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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10화 (110/166)

110화

“알겠습니다, 우리의 신이시여.”

이례적인 순간이었다. 아벨이 에덴을 세운 이후, 처음으로 외부로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피바람이 불겠구나.’

에덴에 들어오게 되면, 아벨이 무슨 목적으로 이 집단을 세웠는지 배운다. 마치 성서처럼 귀중한 이야기임을 명심하라는 것처럼 주입받는 것이 신의 종으로서의 첫걸음이었다.

-나는 불완전한 신. 그러니 때가 되면 이 세상의 신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받기 위해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럴 힘을 갖추게 된다면.

갖춰야 할 힘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에덴이 제국 깊숙이 파고들어 장악할 수 있는 영향력을 뜻했다. 다른 하나는 잊힌 신이 예언했던, 다시 신을 부를 수 있을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진 성력석의 등장이었다.

‘그 두 가지 모두 덜 갖춘 상황인데…….’

찌를 듯한 살기에 사제들이 일제히 아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의문이 들어도 지옥에서 소환한 악마같이 분노하는 아벨에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다들 제 목숨 챙기기에 바빴지.

“잡히면 전부 죽여주마. 뼈와 살을 분리하고, 심장을 산 채로 뜯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지.”

거의 저주나 다름없는 말을 알렉과 세비어에게 퍼부으며 아벨은 애꿎은 집기들을 박살 냈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제들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참았다. 극도로 예민해진 아벨은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아무거나 트집을 잡아 대기 일쑤였으므로.

‘여기서 걸리면 최악의 경우 죽음이다.’

영생을 탐낸 사람들이니만큼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벨은 아무도 말리지 않는 기묘한 정적 속에서 홀로 분풀이를 했다.

“난, 정말 배신자가 싫어. 벌레 주제에 나를 거부하고 밖으로 나가다니. 용서할 수 없어.”

아벨에게 배신은 마리아를 떠오르게 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된 기억인지라 그녀의 얼굴은 잊었지만, 마리아가 자신을 떠나던 그때 그 순간만큼은 각인되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나를 버리고 떠났어?”

너만큼은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지 않았어?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었잖아.

아벨은 마리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안에 쥐고 있던 것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감각이 그를 소스라치게 했다.

“다, 다 내가 가질 거야.”

힘을 가지기에 적합했던 소년은 실험을 당한 이후로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았다. 이곳,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청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은 것은 완전한 신이 되어 완벽해지겠다는 소망뿐.

“에덴 내의 모든 사제들은 들어라. 내가 지시한 곳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도록.”

“존명.”

“신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아벨의 화가 수그러들자 사제들은 곧바로 명을 받아 움직였다. 일사불란하게 발을 놀리는 그들은 마치 군무를 추는 것처럼 보였다.

‘배신자가 생겼다면 에덴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야. 내 쪽에서 먼저 선공을 하지 않으면 당한다.’

바라던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완벽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대체품이 아직 각성도 하지 않았는데.’

쯧. 아벨이 혀를 찼다. 이렇게 된 이상 덜 익은 미성숙한 성력석이라도 ‘채취’해야 했다.

“저어, 아벨 님.”

“무슨 일이지? 짜증 나는데.”

“그, 그게…… 성력 증진제로 잡혀 있는 사제들은 어떻게 할까요? 명부를 조회한 결과, 전부 에덴 내에서 아벨 님께 세례를 받은 자들이던데…….”

검붉은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백색 눈썹이 불쾌함에 치켜 올라가는 그 작은 동작에도 사제는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그것들을 나보고 구해 달라, 이 말이냐? 명색이 세례를 내려 준 사제들이니까?”

장로들이 휘하에 직속 사제들을 둔 것은 순전히 아벨을 따라 한 것이었다. 그가 필요한 순간에 제국 전역을 통제할 수 있도록 뿌려 둔 씨앗 같은 존재들인 심복들은 체스판의 말이었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쓸모가 있으면 세례를 내리고 성력석의 일부를 나눠 줬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그들에게 인간적인 정 따위는 가당치도 않았다.

애초에 아벨이란 괴물은 그런 따뜻하고 말랑한 감정 따위는 몰랐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망발을. 그들을 살려 달라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지난번처럼 죽여야 하는 것인지를 묻고자 했습니다.”

“죽이자?”

“예.”

“황궁 분위기가 뒤숭숭하던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사건의 범인들이 죽게 내버려 둘까, 과연?”

매끄러운 목소리가 다정한 물음을 흉내 냈지만, 질문을 던진 사제를 비웃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네가 찾아가서 죽이기라도 할 거냐는 뜻을 담고 있었다.

“황제가 있지 않습니까, 아벨 님.”

에덴은 광신도의 소굴이었다. 그들이 모시는 신 앞에서는 제국의 황제라도 초라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사제는 감히 황제를 심부름꾼으로 쓰면 어떻겠냐는 방안을 내밀고 있었다. 발칙하게도.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황제가 영생의 달콤함을 이기지 못하고 저희와 거래를 텄으니, 그것을 약점으로 휘두르면 될 것 같습니다. 저번에도 잘해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슈라 윈블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석연치 않은 돌연사였기에 의심의 여지가 수두룩하니 이번 제안은 황제로서도 피하고 싶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제까짓 게 뭘 어쩌겠어?’

황제가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든, 폭군이라 손가락질받든 간에 아벨이 관심을 가질 일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 중 하나.

“황제가 저희 쪽이 불리하다 판단하여 발을 빼기 전에 사람을 붙여 놔야 합니다.”

“흠, 세뇌가 좋을까? 말 잘 듣는 인형이 역시 조종하기 편하니까. 그렇지? 그게 좋겠지?”

“아벨 님께서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이것이 잘못된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을.

아벨은 흥얼거리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황제를 협박하여 이용할 생각에 빠졌다.

“눈에 띄지 않게 사제 하나를 시종으로 위장시켜. 네가 가도 좋겠다. 황제에게 가서 전하려무나.”

교단에 위협이 될 만한 증거들을 전부 처분한다면, 젊음을 되찾게 해 주겠노라고.

성력 증진제 사건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황태자였다. 그리고 황제는 황좌와 권력에 집착하는 좀생이였다. 즉각적인 젊음을 당근으로 걸고, 채찍으로 그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는지를 폭로한다고 말하면 목줄 매인 개처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진 자는 잃는 게 가장 두려운 법이지. 탐욕스러울수록 두려움과 의심은 배가돼…….”

황제는 불안감에 시달릴 것이다. 제국을 노리는 적인 에덴에게 넘어갈 뻔했다는 것은 폐위 사유가 되고 남았다.

‘지금도 아들인 황태자에게 들키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겠지.’

그 재미난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주 약간, 아쉬웠다.

“고작 내 말을 전달하는 것조차 못하진 않겠지? 쉽잖아.”

“……물론입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옳지. 착하다.”

충성스러운 개를 대하듯 아벨이 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늘하고 차가운 손길에 사제의 목덜미 근처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벨은 돌아서려다 말고 한 가지 지시를 더 내렸다.

“아, 그렇지. 성력 증진제인지 뭔지, 그 일은 교단이 최대한 될 수 있는 데까지 막아 보라고 해. 시간을 버는 동안 내가 제국을 장악해 볼 테니까.”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이것이 마지막 결전이듯이, 아벨과 에덴 측에도 그러했다. 원하지 않았던 시발점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있는 수를 다 써서라도 쟁취해 낼 예정이었다.

“어디…… 나를 이 지경까지 화나게 한 그 면상들이 절망으로 일그러질 때는 얼마나 어여쁠지 기대되네.”

두근거려.

아벨이 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딱 한 번 봤던, 대체품을 품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곧 만나러 갈게. 나의 소중한 성력석아. 붉은 심장 속에 너만이 푸르겠지.

아주, 아름다울 거야. 눈이 멀어도 좋을 만큼.

***

재판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베네딕트와 데니스, 아슬란의 논리정연한 설명 덕에 귀족들은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교단이 사제들의 착오와 실수 등을 운운하며 날짜를 미루려는 시도는 죄다 수포로 돌아갔다.

“기분이 어떠한가? 이 사건의 일등 공신인 후작, 자네 말일세.”

익숙한 습관처럼 데니스와 아슬란, 베네딕트는 황태자 궁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는 루스벨라도 함께였다.

데니스는 루스벨라의 손을 꼭 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최고죠.”

구태여 많은 수식어구를 붙이지 않은 짤막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루스벨라는 충분히,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맞잡은 손이 유난히 따뜻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서라면 뭐든 못할 게 없는 남편이라는 게, 흔한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

그 말대로였다. 루스벨라는 데니스가 얼마나 많은 산과 벽을 넘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데벤테르 후작가의 연약하던 첫째 도련님이 에덴을 짓밟아버릴 천적이 되기까지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터다.

“로맨스 소설의 귀감이야. 잘 어울려, 두 사람.”

희극을 보는 것처럼 베네딕트가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박수를 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만 놀리십시오.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는 아직 이런 사랑을 찾지 못하여 더 재밌어하시는 것, 다 압니다.”

“와, 사랑이라고 했어. 저 딱딱하고 냉철한 데벤테르 후작이 사랑을 직접 입으로 말했다고!”

데니스는 베네딕트의 호들갑에도 끄떡없었다.

“전하께서도 전하의 모든 것을 헌신해도 좋을 상대를 만나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윽. 난 싫네. 자네가 이렇게까지 버터를 잔뜩 넣어 구운 느끼한 고기처럼 이야기하니 별로 알고 싶지 않아.”

“글쎄요. 조만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무슨 소리야, 그거. 나 저주하나?”

“설마요. 제가 전하도 아닌데 왜 저주를 내리겠습니까?”

“후작…… 항복, 항복하겠네. 다음부터는 까불지 않도록 하겠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말싸움의 승자는 데니스였다. 루스벨라는 그의 성질머리도 보통이 아님을 보면서, 어쩐지 쿡쿡 웃음이 나왔다.

“당신이 편하게 말을 하는 걸 보니 즐겁네요.”

“루스벨라가 즐겁다면 언제든 보여 줄게요. 황태자 전하를 준비 용품으로 챙겨 가는 건 품이 다소 들겠지만.”

“두 사람, 나랑 윈체스터 공작이 민망해하는 건 보이지도 않지?”

“네, 안 보입니다. 억울하면 결혼하십시오.”

“와…… 와…… 두고 봐. 후작.”

베네딕트가 난생처음으로 결혼하겠다는 의지를 다진 순간이었다. 그의 어머니인 황후가 알았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황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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