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우리의 신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신도들이 아벨을 향해 경애의 뜻을 내비치며 충성했다. 경애보다는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것을 아벨이 모를 리는 없었으나 모른 척 웃었다.
벌레에게서 애정을 받는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그러면 나중에 필요 없어져서 죽일 때 찝찝함만 남게 되니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완전해지는 거야.’
그 목표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세월이 아득했다. 멍청한 벌레들의 추앙을 받아 가며 사는 것도 지겨웠다.
‘혼자가 되고 싶어.’
완벽한 신이 되기를 원했다. 영원히 배신자 따위 생기지 않도록, 홀로 완벽하여 외로움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 따위는 영영 있는 줄도 모르고 살도록.
그것만이 아벨이 벌레들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와. 너희들이 나를 진정 완벽한 신으로 만들고 싶다면.”
“명심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에게 진정한 자리를!”
“영광된 축복의 자리를!”
입을 모아 함성을 내지르는 신도들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아벨이 출격하라 명령한 이 결전에서 패배한다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오직 패배자로서의 말로뿐이란 것을.
특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나 아벨이 죽기라도 한다면……. 이미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던 신도들은 순식간에 늙어 죽게 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죽지 않으려면 발악해야 해!’
에덴의 사제들은 이 위험천만한 도박의 판돈을 모두 아벨에게 걸었다. 아벨이 무사히 제국을 삼키게 된다면, 그들도 더는 우중충한 음지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몸이 달았다. 줄을 잘 선 덕에 아벨의 뒤를 따라 제국의 지배층이 될 것을 생각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설마 아벨 님을 이길 상대가 나오겠어? 인간 주제에 어떻게 신을 이기겠어.’
그들에게 있어 데니스와 루스벨라, 아슬란과 베네딕트의 대항은 그저 호랑이 앞에서 토끼가 앞니로 깨무는 것처럼 가소롭게 여겨졌다.
‘저 벌레들이 그놈들을 상대로 성력석을 빼앗아 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정작 아벨은 자기 밑의 사람들이 그들과 맞서 싸웠을 때 승리할 수 있을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런 가정을 하는 것이 불쾌했지만, 신도들이 여기까지 아벨을 귀찮게 한 인간들을 이기는 장면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가장 약해 보이는 루스벨라마저 아벨과 처음 마주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저항을 다 했다. 그것만 봐도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읽혔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는 싫었다. 그리고, 아벨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를 방해하는 벌레들을 다 치우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우선 황궁을 장악한다. 그리고 황실의 군권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예!”
에덴의 본거지가 황성 바로 밑에 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편리했다. 어느 누가 제국의 심장 아래 그것을 해칠 칼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미 반쯤은 황실이 내 손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야.’
황제를 겁박하여 계획을 방해할 것이 분명한 황후와 황태자를 가둬 놨다. 그 둘만 없다면 어리석은 황제의 행보를 막을 사람이 없으니 안심이었다.
아벨은 사제 몇 명을 대동하고 에덴과 황궁을 잇는 비밀통로 앞에 섰다. 초대 황제와 함께 설계한 이 비밀통로는 이제 아벨밖에 아는 자가 없어서 좋았다.
드르륵. 흙과 먼지로 이루어진 벽인 줄만 알았던 문이 옆으로 밀리면서 계단이 드러났다. 볼품없고 초라해 보이는 이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황궁이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아벨 님?”
이벨린과 베네딕트를 감금한 방을 지키던 신도 하나가 와서 아벨에게 인사했다.
아벨은 문을 칭칭 감은 쇠사슬과 자물쇠,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걸어 놓은 마법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래. 황후와 황태자는 잘 감시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게 조금 불안하지만요. 시위라도 하는 것인지……. 식사에도 전혀 손을 대고 있지 않습니다.”
문 앞에는 그들이 거부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물이 담긴 트레이가 있었다. 그것을 잡고 있는 시종의 눈빛은 어딘가 멍했다. 세뇌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갑자기 나타나 활보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식사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그 말을 듣자 아벨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몇 끼째 거르고 있지?”
“예? 벌써 하루를 넘게 거르고 있습니다.”
감이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고.
“……열어 봐야겠어.”
“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안에서 탈출을 시도할 수가…….”
“문을 열어!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는 걸 보니 이미 도망친 것 같단 말이다!”
“그, 그럴 리가……. 창문이나 쥐구멍까지 전부 봉쇄했는데…….”
답답하게 구는 신도를 밀치고 아벨은 직접 신성력을 이용해 문을 부쉈다. 산산조각 난 문 사이로 보이는 광경은, 조용했다.
“……당장 수도 내에 수배령을 내려라. 황후와 황태자를 붙잡아 오는 신도에게는 성력석을 내려 주겠다.”
그렇게 말해 봤자 소용없었다.
이벨린과 베네딕트는 데니스가 준 이동 마법이 걸린 마도구를 이용해 데벤테르 후작저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찾아내! 황제를 협박해서든 뭐든!”
그리고, 베네딕트는 탈출하기 전에 어리석은 그의 아버지와 아벨을 위해 소소한 방해 공작을 남기고 왔다.
***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후작저의 홀에서 주인 없는 차 두 잔을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우, 이동 마법은 다 좋은데 멀미가 나서 괴롭단 말이지.”
“그러게 평소에 잔머리를 쓰는 만큼 몸을 단련하지 그랬니.”
홀의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이벨린과 베네딕트가 홀연히 나타났다. 베네딕트의 손에 있던 마도구는 쓰임을 다해 잿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오셨습니까,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반갑네. 데벤테르 후작. 그리고 후작부인.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자네들 집에서 신세를 좀 져야겠어.”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손님용 방을 모두 정돈하였으니, 원하는 곳에 가서 묵으시면 됩니다.”
데니스가 정중하게 말하자 이벨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베네딕트는 뒤에서 ‘나는, 나는?’ 하면서 눈을 빛냈다.
“호오, 준비성이 철저하군?”
“칭찬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후작이 좀 많이 꼼꼼합니다, 어머니. 오죽하면 이 탈출용 마도구도 예지라도 하고서 준비해 준 것 같다니까요.”
예지라는 말에 잠깐 루스벨라가 움찔했지만, 데니스와 아슬란 외에 그 미세한 움직임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예지를 할 수 있었다면, 황태자 전하께 미리 제국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귀띔했겠죠. 황제 폐하를 막아야 한다면서요.”
“……그럼 나는 그걸 미친 소리라고 흘려들었겠지.”
“잘 아시는군요.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제발 삼가시길 바랍니다.”
“어마마마나 후작이나 진짜 못됐네. 농을 받아 주려는 생각이 없어, 생각이.”
베네딕트는 투덜거리며 예절을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차를 한입에 들이켰다. 그 옆에 이벨린 황후가 앉아 아들과 함께 차를 홀짝였다.
“고맙네, 후작. 덕분에 우리 모자가 화를 피할 수 있었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황후 폐하.”
“그에 대한 보답 겸, 황제 폐하에 대한 복수를 조금 저지르고 왔다네.”
이벨린이 살짝 주름진 눈가를 접어 가며 웃었다. 루스벨라가 그녀를 보고 질문했다.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데벤테르 후작부인. 나는 지금 그대가 내게 황실의 기밀을 물어봐도 대답해 줘야 하는 상황인걸.”
“그런 엄청난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욕심이 없군. 이 기회를 빌어 후작가가 황실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많을 터인데.”
최악의 상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베네딕트가 데니스와 루스벨라, 아슬란과 협력하지 않았다면 황후와 황태자는 에덴의 광신도들에게 무슨 수모를 당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황족의 목숨의 무게는 무거운 법이지.’
그러니 무언가를 당연히 요구할 줄 알았는데, 데벤테르 후작 부부는 그러지 않았다.
“나와 내 아들은 황제 폐하께 받은 만큼 똑같이 돌려주고 나왔다네.”
“그 말씀이신즉……?”
이벨린이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마시는 차에 잼을 넣은 것도 아닌데 달았다.
“황제 폐하를 가두고 나왔지. 그분도 우리가 느꼈을 황당함과 수치심을 느껴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황후는 절대 당하고만 사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들인 베네딕트가 미리 조금씩 심어 놓은 황궁 내 사람들을 이용해 황제를 유인했다. 핑계는 간단했다.
“정말 황후와 황태자가 도망쳤다고 하더냐?!”
탈출하기 전, 시종이 거짓으로 황후와 황태자가 도망쳤다고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는 아벨이 이를 알면 영생을 주지 않을 것 같아 한걸음에 그들이 도망쳤다는 곳으로 달려갔고, 베네딕트의 사람들에 의해 붙잡혔다.
“이, 이거 놓아라! 감히 짐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황태자 전하의 명이십니다.”
“짐은 황제니라! 어떻게 감히 시종 따위가 황제를 끌고 가느냐……!”
“폐하께서는 그렇다면 어째서 죄 없는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가두셨습니까?”
황제는 그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면 그만 곤란해지는 꼴이니.
“그건…….”
“변명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를 능멸한 벌은 저희가 후에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풀려나신다면 그때 달게 받겠습니다.”
그들은 황제를 끌어다가 그의 침실이 아닌, 황제가 황후와 황태자를 가둔 것처럼 빈방 하나에 가뒀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방 안에 갇히게 되자 황제는 잠긴 문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다.
“거기 누구 없느냐! 누가 와서 나 좀 풀어다오!”
하지만 아무도 황제를 위해 문을 열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궁인들 사이에 진실의 쪼가리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윈블 영애의 미심쩍은 죽음 이후 황제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간 상황에서, 난데없이 아내와 아들을 가둔 것은 궁인들의 마음을 황태자에게 기울게 만들기 충분했다.
“문을 열란 말이다!”
황제는 그 넓은 황궁에서 아무도 열어 주지 않는 문을 붙들고 기운이 다 빠질 때까지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러게, 누가 아내와 자식을 홀대하랬니.”
이벨린은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말끔히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