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하나도 안 들리잖아.”
유감스럽게도 데니스가 준 통신용 마도구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샐 염려가 없는 안전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에덴 내의 방음은 쓸데없을 정도로 잘되어 있었기에 그는 별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다.
‘아벨 님께서 전에 말한 게 굉장히 걸려서 왔는데……. 소득이 하나도 없군.’
뒤늦게야 세비어는 알렉에게서 구린 냄새를 맡았다. 알렉과 같이 마셨던 데벤테르 후작가에서 나온 술도, 알렉이 외출권을 사용해 꼬박꼬박 밖으로 나가는 것도 다 수상쩍게 느껴졌다.
“특히나 그 술…….”
세비어가 처음 성력 증진제를 접하게 된 것은 그 술이었다. 알렉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지만, 만일 에덴의 존재를 까발리기 위해 들어온 이물질이 알렉이라면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사제나 주교는 자르면 그만이다. 파면시켜서 우린 저 인간들을 모른다고 잡아떼면 되니까.
‘하지만 나는 장로야. 그것도 이 에덴을 받치는 네 명의 장로 중 하나라고.’
가장 신임을 못 받는 장로이기는 하나, 고위직인 장로마저 성력 증진제에 홀라당 넘어갔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잃을 것이 많은 인간인 세비어는 두려웠다. 동시에 살아남을 구멍을 찾고자 발버둥 쳤다. 심각하게 도망칠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가 아벨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는 결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그것에 대한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세비어 대신 아벨의 손에 죽임을 당할 자를 구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벨이 조심하라 경고도 했고 심증상 첩자로 의심되는 알렉의 자백을 받아낸다든지.
“그걸 위해서 왔는데, 이러면 앞으로 힘들어진다고.”
세비어는 엄지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어 가며 자기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핏물이 나올 정도로 세게 물었다.
알렉에게 말한 것처럼 세비어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사제들을 체포한 황실의 연락이 닿는 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역시 고문하는 게 좋겠어. 그러면 알고 있는 걸 다 불겠지.”
설령 알렉이 무고하다고 한들, 자백을 받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세비어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죄의 유무가 아니라, 그를 대신에 아벨에게 쥐어 터질 희생양이었다.
세비어는 결심을 마치고 보석함에 고이 모셔 뒀던 성력석 부스러기를 꺼냈다. 그리고 밧줄과 수면제 따위도 챙겼다.
“난 옳은 선택을 하는 거야……. 이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세비어는 알렉을 잡으러 통로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에덴의 일원이니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에는 익숙했다. 알렉이 죽는다고 해도 그의 가문에 둘러댈 핑곗거리도 이미 마련해 두었다.
“알렉, 거기 있나? 내 잠이 안 와서 꽤 괜찮은 술을 가지고 왔네. 한잔하지.”
술에는 수면제를 타뒀다. 마시면 바로 고문실로 끌어갈 생각이었다.
“……알렉? 벌써 자고 있나?”
하지만 방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벌써 잠들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혹시?’
불길함에 세비어는 즉시 문을 신성력을 사용해 억지로 열었다. 문짝이 뜯어졌다. 재빨리 방으로 들어왔지만, 불은 꺼져 있었고 알렉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방 구석구석을 둘러봐도 짐을 뺀 흔적이 역력했다.
“하. 하하……. 내가 등신이었구나.”
무섭도록 상황 파악이 금방 이루어졌다.
알렉은 도망쳤다. 세비어가 긴가민가하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빠져나간 것이다.
세비어는 곧바로 알렉을 잡기 위해 그 밑의 직속 사제들을 다 불러 모았다. 아벨이 눈치채지는 못하도록, 은밀하게.
“부르셨습니까, 세비어 장로님?”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어리둥절하여 묻는 사제들에게 세비어는 분기탱천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
“당장, 당장 알렉을 잡아 와! 놈이 배신자다. 얼마 못 벗어났을 테니 지금 당장!”
***
“헉, 허억.”
‘그래도 단명할 팔자는 아닌가 봐……!’
알렉은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세비어는 그가 얼마 못 벗어났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는 데니스가 안내해 준 마법사와의 접선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낌새가 이상하니 당장 빠져나갈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한 게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어.’
데니스와의 연락 후, 알렉은 괜히 찜찜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거기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통화를 마치고 잠시 문밖을 둘러보니 세비어 장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미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오싹했다. 마치 엿듣기라도 하려던 것 같아서 알렉은 데니스에게 재차 연락을 걸고, 황급히 짐을 쌌다. 챙겨 갈 것이 많지 않은 것 또한 행운이었다.
“세비어 장로가 느낌이 좋지 않아요. 아무래도 일정을 앞당겨서 지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네가 그렇다면야, 들어주지. 장소까지 무사히 나오길 바란다.]
“당연히 그래야죠! 잡히면 죽음인데!”
알렉은 무서움을 이기고자 데니스에게 꽥 소리를 지르고 바로 외출권을 사용해 탈출했다. 써먹은 핑계는 아벨이었다. 다시 시종 일을 하여 외부로 심부름을 나가게 되었으니 빨리 보내 달라 문지기에게 요청한 것이다.
에덴 내에서 신인 아벨의 뜻을 거스를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문지기는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결국 알렉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알렉은 마차를 잡아끌고 수도로 향했고, 지금은 폐가 터져라 달리고 있었다.
‘잡히면 진짜 죽는다. 진짜! 죽어!’
아닌 게 아니라, 알렉의 도주를 알아챈 세비어가 직속 사제들을 데리고 무서운 속도로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알렉도 그걸 알아서 미친 듯이 달렸다. 다리 근육이 터질 듯이 아팠지만 참았다.
“아, 여깁니다!”
“헉, 허억! 제, 제가 알렉입니다! 마법사님!”
지정한 장소가 코앞에 보이자 데니스가 말한 인상착의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이동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마탑의 고위마법사를 상징하는 로브에 알렉은 절로 신에게 감사 인사를 날렸다.
“바로 이동합시다.”
“예. 제발요. 빨리!”
마법사가 이동진을 발동시켰다.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들의 몸이 흐려질 때였다.
“이 개쌍놈의 새끼가. 감히 나를 속이고 아벨 님을 능멸하려 해? 지옥에 가서 사지가 찢어져도 모자를 새끼가!”
걸쭉한 욕설을 퍼부으며 한발 늦게 세비어와 직속사제들이 도착했다. 세비어가 급히 신성력을 이용해서 이동마법진을 파훼하려고 했지만, 때는 늦었다. 마법 술식을 깨 버릴 황금 시간대가 지났기 때문이었다.
사라지기 직전, 알렉은 그동안 에덴에서의 두려웠던 나날과 고생을 떠올리며 세비어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었다.
“누가 진짜 개쌍놈의 새끼인데? 만나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맙시다. 안녕!”
“야! 거기 안 서? 야!”
세비어가 신성력을 작은 침 같은 형태로 만들어 쐈으나 알렉과 마법사는 사라졌다. 애꿎은 길바닥 위로 공격이 꽂혔다.
“아악……. 아아아아아악!!!”
세비어는 한동안 절규를 토해 내다가 시뻘게진 눈으로 직속 사제들을 쳐다봤다.
“내가 일을 그르쳤다. ……면목이 없다.”
잠을 자다 끌려 나온 세비어 휘하의 직속 사제들은 침묵했다. 배신자를 제때 잡아내지 못한 장로의 죄는 컸다. 조금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를 구하려는 사제는 없었다. 얽히면 그도 죽음뿐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까요?”
“아니. 난 살고 싶거든.”
“무슨……. 억.”
푸른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침이 직속 사제들에게 쏘아졌다. 방심하고 있던 탓에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 이들은 심장에 침을 맞고 비틀거렸다.
“아직 덜 죽었군. 미안하지만 죽어라.”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난 살고 싶다. 아벨 님께 돌아가면 곱게 죽지 못한다는 거, 알고 있어.”
그러니 목격자인 너희들이 죽어 줘야겠다.
“내 탈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아벨 님께서…….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의 죽음을 방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확인 사살용으로 세비어가 더 많은 신성력 침들을 쏟아 내는 가운데서도 직속 사제 중 한 명이 피를 토해 내며 말했다. 충성스러운 아벨의 개들을 바라보며 세비어는 비뚤게 웃었다.
“아니지. 아벨 님께서는 너희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취급하지 않아. 그저 말을 잘 듣는 하등생물일 뿐이지. 그분은 틀림없이 그 자신의 소망이 꺾이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해 움직이실 것이다.”
난 그분의 발자국에 짓눌려 죽고 싶지 않을 뿐이야.
“크어억.”
“잘 가라. 아벨 님을 신으로 섬겼으니 너희들에게 천국은 없겠지.”
마지막 숨까지 끊어 놓고서 세비어는 로브를 두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알렉에 대한 복수심을 끓이면서.
“내가 기필코 네놈만은 저승길 동무로 삼아 주겠다.”
세비어는 알렉을 죽여 버리겠다는 각오를 품고 수도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알렉은 무사히 데벤테르 후작가가 준비한 안전 가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가짜 광신도로 위장했던 사람들도 모여 있었다.
“아, 오셨군요!”
데니스와 루스벨라도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동안 알렉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이건 당연히 갖춰야 할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야, 알렉.”
“반가워요, 알렉. 저번에 만난 이후로 처음이네요.”
“후작님, 그리고 후작부인……. 살아서 얼굴을 뵐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흐흑.”
고용주와 통신용 마도구가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한다는 사실에 알렉은 감격했다. 실컷 달리느라 옷가지에 밴 땀 냄새조차 향기롭게 느껴졌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긴장이 풀린 알렉은 오열했다. 살아남았다는 기쁨의 눈물을 본 루스벨라가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해바라기가 자그맣게 자수로 놓인 손수건이었다.
“이거, 쓰세요.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킁! 후작부인…….”
알렉은 울먹거리며 거기에 코를 팽 풀었다. 루스벨라의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
‘저 손수건은 그냥 주는 게 낫겠다…….’
받자마자 거기다 코를 풀 줄은 몰랐기에, 루스벨라는 빨아서 주겠다는 알렉의 청을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서 거절했다.
뒤에서 알렉을 데려온 마법사가 데니스에게 보고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장로와 사제들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잡아서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저희 둘 다 죽었을지도 몰라요.”
“고맙습니다. 마탑의 마법사. 약속대로 그대가 원한 보수는 두둑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돈 이야기에 알렉의 눈이 번뜩였다.
‘맞아! 나 살았지!’
내 돈! 나의 소중한 의뢰 완수금과 보너스!
“저 수당 많이 챙겨 주셔야 합니다, 고용주님. 아시죠? 저 진짜 막판에 고생 많이 한 거. 이자까지 쳐서 주시면 제가 감사히 받아 알뜰히 쓰겠습니다.”
알뜰히는 무슨, 입금만 되면 바로 거하게 돈 쓸 생각인 것이 눈만 봐도 티가 확 났다.
“그래. 목숨값이니 많이 쳐주지.”
“감사합니다! 어……. 혹시 정확히 얼마인지도 들을 수 있나요?”
“귀 좀 대 봐.”
데니스가 알렉의 귓가에 그가 수령할 금액을 말해 줬다. 알렉은 바로 뚝 울음을 그치더니 이번엔 얼굴이 환하게 폈다.
“지, 진짜죠? 그거 뻥 아니고 저한테 일시불로 주시는 거 맞죠?”
“물론이지.”
“고용주님은 천사십니다. 역시 그 광신도 놈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알렉은 신이 나서 마음껏 데니스를 찬양했다. 그 모습에 뒤에 있던 가짜 광신도 역을 맡았던 사람들도 웃음이 터졌다.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다가오는 마지막 결전이 무섭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