시오, 황후. 그리고 내 아들 베네딕트…….’
***
“우리가 폐하를 구할 거냐고?”
“예.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의사에 따라서 작전에 반영해야 하니까요.”
데니스의 말에 루스벨라와 아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야 사실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가족인 황후와 황태자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생각 전혀 없다만?”
“우릴 먼저 배신했으니 살려서 책임을 묻고 싶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구할 필요는 없지.”
황제의 처절한 바람이 무색하게도, 이벨린과 베네딕트는 칼같이 냉정하게 황제와 선을 그었다. 가족이라기엔 참으로 무심한 태도여서 루스벨라와 아슬란이 순간 말을 잃을 정도였다.
“…….”
“…….”
“흠,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데니스만이 홀로 태연한 태도로 그들의 말에 끄덕였다. 꼭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후작은 안 놀라나? 내가 부황을 버리겠다고 선언한 건데. 후레자식이잖아? 패륜이잖아?”
“패륜은 황제 폐하께서 두 분을 버리신 일을 두고 패륜이라 하는 것이지요. 이미 가족을 버린 사람에게 복수하는 일을 패륜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후레자식은?”
“황제 폐하께 한정으로만 황태자 전하는 후레자식이겠죠.”
하지만.
“이런 냉정하고 영명하신 전하의 모습은 제게 큰 이득인 것을요.”
데니스가 쓰고 있던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건 마치 먹이만 찾던 애완동물이 말도 할 줄 안다고 하니 기특해하는 것 같아서 베네딕트는 미간을 찡그렸다.
“칭찬인데, 어째 후작에게 들으니 욕 같네?”
“기분 탓이십니다.”
“아닌 것 같은데.”
베네딕트가 끈질기게 해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도 데니스는 모른 체했다. 그를 보고 이벨린이 손뼉을 쳐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것보다는 후작이 어째서 이득이라고 했는지 밝혀 줬으면 좋겠군. 황제 폐하의 목숨을 포기함으로써 아군이 얻는 값어치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니 말이야.”
미워도 황제는 황제였다. 황족의 목숨은 어느 때에도 가볍게 취급되지 못하는 상황이니만큼 이벨린은 진지했다.
“후작, 자네의 의중을 알고 싶기도 해서 하는 말이네. 황제 폐하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면……. 나와 황태자도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
“그건 절대 아닙니다. 단지, 저들이 시간을 끌려는 수작을 걸어도 무시할 수 있으니 그게 좋다는 의미였습니다.”
“정말인가? 후작을…… 믿어도 되는 거겠지?”
“죄가 없는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목숨을 두고 장난질이나 할 버러지는 아니니 안심하시지요.”
데니스가 예의 그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보다 못한 루스벨라가 나서서 남편을 두둔했다.
“이이가 그럴 사람은 아니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 심장에 꽂혀 있을 성력석을 두고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믿겠네. 현 상황에서는 우리 모자가 기댈 곳이 후작과 공작뿐이니, 내 예민해졌네. 이해해 주게나.”
“걱정하시는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황후 폐하. 저와 제 남편, 그리고 윈체스터 공작이 최선을 다해 에덴을 막아낼 것입니다.”
루스벨라가 굳고 단단한 어조로 말하자 이벨린이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후작이야 재판에서 신성력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아녀자인 자네가 어찌 그리 자신하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주저하던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데니스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적 앞에서는 싸늘하게 식어 있던 눈동자가, 루스벨라에게만은 겨울밤의 화롯불처럼 따뜻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밝혀도 괜찮을 겁니다.”
데니스의 말에 루스벨라는 용기를 얻었다. 동시에 후련하기도 했다.
‘드디어 내 힘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아벨에게 쫓겨서, 그리고 교단을 몰아세울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느라 그녀의 재능은 숨겨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나도 끼워 줬으면 하는데.”
이벨린이 팔짱을 끼고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대화를 궁금해했다. 루스벨라가 나서서 손을 들어 올렸다.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저를 주목해 주십시오.”
“음?”
“이게 바로 저희가 교단을, 에덴을, 그리고 아벨과 맞서 싸우려 한 진짜 이유입니다.”
한 번의 심호흡. 고작 그것만으로 루스벨라는 심장 안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성력석의 존재를 느꼈다. 미각성임에도 그녀의 의지를 따라 샘솟는 성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를 위해 움직여 줘.’
황금빛의 신성력이 혈관을 타고 흘러 그녀의 손끝에 맺힌다. 금사와 같은 찬란함이 빗방울처럼 고여 이윽고 하천이 되어 흐른다.
루스벨라는 방 안을 가득 채운 금빛의 기운을 데니스처럼 검으로 만들었다. 가장 쓰기 편한 형태로 만드는 것을 아직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검을 택한 것이다.
“금빛의 검…….”
“설마 그대도……?”
놀라서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는 이벨린과 베네딕트를 보며 루스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진짜’ 신성력 보유자이며, 에덴에서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제 심장에 있는 성력석입니다.”
저 하나를 죽이고 성력석을 탈취하기 위해 저들은 분명 불온한 움직임을 보일 것입니다.
“데니스가 본 미래는 본디 그러했으니까요.”
***
아벨과 에덴의 신도들이 황궁을 점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국 전체에 그들에 대한 정보가 쫙 퍼졌다.
아벨은 말단 사제 하나가 가져다준 신문을 보다 내팽개쳤다.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제국의 웬만한 신문사들이 낸 1면 기사에는 온통 그들의 이야기만 가득했다. 황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황후와 황태자가 피신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적혀 있었다.
특종으로 취급되어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 그것을 과연 누가 제보하고 기사화하라고 찔렀을지는 너무 뻔했다.
“데벤테르 후작가가 명줄을 빨리 끊고 싶어 안달이 났군.”
후작가의 자금을 이용하자 온 제국민들이 그들에 대해 알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민심은 흉흉해져 황실에 얼씬거리는 귀족들조차 없었다.
대신 위기에 빠진 황실을 구하려는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포착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벨 님?”
“어떻게 하긴.”
아벨이 마시던 포도주를 싹 비우고 그 잔을 내던지며 말했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쟁을 벌여야지.”
이제는 어느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돌입하게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