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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11화 (111/166)
  • 111화

    황제궁 소속의 브로치와 제복이었다. 시종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기다리는 것을 보고 베네딕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이 시간에 말이더냐?”

    “예. 오랜만에 전하와 함께 술 한 잔 드시고 싶으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부황께서는 자작하는 것을 즐기시는 분이신데……. 우선 알았다. 내 곧 간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명을 받든 시종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베네딕트는 시종이 가자마자 곁에 앉은 세 사람에게 이상함을 토로했다.

    “수상해. 부황께서 즐기시는 술은 굉장히 희귀한 종류의 것이라, 홀로 드시는 것이 일반적이야. 자식인 내게도 나누지 않던 것을 하필, 이 시점에서 같이 마시자고 부른다?”

    허.

    “속이 너무 빤히 보이는 행동 아닌가?”

    “교단의 일, 그러니까 에덴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겠지요.”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서 시선을 돌려 차만 홀짝이던 아슬란이 베네딕트의 말에 대꾸했다. 데니스와 루스벨라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희와 함께 이 사건을 지휘하고 계시니 그런 것이겠지요.”

    “황제 폐하의 허물이 이로 인해 탄로 난다면, 그만한 망신이 또 없을 테니까요. 예민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전하를 불러 무엇을 부탁하든 악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나도 설마 부황께서 거기까지 체면을 구기진 않기를 바라네. 자식인 내 앞에서 무너지면 내 마음은 어떻겠는가.”

    “전하…….”

    아슬란이 잠시 베네딕트에게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뭐, 제국을 망칠 뻔한 결정을 하셨으니 이미 아버지로서 존경은 다 잃으셨지만. 마지막까지라도 제발 추하게 물러나시진 않았으면 하네.”

    “그, 그러십니까.”

    “공작도 어머니인 선대 공작부인과 아직도 냉전 중이라며? 고생이 많군.”

    “……괜찮습니다. 제가 쌓은 업이 돌아온 것이니까요.”

    선대 공작부인은 아슬란의 서신에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다. 북부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서신을 보냈음에도 돌아온 것은 아슬란이 직접 쓴 그 편지였다. 아예 열어 보지도 않고 통째로 반송한 것이다.

    “부모의 기대를 벗어난 자식의 삶은 피곤한 법이지. 공작, 자네가 누누이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대가 위태로워 보이네.”

    “황공하옵니다.”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선대 공작부인이 자네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생각해서 먼저 등을 돌리지도 말게. 부모는 생각보다 자식을 놓기 어려운 존재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도 지금 황제 폐하께서 내미신 손을 믿고 싶으십니까?”

    베네딕트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어떻게 믿고 싶지 않겠나? 잘못을 저질러도 내 아버지고, 나는 그분의 아들인데. 부황께서 내미는 술 한 잔의 의미가 제발 무겁지 않은 것이었으면 좋겠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난히 평소에 여름의 태양처럼 활달한 황태자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설사 황제 폐하께서 그른 선택지를 골랐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죄책감을 느낄 의무가 없으십니다. 선택은 황제 폐하께서 내린 결정이니까요.”

    루스벨라가 한마디 보탰다. 그녀는 감옥에 붙잡힌 그녀의 아버지, 지펠론 백작을 떠올리면서 찬찬히 말을 골랐다.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은 질기지만, 부모가 어떤 선택을 내려 잘못했다면, 그것은 온전히 부모의 책임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희를 돕지 않으셨다고 해도, 폐하께서는 결국 에덴과 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후작부인은 그리 생각하나?”

    “네. 폐하께서는 충분히 다른 선택을 내릴 여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편에 선 것이니까요.”

    루스벨라는 지펠론 백작을 떠올렸다. 그에게도 더 나은 선택을 고를 여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녀와 동생들을 학대하지 않을 선택이.

    그러나 그것을 저버린 것은 결국 지펠론 백작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불쌍한 아버지.’

    아직도 본인이 무엇을 잘못하셨는지 뉘우치는 방법도 모르는 가여운 아버지.

    그와 황제가 겹쳐 보였기에 루스벨라는 베네딕트의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데니스도 부인의 말을 거들었다. 부드러운 위로의 말은 전혀 아니었지만.

    “답지 않게 약한 모습 보이지 마십시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이상한 심기를 보일라치면 바로 받아칠 준비 하고 있다는 거 모르지 않습니다.”

    “에잇. 후작은 놀라지를 않는군. 재미없어.”

    “하지만 그런 모습을 더 보임으로써 전하께서 감추려는 약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도 저는 압니다.”

    데니스의 그 말에 베네딕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수축되었다가 다시 팽창했다. 데니스는 그것을 보고 여유롭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아니라고는 못 하시겠지요?”

    “자네는…… 정말이지…… 나중에 실컷 일하는 것으로 부려 먹을 걸세. 자네 같은 인재는 여기저기 써먹어야 내가 편해지네.”

    베네딕트는 괜한 말을 얹으며 데니스를 타박했다. 데니스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루스벨라와 아슬란도 황태자가 툴툴거리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 흐뭇하게 웃었다.

    “뭐야. 왜 다들 웃나? 기분 나쁘니 나는 서둘러 부황에게나 가 봐야겠네. 갑자기 술이 당기네!”

    “네. 가십시오.”

    후다닥 미묘하게 불편한 분위기를 탈출하려던 베네딕트에게, 데니스가 무언가를 쥐여 줬다.

    “이게 뭔가?”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한 비상용품입니다. 위기에 처하셨을 경우, 이것을 이용해 황후 폐하와 함께 황궁을 빠져나오십시오.”

    “용도는?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

    “마탑에 의뢰한 일회용 순간이동 장치입니다. 그리고 이건 녹음 장치고요. 가운데 있는 빨간색 버튼만 누르면 작동합니다. 녹음기의 경우 다시 버튼을 누르면 되니 쉽죠?”

    기왕 주는 것, 거절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베네딕트는 얼른 주머니에 순간이동 장치와 녹음기를 넣고 데니스에게 물었다.

    “후작은 내가 무사히 황태자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전하. 폐하의 방해가 약간 있겠지만요.”

    “하하……. 그렇단 말이지.”

    허탈하게 웃던 베네딕트는 다시 허허실실 잘 웃는 황태자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세 사람에게 당부했다.

    “만일 내가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대들도 몸을 피하게. 내일 재판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자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교단이 얼마나 좋아하겠나.”

    “그리 말씀하시지 않아도 이만 가 보려고 했습니다.”

    “후작 자네는 좀 빠져. 눈치 빠른 인간이니 난 자네가 아니라 후작부인과 윈체스터 공작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네.”

    루스벨라와 아슬란은 황태자의 말에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재판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루스벨라는 긴장감에 손에서 땀이 흐르는 것마저 느꼈다.

    “염려 마십시오. 전하. 저희는 무사할 것이니, 전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만일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이 생긴다 해도 그들을 베어 넘기며 나아가겠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베네딕트도 그제야 진심으로 웃었다.

    “그래. 부탁하지. 내일 재판에서 상쾌한 얼굴로 만나자고.”

    그리고 황제궁으로 발걸음을 옮긴 베네딕트는, 한 시간 동안 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황태자궁은 에덴에서 보낸 이들로 포위되었다.

    “젠장, 없군. 이미 나갔어.”

    그러나 그들이 포위한 보람이 없게도, 세 사람은 베네딕트가 나가자마자 황궁을 나섰다. 안전한 장소로 돌아간 그들을 잡을 방법은 없었다.

    ***

    재판이 열리는 날이 밝았다. 간수들이 감옥 구석에 처박혀 있던 사제들을 나오게 했다.

    “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당연히 재판이지. 감옥에 갇혀 있기만 하다 보니 소식이 느리구먼.”

    간수가 혀를 찼다. 사제들은 며칠 동안 빛도 들어오지 않는 감옥 속에서 기도만 하다 지쳤다. 씻지도 못한 그들에게서 냄새가 났다. 사제복도 아닌 더러워진 평복을 입은 그들은 한낱 범죄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호, 혹시 저희의 구명을 위해 나타난 사람은 없습니까?”

    “참나. 사람이 염치라는 게 있어야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누가 구한다고 나섭니까?”

    “…….”

    황태자가 주최한 연회에서의 난동을 사주한 죗값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벨로트는 나타나지 않는 알렉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성력 증진제 건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따지면 그 마약과도 같은 포션을 시장에 풀어놓은 데벤테르 후작가가 잘못한 것이었다. 가만히 있던 벌집을 건드린 꼴이라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라며 붙잡힌 사제들은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 재판은 이길 수 있어. 연회 건은 꼼짝없이 징역형을 살아야겠지만, 저쪽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감형받을 수 있을 거야.’

    그들은 믿었다. 가짜 성력 증진제를 푼 쪽이 재판에서 질 것이라고. 교단이 아무리 그들이 밉상으로 보여도 한 묶음이니 버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예상은 재판을 진행하면서 철저히 무너졌다.

    데니스와 루스벨라 측이 거짓말을 하는 쪽은 붙잡힌 사제들이라고 강경하게 나섰기 때문이었다.

    “허니버터 상단은 저희 가문이 소유한 곳이 맞습니다. 실소유주가 저인 것도 맞고요. 하지만…….”

    그 ‘하지만’을 듣고 벨로트는 입에 거품을 물 기세였다.

    “이번에 내놓은 신제품인 성력 증진제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력 증진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굳이 이름을 다르게 붙여 판 까닭은 일종의 판매 전략이었을 뿐입니다.”

    데벤테르 측 변호사가 하는 말에 사제들은 뒷목을 잡고 절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성력 증진제가 보통의 마력 증진제와 다를 바가 없다니! 우리가 분명 효과를 봤는데!”

    “그것 때문에 여기저기서 꾼 돈이 얼만데……! 사제들의 주머니를 털어먹는 게 자랑이냐?”

    “판사님, 저 사람은 지금 새빨간 거짓을 고하고 있습니다!”

    아벨에게 죽임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함정에 빠졌다는 억울함이 서러움으로 쏟아졌다. 욕을 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용히들 하세요! 더 소란스럽게 굴면 퇴장시키겠습니다.”

    판사가 과열된 장내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억울함과 분함이 섞인 눈동자가 많았으나, 데니스는 그 분노 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침착하게 그들의 주장을 뭉개 버릴 증거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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