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알렉은 세비어 장로의 불안함이 달갑지 않았다. 항시 여유롭고 능글맞던 사람이 초조하게 굴면서 다른 사람을 찾는다는 건, 필시 좋지 못한 일을 떠안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짐작이 가는 일이 너무 뚜렷해서 큰일이지.’
세비어 장로의 근심을 늘릴 일은 최근 성력 증진제 사건밖에 없었다. 세비어도 그것을 복용했고, 그 외에도 증진제에 당한 사제는 많았다. 그의 주인이자 신인 아벨의 심복들을 알렉과 데니스가 망쳐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장로님.”
“고맙네.”
불안했다. 하지만 안으로 아예 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호랑이를 굴속에 들이는 마음으로 알렉은 세비어 장로에게 앉기를 권했다.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역시 그런가……? 최근 걱정거리가 늘어서 말일세.”
세비어 장로는 아벨이 에덴의 사제들에게 내리는 축복 덕에 멀끔한 20대 청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력 증진제 사건으로 인해 마음은 폭삭 늙은 탓인지 보이지 않는 주름살이 늘어난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알렉은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세비어 장로를 떠봤다. 아직 에덴 내부는 조용했다. 아벨이 알았다면 진즉 피바람이 불었을 내부는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 평화도 이제 얼마 안 남았지만.’
에덴은 현재 폭풍 전야나 다름없었다. 눈치 빠르고 예민한 아벨도 그 분위기를 감지해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으니까.
“그게…… 실은……. 골치 아픈 일이 터져서 말이지.”
“뭡니까, 그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대꾸하던 세비어에게 알렉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불안함에 주위를 살피던 세비어는 겨우 속내를 드러냈다.
“성력 증진제라고……. 웬 상단에서 그것을 판매했는데, 하필이면 그 포션을 먹고 뿔이 난 사제들이 항의하러 갔다가 사고를 쳐 잡혔다지 뭔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능구렁이 할아버지야.’
데니스가 이미 설명을 다 해 줬기 때문에, 놀라는 척을 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들의 자업자득이었다.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면서 잘될 거라고 보는 게 더 어려웠을 텐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저런.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붙잡혔다는 게 공권력에 의한 것이라면, 교단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습니까.”
알렉이 짐짓 슬픔과 걱정에 잠긴 목소리를 내자 세비어 장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나 말이네. 하필이면 장소가 좋지 못했어. 황족이 있는 자리에서 추태를 부렸으니 빼내기도 쉽지 않지.”
역시 죽여야 하나.
마지막 문장은 소리를 죽여 말했지만 그 어떤 말보다 똑똑히 들렸다. 소름 끼쳤다. 팔뚝에 일어난 닭살이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게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같은 편도 거치적거리면 바로 죽일 태세라는 게 무서웠다. 억지로 웃음을 유지하며 알렉은 대화를 이어 갔다.
“그자들이 무슨 일을 벌였길래 장로님께서 그렇게 당혹스러워하십니까?”
알렉의 말에 세비어 장로는 잠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얼굴에 뭐가 묻은 것도 아니었는데. 알렉은 지레 놀라며 혹 식사 이후 입가에 미트볼 소스라도 묻었는지 손을 들어 더듬어 봤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하필이면……. 그들이 사람을 고용해 그 성력 증진제를 만들어서 판 데벤테르 후작 부부를 살해하려 했다는군. 큰일이야. 정말.”
사제들이 사람을 죽이려던 것이 큰일인지, 아니면 데니스와 루스벨라를 죽이지 못한 것이 큰일인지 명확히 지칭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렉은 데니스가 주기로 한 의뢰금 전부를 걸어서라도 좋으니 그가 후자를 가리켰다고 확신했다.
“무려 황족의 연회에서 그랬다면, 황족 시해 죄까지 의심받겠군요.”
“그래. 이미 붙들려서 심문을 받고 있으니 곧 교단에도 정식으로 황실의 항의 서한이 전해질 거야. 그것만은……. 그것만은 아니 돼. 그랬다가는…….”
세비어 장로의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허옇게 질렸다. 상상만으로도 질릴 만했다.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었다.
‘아벨이 장로를 용서치 않을 거야. 물론 그 붙잡힌 사제들도.’
그가 대체품, 성력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에덴의 소속원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소식은 절망에 가까웠다. 결과를 내지는 못할망정 일을 엉망으로 그르쳤다.
폭군과도 같은 신인 아벨에게 자비 따위는 없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들이 거짓 종교로 내세운 현 제국의 국교는 자비와 사랑을 가장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데.
진짜 신이 되고자 하는 괴물은 실패를 저지른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내칠 것이다. 영원한 안식을 그들에게 줌으로써.
“어떻게 하지? 알렉, 자네는 뭐 생각나는 거 없나? 아, 아벨 님께 소식이 들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하네. 방법이, 방법이 없을까?”
어지간히도 궁지에 몰렸는지 별안간 세비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며 알렉에게 매달렸다. 알렉이 해 줄 말이야 정해져 있었다.
“아직도 저는 고작 에덴의 수습 사제에, 최근 아벨 님께서도 심기가 불편하신지 저를 곁에서 내치신 것을요. 저 또한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표면적인 알렉은 그가 한 말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차라리 세비어 장로가 이럴 시간에 짐이라도 싸 들고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런가……. 자네도 역시 그렇단 말이지.”
“네. 죄송합니다. 장로님. 저를 믿고 찾아와서 상담하신 것일 텐데…….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하네요.”
“아니지. 내 불찰이지. 미안하네.”
손을 휘휘 저으며 잔뜩 어깨가 수그러든 세비어는 위태로워 보였다. 알렉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걱정하는 척하며 그를 위로했다.
“그래도 장로님께서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떻게 장로님과 별 연관도 없는 사제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근심하실 수가 있으신지. 외부 사제들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으응? 아아……. 안팎을 돌봐야 하는 게 장로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않나. 허허.”
아부를 좀 던지자 찔리긴 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세비어가 머리를 긁적였다. 알렉은 제발 이 인간이 어서 자기 방에서 나가 줬으면 했다.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겠지. 세비어도 성력 증진제를 사용했으니까, 아벨이 작정하고 이 잡듯 뒤지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알렉은 그 피의 숙청이 도래하기 전에 빠져나갈 예정이었다. 데니스가 그를 구하러 와 줄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로님. 언제나 아벨 님을 걱정하고 힘이 되려는 장로님께까지 피해가 미치겠습니까.”
미칠 것이다. 모가지를 분질러 버릴 만큼.
세비어의 미소가 곰팡이 핀 음식물쓰레기를 먹은 것처럼 썩어 들어갔지만, 그는 끝내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 그렇지.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그렇죠? 그럼 이제 그만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배웅해 드려도 될까요?”
“그……. 물론이지.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아 미안하네.”
세비어는 곧 일어나 알렉의 방을 나갔다. 알렉은 다시 홀로 있게 된 방 안에서 겨우 마음을 놓았다.
‘뭔가 이상해. 굳이 나한테 저 이야기를 한 까닭이 없지 않을 거야.’
아까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세비어는…… 마치 알렉에게 무언가 해답이 있을 것처럼 구는 태도를 보였다.
‘정보가 샌 건 아닌 것 같고……. 아벨인가?’
아벨이 독단적으로 에덴을 뒤지고 있었다. 세비어 장로의 지시가 있어서 다들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곧 그것도 한계가 오고 있었다.
세비어 장로든, 수도에서 사건을 만든 그 망할 사제들이든 아벨에게 최후를 맞을 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벨이 가장 큰 변수야. 그가 무언가 눈치채서, 그래서 세비어 장로가 날 의심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몸을 피하는 게 좋겠어.’
알렉은 생각을 정리한 즉시 다시 통신용 마도구를 꺼냈다. 데니스에게 연락을 걸었다.
[무슨 일이지? 아까 용건은 다 끝났을 텐데.]
데니스의 음성이 들렸다. 알렉은 다급하게 방금 전의 일을 설명했다.
“뭔가 심상치 않아요. 고용주님. 세비어 장로가 저에 대해 수상함을 감지한 것 같아요.”
[근거는?]
“……직감이고, 관찰에 의한 제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고 봅니다.”
[그렇단 말이지…….]
“빨리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기 있다가는 목숨이 아홉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증인, 그거 필요하다고 하셨죠? 저 좀 데려가 주세요, 제발.”
끝에 가서 알렉은 데니스에게 거의 애원조로 탈출을 소망했다.
직감은 때로 경험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위험을 알려 준다. 데니스는 알렉의 말이 영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태로운 첩자의 상황에서, 그가 세비어에게 그런 불길함을 느꼈다면 들어줘야 마땅했다.
‘거기에 증인으로 딱 적격인 인물이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아. 마지막으로 외출권을 써서 밖으로 내일 당장 날이 밝으면 나가. 접선 장소를 알려 줄 테니 그곳에서 내가 보낸 마법사와 만나 이동해라.]
“정말이지요……! 무르기 없습니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알렉은 뛸 듯이 기뻤다. 방방 뛰다가 소리를 죽이기 위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터지는 환호를 참았다. 광신도의 구역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내일이면 해방이야. 해방! 신난다!’
알렉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풀 죽은 채 돌아간 줄 알았던 세비어 장로가 필사적으로 알렉의 수상함을 포착하기 위해 문에 귀를 대고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