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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05화 (105/166)

105화

[쇼맨십이 화려하구나. 계약자야.]

‘이 정도는 해야 다들 집중하지 않겠습니까.’

데니스는 씨익 웃으며 벨로트의 막대기 같은 검을 내리쳤다.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했던 탓인지, 벨로트의 푸른 검은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벨로트도, 앉아 있던 귀족들도 그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나 벨로트는 혼란스러움으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어, 어떻게? 데벤테르 후작이 신성력을 운용할 줄 아는 것이지?’

그것도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빛깔의 신성력을, 신전과 아무 연관도 없는 일반인이 쓰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벨로트는 잠시 휘청거렸다.

“데벤테르 후작…… 당신은 정체가 대체 뭡니까?”

벨로트의 말은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데니스는 그에 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내가 그걸 네놈에게 알려 줄 이유는 없지.”

“당신도 설마 우리의 신을 섬기는 존재라면……!”

벨로트의 말에 한순간 데니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주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진 표정은 여유롭던 베네딕트 황태자마저 섬뜩함에 움찔하게 만들었다.

“너는 나를 모욕했다. 이미 죄인이라 봐줄 것도 없었지만, 적극적으로 신성력의 시범을 보여 주도록 하지.”

[너무 날뛰지 말아라. 그러다 죽을지도 모른다.]

데니스의 머릿속 신의 파편이 그를 타일렀다. 데니스의 분노 스위치가 눌린 것을 경계하는 어투였다.

‘귀중한 증거니 목숨은 붙여 놔야지요.’

[사지도 멀쩡해야 한다. 더는 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았더냐.]

‘……알겠습니다. 그것만은 지켜야지요.’

데니스는 넓은 회의장 안에서 빠른 속도로 벨로트의 앞까지 도달했다. 무장들이 보고 감탄을 터트렸다.

“윽!”

공격이 들어왔다. 검에 둘린 붉은 신성력은 무자비하고 살벌하게 느껴졌다. 뺨에 불길이 와 닿는 것처럼 뜨거웠다.

‘막아야 한다!’

아벨의 심복이라고는 하나 현 제국은 평화의 시대였다. 사람을 은밀히 죽이는 일은 새 ‘대체품’을 구할 때나 행하던 일이라, 실전에 무뎌진 벨로트의 행동은 굼떴다.

간신히 방패와 비슷한 형태를 신성력으로 구현했지만, 그것마저도 데니스의 일격에 부서져 빛으로 흩어져 버렸다.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나?”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

데니스가 고양이라면, 벨로트는 쥐와 같은 형국이었다. 힘의 격차는 명확했고, 싸우는 기술의 차이마저 현격했다.

벨로트가 신성력으로 방패를 만들어도, 데니스는 금방 그것을 부쉈다. 차츰차츰 벨로트는 뒤로 밀려났다. 등에 벽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끝이다.”

“아, 안 돼……!”

데니스가 검을 높게 치켜들자, 벨로트는 그의 검을 향해 최대한의 힘을 쥐어짰다. 푸른 보석 알갱이의 빛이 희미해졌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짠 신성력은 데니스의 검을 향해 번개처럼 쏘아졌다.

툭. 데구르르.

데니스의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어, 어떻게……. 이건 우리만이 알고 있는 정보일 텐데……!”

벨로트의 목에는 검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온전히 붉은 기운으로만 만들어진, 아름다운 빛의 검이.

“이것이 신성력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보셨습니까?”

데니스는 벨로트의 물음은 무시하고 좌중에 물었다. 다들 얼빠진 눈빛으로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공격과 방어, 치유까지 가능한 힘이 신성력이었다니.”

“주교라는 자가 저 푸른색의 보석 알갱이를 가지고 힘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소. 그거야말로 신성력이라는 명백한 증거겠지.”

“하지만 어떻게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지? 저게 진짜 신성력이라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한 번쯤은 나타나야 했을 터인데?”

회의장은 다시 수많은 추측과 의문으로 시끄러워졌다. 베네딕트는 앉아 있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다들 조용히 하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세.”

데니스와 아슬란도 황태자의 일갈에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문제의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지금 저희가 맞닥뜨려야 할 상대는 오직 하나, 에덴이란 단체입니다.”

“궁금증은 나중에 천천히 해결하시는 걸로 하시죠, 다들. 지금은 에덴을 조지는 것부터 서두릅시다.”

검을 든 청년이 둘이었다. 고작 두 사람이지만 기백은 이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 전부를 다 합친대도 부족하기는커녕, 그 이상이었으므로 다들 헛기침을 하며 동의했다.

“……알았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공작과 후작에게도 미안하오.”

“저희는 괜찮으니 황태자 전하께서 발언권을 주시는 것으로 질문을 받겠습니다.”

데니스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먼저, 그 에덴이라는 단체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이오?”

데니스가 벨로트를 향해 검을 살짝 흔들었다.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벨로트는 데니스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본 후 충격에 빠져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실토하려 했다.

“에덴은…… 저희의 수장인 아벨 님은…… 커헉.”

벨로트가 부들부들 떨며 말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경련 증세에 아슬란이 재빨리 그의 피를 짜내어 벨로트의 입에 처넣었다.

[금언을 걸어 놓았군. 더 말했으면 혀가 잘릴 뻔했어.]

‘아무래도 아벨에 관한 정보를 아군이 아닌 사람에게 누설하게 되면 발동되는 원리겠지요.’

[아주 사악한 주술이야. 신성력을…… 이런 식으로 개발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군.]

신의 파편은 아벨의 솜씨에 탄식하면서도 끔찍해했다. 데니스는 속으로 아벨을 욕하기만 했다.

“혹시라도 말을 못 할 상황을 대비해, 제가 미리 자백을 받아 놓은 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을 못 하면 쓰는 것으로 대체하면 그만이었다. 데니스는 밤사이 잡힌 사제들에게서 받아 낸 진술서를 토대로 회의장의 귀족들에게 에덴의 수장인 아벨에 대해 설명했다.

“아벨은 세상을 손에 넣어 제 뜻대로 부리길 원하는 지극히 오만한 인간입니다. 그는 몇백 년을 산 인간 아닌 인간이며, 가지고 있는 성력석이란 보석을 통해 신성력을 부릴 줄 압니다.”

데니스는 알렉으로부터 보고받은 정보를 정리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한 부씩 귀족들의 앞에 놓였다.

“그리고 신도들이 아벨에게 충성하는 까닭은, 그들 역시도 아벨처럼 생을 연장하고 살 수 있다는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네.”

베네딕트가 첨언했다. 그 자리의 모든 귀족들은 그제야 연회가 하나의 큰 쥐덫이었음을 깨달았다.

황태자비는 때깔 좋은 미끼에 불과했다. 이 기회로 황태자가 제게 신부를 바치려던 신하들이 누구누구인지는 미리 파악을 마쳤을 것이다. 더불어 어느 귀족들이 황후와 황태자를 두고 도망쳤을지도.

‘황태자 전하께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우셨을까.’

경각심에 바짝 기합이 들어간 귀족들은 데니스가 나눠 준 자료를 꼼꼼히 읽어봤다.

신성력,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수명을 사는 인간. 그리고 부리고 있는 신도들의 존재.

“설마…… 그 아벨이란 자는 진짜 신이라도 되겠다고 마음먹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아벨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이자, 욕망이지요.”

데니스의 대답에 다른 귀족들은 고작 작은 단체를 거느리는 아벨이 일을 얼마나 크게 벌일 수 있는가 의심하는 눈치였다.

“여러분은 아까 신성력의 세 가지 효과를 보셨지만, 이 외에도 다른 기능이 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뇌입니다. 아벨만이 쓸 수 있는 기능이기는 하지만요.”

“세뇌라면…….”

말을 하던 귀족의 머릿속에 윈블 자작 영애의 사건이 스쳤다. 괴이쩍게도 과도하게 흥분하며 광기를 드러내던 아슈라 윈블. 무언가 홀렸던 것처럼 딸이 단기간에 급격히 변했다던 윈블 자작 부부의 증언.

“혹시…… 윈블 영애 사건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까?”

조심스럽게 던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슬란이 했다.

“맞습니다. 북부의 가신들이 건국제 당시 윈블 영애에게 기이한 동조를 보였던 것 또한 세뇌에 의한 영향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을 원상태로 되돌릴 수는 있었으나, 조속히 에덴의 일원들을 검거하고 우두머리인 아벨을 구속해야만 합니다.”

아슬란의 말에 베네딕트가 손을 들고 데니스에게 질문했다.

“후작. 그렇다면 그들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 있나?”

“물론입니다. 제가 그곳에 심어 놓은 첩자가 한 명 있으니까요.”

알렉, 그의 역할이 이 지치고 기나긴 여정의 끝에 종지부를 찍어 줄 것이다.

***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어쩐지 귀가 가려워진 알렉은 귀이개로 귓속을 후볐다.

“심심하네…….”

데니스가 통신용 마도구로 이제 할 일은 다 마쳤으니,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용히 대기하라는 명을 내려서 알렉은 꼼짝없이 케이지 속 햄스터 신세가 되었다.

그의 가슴은 밤에 화장실을 가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해도 펄쩍 뛰는 수준의 새가슴이었지만, 여러 일들을 거치면서 단련된 탓인지 이제는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찌뿌둥해졌다.

‘생각보다 이런 일이 적성에 맞았던 건가?’

사제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량처럼 노는 게 좋아서 천성이 놀고먹는 백수가 딱이겠거니 해서 이 의뢰를 수락했는데, 뜻밖의 재미를 발견한 것 같았다.

‘우리 가족들은, 무사할까?’

데니스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지켜 준다고 했으니 별걱정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최근 아벨이 그를 시종 자리에서 내쫓은 것도, 세비어 장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도 불안했다.

만일 가족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알렉은 지금껏 해 온 첩자질에 대해 다 말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알렉도 그의 가족도 데니스와 루스벨라도 모두 몰살당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을 것이다.

‘그건 안 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

굳게 결심하고 심심함을 참으며 그의 방 침대나 뒹굴거리는데,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오늘따라 불길했다.

“누구십니까?”

“나일세. 알렉. 세비어 장로.”

세비어 장로의 목소리는, 유난히 불안정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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