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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08화 (108/166)
  • 108화

    ***

    다음 날, 데니스는 일찍 입궁하여 황태자를 만났다. 이제는 미운 짝꿍 같은 아슬란도 마찬가지였다. 베네딕트는 데니스의 인사도 받지 않고 다짜고짜 알렉의 신변이 무사한지를 물었다.

    “괜찮은 것인가? 후작이 심은 그 첩자는?”

    “많이 궁금하셨나 보군요. 황태자 전하.”

    “사실상 이 판의 희비를 가를 히든카드인데, 당연히 생사가 궁금하지. 그래서, 살아있나? 빨리 좀 알려 주게.”

    마치 덩치 큰 개가 간식을 달라고 조르듯이 베네딕트가 데니스에게 답을 달라고 징징거리고 있었다. 데니스는 황태자의 우는 척이 보기 싫어 바로 답을 내놨다.

    “무사합니다. 예정보다는 이르긴 하지만, 어젯밤 무사히 에덴을 탈출하여 성력 증진제 사건의 증인들과 함께 안전한 곳에 두었습니다.”

    “예정보다는 일렀다고……. 귀중한 증인을 잃을 뻔했던 게로군?”

    장난스러운 모습과 다르게 베네딕트는 허술하지 않았다. 그는 단번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수 있었는지를 파악했다.

    “예. 그래서 저희 가문의 기사단원 중 가장 정예를 뽑아 그들을 호위하게 했습니다.”

    “아니지. 가장 검술을 잘하는 이들은 후작부인에게 붙어 있을 것 아닌가. 두 번째로 잘하는 이들이 붙어 있겠지.”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것을 콕 집어 이야기하는 게 약점을 찾아 좋아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 해맑은 짓궂음에 데니스는 끼고 있는 안경을 한 번 추켜올렸다.

    “어쨌든 일이 모두 수월하게 풀리고 있습니다. 무사히 성력 증진제에 관한 재판을 열어 승리하고, 에덴의 근거지를 찾아 습격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좋은 소식이로군. 에덴을 찾아내는 건, 아무래도 재판과 병행하는 것이 좋겠지?”

    옆에 있던 아슬란이 끼어들었다.

    “그렇다고 봅니다. 에덴의 소속원들을 도주의 우려 없이 전부 잡아들이려면, 우선 전하의 허가 아래 비공식적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됩니다.”

    “공작은 어릴 때부터 북부에서 군사를 통제하느라 그 방면으로 식견이 높지. 공작의 말을 믿겠네.”

    “황공하옵니다.”

    베네딕트는 절도 있게 인사를 올리는 아슬란을 보고 조금 혀를 찼다.

    “그나저나 공작, 괜찮은가? 황태자비를 뽑는다고 한 연회에서 결국 자네만 이미지가 완전히 나빠졌던데.”

    연회가 파한 이후 황태자의 지지도는 올라갔다. 비록 황태자의 안주인 자리를 낚아채지는 못했어도, 그것을 빌미로 베네딕트를 낮춰 보는 이는 없었다.

    루스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지펠론 백작에게서 학대받은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여론의 동정을 샀고, 무고한 이미지를 씌워 줬기 때문이었다. 정의 구현을 했다는 당찬 모습도 사교계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아슬란은 그의 발언 중 그 어느 것도 연기였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평판은 실시간 수직 낙하를 달리고 있었다.

    더는 완벽한 선망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지만, 아슬란은 정말 괜찮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괜찮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괜찮기는. 그 일로 선대 윈체스터 공작부인께서 짐 싸 들고 북부로 먼저 떠나셨다고 들었네. 듣고 싶지 않아도 수도 귀족들이 어찌나 그 이야기를 수군거리던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어머니와의 일은 제가 해결할 과제이니,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괘념치 않습니다.”

    이것으로 지난날 루스벨라의 마음에 상처를 줬던 것이 조금이라도 속죄가 된다면, 그는 몇천 번이고 다시 그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할 수 있었다.

    친구인 다니엘 크렌베르가 드물게 화를 내며 그의 멱살을 잡아도 괜찮았다.

    “너 미쳤어? 네 어머니께서 너를 어떻게 키우셨는데 그런 짓을 해?”

    “내 마음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옳았다. 토 달지 마라.”

    “이런 꽉 막힌 자식한테 누가 헛바람을 불어넣은 건지……. 지금이라도 정정해. 연회에서 한 말, 그거 다 헛소리였다고.”

    “그렇게는 못 한다.”

    “왜 안 되는데? 아, 혹시 데벤테르 후작부인이 네게 복수하겠다고 시켰어? 그 여자가 그래?”

    그 말에 아슬란은 잠시 이성을 잃고 다니엘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다니엘은 그의 미련한 곰 같은 친우가 설마 그를 공격할 줄은 몰랐기에 더욱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녀는 무고하다. 모든 건 내 스스로 내린 결정에 의한 일이었어. 그녀를 욕되게 하지 마라.”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하하……. 정말 뒤늦게 후작부인을 사랑하기라도 해? 너, 그런 놈 아니었잖아.”

    아무 관심도 없던 주제에 인제 와서 가련한 척해 봤자 네게 돌아오는 것이 뭐가 있다고.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실 아슬란이 그가 공들인 명예의 탑을 스스로 부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야, 이까짓 것이야.’

    아슬란은 데니스에게 고마웠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라고 찾아 준 기억이 아니었다면, 아슬란은 아직도 쓸데없는 체면에 고집을 부리며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지금은 후련했다. 큰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죗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불편함이 없었다.

    “공작이 괜찮다면야 더는 물어보지 않겠다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게. 사교계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또 다른 각축장이기도 하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아슬란은 스스로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는 설사 추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다른 이들에게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그의 업보는, 그만이 감당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

    불편한 대화가 마무리된 후, 세 사람은 다가올 재판을 대비한 변호사 선임과 에덴을 습격할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관건은 꼭꼭 숨겨진 에덴의 본거지였다.

    “후작, 그 알렉이라는 첩자를 통해 에덴의 위치는 파악했나?”

    “외출권은 있었지만,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거 큰일이군. 증인이 있더라도 위치를 알아야 쳐들어가든 말든 할 텐데.”

    고심하는 베네딕트를 향해 한 박자 쉬고 데니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설프게 에덴의 실제 위치가 어디인지 캐려다가 죽으면 끝이니까요. 다행히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장치를 놓고 왔습니다.”

    “오! 그게 무엇인가?”

    “알렉과 소통용으로 쓰던 통신용 마도구입니다. 마탑에 맞춤 제작을 의뢰하여 만든 것이라, 하나를 잃어버리면 쉽게 찾을 수 있게 추적 마법을 설정해 두었습니다.”

    에덴은 보안에 철저하다. 그러니 추적 마법이 걸린 물품들은 모두 반입할 수 없었다. 실상 사제들은 변형된 마력의 소유자였으므로, 아벨이 나서지 않더라도 숨어든 쥐새끼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탐지를 하면 다 잡혔을 텐데?”

    “특별히 탐지가 되지 않도록, 평소에는 추적 마법이 발동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다른 쪽 마도구를 쥐고 신호를 보내면 그제야 추적이 가능해지죠.”

    추적 마법을 껐다가 켤 수 있는 기능은 굉장히 유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데니스는 아예 루스벨라에게도 혹시 몰라 비슷한 종류의 아이템을 챙겨 줬다.

    “자네는 정말……. 아주 철두철미하군?”

    베네딕트가 놀랍다는 감정을 넘어 조금 질린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그런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마도구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필시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데벤테르 후작가의 재력을 새삼 실감하며 베네딕트는 입맛을 다셨다.

    “그거, 일이 다 끝나면 황실 마법사들에게도 보내 주지 않겠나? 분해해서 기술 좀 훔치고 싶은데.”

    일국의 황태자라는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는 모습은 그가 제국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었다.

    “안 됩니다. 마탑에 정식으로 기술 공유 요청하고 개발하시죠. 특허 침해했다고 소송 걸리고 싶지 않습니다.”

    “에잉, 쯧. 공작도 그렇게 생각하나?”

    “……소신은 에덴을 징벌할 사병이 넉넉한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만히 업무에 집중하던 아슬란에게 불똥이 튀었다. 베네딕트의 편을 들어 달라는 간절한 눈빛 공격을 피하려 궁여지책을 낸 것이다.

    “됐네, 됐어. 공작은 영 발랄한 맛이 없구만.”

    툴툴거리던 베네딕트를 보며 데니스와 아슬란은 같은 생각을 했다.

    ‘참……. 철이 없어 보이는데 하는 행동이나 추진력을 보면 군주감으로서는 괜찮단 말이지.’

    베네딕트가 현 황제처럼 에덴의 술수에 홀라당 넘어갈 바보였거나, 영 못마땅한 위인이었다면 그를 지지하지 않았을 텐데. 능력은 좋은데 인성에 살짝 나사가 빠진 황태자를 보며 두 사람은 웃는 듯 우는 듯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됐고, 후작. 그 추적 기능을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가?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아 둬야 공작이 공략할 전술을 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지금 켜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데니스가 주머니에서 흰색의 오카리나처럼 생긴 통신용 마도구를 꺼냈다. 그 위의 버튼 하나를 누르자, 빛으로 만들어진 제국의 지도가 떠오르더니 한 지점에 빨간 점이 찍혔다.

    ‘빨간 점이 찍힌 장소가 남은 한쪽이 있는 위치니까……. 어?’

    “……잠깐만.”

    “이……. 이거 에덴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지? 후작?”

    “맞습니다만……. 등잔 밑이 어두운 줄은 몰랐군요.”

    아슬란과 베네딕트, 그리고 데니스는 빨간 점이 위치한 장소를 보고 탄식했다. 에덴은, 그 위험천만한 괴물인 아벨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있었다.

    “설마하니 황궁 밑에 있을 줄은 몰랐지.”

    에덴의 위치는, 황성이었다. 그것도 황궁 밑의 지하에 자리했다. 몇백 년간, 제국의 역사와 함께한 것이 기가 막혀 베네딕트는 헛웃음만 뱉었다.

    “하하……. 어떻게 이걸 모를 수가. 이래서야 초대 황제조차 이 발칙한 자들과 공모해서 나라를 세웠다고 해도 놀랍지 않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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