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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09화 (109/166)
  • 109화

    베네딕트는 저가 말했으면서도 이것마저 사실일까 두려워졌다. 그래서 입을 두 손으로 막아 봤지만, 이미 의심에 불을 지폈다.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황제 폐하께서 너무 쉽게 영생의 유혹에 넘어가신 것이 조금 수상했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난 그 이야기를 듣고 부황께 매우 실망했으니까.”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유괴범이 납치용으로 내민 사탕을 믿고 따라가는 꼴과 같은 모습을 보여 줬다. 베네딕트에게 있어 그것은 수치스러운 상처였다.

    “……하지만 제국이 시작부터 뿌리가 썩은 나무였다면, 난 반드시 그 잘못된 근간을 뽑아내어 새로이 묘목을 심을 걸세.”

    그렇게 말하는 베네딕트는 정말 몇 안 되는 황태자다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아슬란과 데니스는 살짝 놀랐다. 동시에 안심했다.

    ‘이 사람이라면 적어도 제국이 불바다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군.’

    두 사람의 기억 속에는 끔찍한 광경이 아직도 머릿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가끔은, 꿈속에도 나타나 소스라치며 일어나는 날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쓸모있는 아군인 베네딕트가 썩 마음에 들었다.

    [무얼 걱정하느냐. 너희들이 차근차근 미래를 바꿔 나가고 있지 않으냐.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 아가들아. 만일 중간에 무슨 문제가 생겨도, 너희들이라면 시련을 뛰어넘어 원하던 결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야.]

    데니스와 아슬란의 정신 속에 살아있는 신의 파편과 마리아가 한 소리 보태 줬다. 걱정 어린 잔소리에 두 사람은 피식 웃었다.

    ‘예. 감사합니다.’

    ‘웬일로 딴죽을 걸지 않으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나름 진지하던 베네딕트는 다시 볼을 부풀리고 둘만 또 뭘 알고 있는 거냐며 투덜거렸다.

    “둘이서만 비밀 이야기하면 재미없을 줄 알게.”

    “저흰 그렇게 화목한 사이가 아닙니다, 전하.”

    “……맞습니다.”

    싱거운 해명에 황태자의 흥미도 빠르게 식었다. 그들은 잡담은 그쯤하고 황궁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찾으려 함께 머리를 쥐어짰다.

    “어디 있을까? 아무나 올 수 없게 만든 곳이니 비밀 통로가 분명 숨겨져 있을 텐데.”

    “알렉의 말에 의하면 외출할 수 있게 만든 통로도 있다 하니, 외부로도 향하는 통로가 최소 한 개 이상이겠지요. 여러 군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중 하나만 얻어걸리면 되는 것일 텐데…….”

    데니스가 빤히 통신용 마도구를 쳐다보다가 버튼을 다시 눌러 봤다. 그러자 지도의 형태로 나타났던 붉은 점이 이제는 올곧게 직선 형태로 뻗어 나가는 붉은 빛이 되었다.

    ‘내가 사용 설명서를 끝까지 안 읽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마탑에서 종종 마도구에 의뢰자도 모르게 숨겨진 기능을 넣는다는데, 이게 그런 종류의 물건이 아닌가 싶었다.

    “잘됐군요. 이것으로 비밀 통로를 찾으면 될 것 같습니다. 빛을 따라가면 비밀 통로가 나올 것 같으니까요.”

    “그렇지만 황궁에서 이런 걸 들고 구석구석을 배회한다면 굉장히 수상하게 여길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군요. 적임자가 있으면 좋겠는데…….”

    황제가 버젓이 에덴의 협력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움직인다면 좋을 게 없었다.

    “음……. 한 명. 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알고 있는데.”

    “누구입니까?”

    황궁에서도 문제없이 이곳저곳을 살필 수 있고, 황제에게도 그 행동을 트집잡히지 않을 사람.

    “어마마마밖에 적임자가 없는데?”

    “아.”

    데니스와 아슬란이 동시에 감탄했다. 확실히 황후 폐하라면, 불시에 궁 내부를 점검하겠다는 이유를 핑계 삼아 황궁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법한 비밀 통로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어마마마께서 데리고 다니는 시녀들은 친정에서부터 데리고 온 자들이니, 비밀이 샐 우려도 없다.”

    베네딕트의 말에 데니스는 곧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통신용 마도구를 내밀었다.

    “부디 황후 폐하께서 재판 전까지 비밀 통로를 찾아내길 기원하겠습니다.”

    “물론이지. 어마마마께서는 부황의 아내이기 전에 이 제국의 국모시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반드시 우리 편을 들어주실 걸세.”

    “믿겠습니다, 전하. 행운을 빕니다.”

    “고맙네, 공작. 그대들 또한 행운을 빌지.”

    연회를 망친 주범들을 위한 재판이 곧 열릴 예정이었다. 그것으로 그들은 교단을 압박하여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작. 웬 안경인가? 내가 알기로 그대의 시력은 멀쩡한데?”

    “최근 일이 많아져서 좀 피로해져서 그렇습니다. 집중하려 낀 것이니 괜찮습니다.”

    “그런가?”

    “예.”

    그렇게 대답하는 데니스를, 아슬란은 주의 깊게 쳐다봤다.

    ***

    연회를 망치고, 가짜 광신도를 고용해 데니스를 죽이려던 아벨의 심복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망했다.’

    벨로트는 절망했다. 그들이 일을 계획할 때만 해도 모든 것이 그들의 의도대로 잘 풀릴 줄만 알았다. 이후에도 빠져나갈 방도가 있으리라고 믿어 서둘러 재판을 열어 달라고 교단에 호소한 일이, 도리어 그들의 숨통을 죄고 있었다.

    교단이 이미 승인하여 신청한 재판이라, 데니스와 황실 측에서는 흔쾌히 받아들여 대법원에서 재판을 열었다. 무려 방청객들이 참여하는 형태의 재판이었다.

    교단은 그들의 소속 사제들이 감옥에 잡혀갔다는 것을 알고서 서둘러 재판을 취소하고자 했지만, 무를 수는 없었다. 증인과 목격자가 명확했고, 범인들마저 검거했으니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덕분에 루스벨라는 행동의 자유 범위가 늘었다. 교단이 황실과 데벤테르 후작 가문, 그리고 평범한 제국민들에게도 압박당하는 현실이다 보니 그녀에게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공적이야.’

    지금도 그녀는 엘렌과 다이애나와 함께 온실에서 티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호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처럼 마음을 놓은 상태에서 마시는 밀크티는 그 어느 때보다 달콤했다.

    “재판이 내일 열린다며? 루시.”

    “신문을 보니까, 교단이 완전히 패닉 상태더라. 네게 사과를 요청하면서 어떻게든 잡힌 사제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어.”

    엘렌과 다이애나가 화를 내며 교단의 행보를 욕했다. 그녀들은 루스벨라가 변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응. 그렇지만 선처는 없어. 반성한다고 해 봤자 당장의 처벌을 모면하고자 하는 게 느껴져서, 이참에 교단 상대로도 소송이 오갈지도 몰라.”

    바삭, 하고 간식거리로 내놓은 과자가 으깨지는 소리가 꼭 교단을 결딴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듣기로는 일을 저지른 사제들이 너와 네 남편인 후작님을 상대로 소송을 신청했다며?”

    “가짜 성력 증진제를 판 게 괘씸해서 좀 겁을 준다고 한 행동이라는데……. 그게 확실하다는 증거도 없는데, 사적 복수를 행할 거라면 법이란 게 왜 있겠어. 경솔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야.”

    “무슨 배짱으로 아직까지도 선처를 바라는 건지. 정말 뻔뻔해라.”

    벨로트를 비롯한 아벨의 심복들은 이미 모든 정보를 토설했지만, 마지막 희망까지는 버리지 못했다. 성력 증진제, 그것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아치우고, 나중에는 효과가 없는 가짜를 유통했다는 것을 빌미로 데벤테르 후작가라도 진창으로 끌고 올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그래야 아벨을 만났을 때 적어도 편하게 죽을 수는 있을 테니까.’

    루스벨라의 예상대로였다. 범죄자 신세가 된 사제들의 현재 목표는 데니스와 루스벨라를 몰락시키는 일이었다.

    ‘제발, 제발……!’

    특히나 사람을 고용해서 광신도로 보이게 하자는 의견을 냈던 벨로트가 제일 똥줄이 탔다. 한 감옥 안에 사이좋게 다 같이 수감된 터라, 그는 다른 동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위장이 나날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알렉, 알렉이라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 사람이라면 아벨 님께 우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지도 몰라!’

    헛된 기대임을 그만 몰랐다. 며칠 새 알렉은 에덴의 배신자가 되어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고, 세비어 장로가 눈에 불을 켜고 알렉을 죽이러 쫓아다니고 있었지만, 감옥 안이니 소식이 느려 들을 수 없었다.

    “전지전능한 우리의 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이 시련의 늪에서 저희를 꺼내 주시옵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풀려나기를 바라며 외는 기도문뿐이었다. 그것마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외는 기도문이 감옥 안을 울렸다.

    ***

    한편, 교단이 소식을 접했으니 에덴에도 이 사건이 전해졌다. 아벨은 곧 심기가 뒤집혀 세비어 장로와 알렉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부수고 다녔다.

    “세비어! 알렉! 어디 있지? 당장 나와!”

    “아, 아벨 님. 제발 진정하시고 우선 수습을…….”

    그나마 아벨을 말리려던 한 사제 하나가 있었지만, 분노로 눈이 돌아 버린 아벨에게는 한낱 벌레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요동치는 푸른색의 성력이 무자비하게 그 사제를 내쳤다. 벽으로 밀쳐진 사제는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

    “일을 이딴 식으로 꼬아 버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지?”

    아벨이 지나가는 곳마다 바닥과 벽이 움푹 패었다. 분노를 해소하겠다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일삼은 탓이었다. 남아 있는 세 장로들도 아벨을 막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공포에 떨었다.

    “나와! 나오란 말이다!”

    아벨이 친히 세비어와 알렉의 방으로 가 봤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알렉의 방은 깨끗이 빈 것이 도망쳤음을 짐작할 수 있어 더욱 그를 분노케 했다.

    “이 새끼 어디 갔어.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놈이라고 경고까지 했거늘, 세비어는 또 어디로 간 게야!”

    알렉의 방이었던 곳을 완전히 헤집어 놓으며 아벨이 다른 사제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장로 중 하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은밀하게 나가서 자세한 정황은 모르오나, 세비어는 그 배신자를 추격하러 나간 것 같습니다. 휘하의 직속 사제들도 데려간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만…….”

    “다만?”

    “그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데리고 간 사제들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하하……. 그 새끼도 튀었나?”

    욕설을 쏟아 내며 아벨이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어른으로 변했다. 흉흉한 검붉은 안광을 빛내며 그가 이를 갈며 말을 뱉었다.

    “비상 상황을 선포한다. 지금부터 에덴의 소속 사제들은 외부로 나가 배신자들을 잡는 일에 협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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