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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04화 (104/166)
  • 104화

    ***

    황태자비를 뽑으려던 연회에서 광신도들이 날뛰었다는 소식은 그날 모였던 귀족들의 입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는 무사하신 건가?”

    “연회는? 황태자비를 뽑으려는 연회면 중대한 국가적 행사인데, 다시 열리려나?”

    무수한 의문과 혼란만을 품은 채, 귀족들은 혹시라도 그들에게 미칠 피해를 우려하여 문을 꼭꼭 닫아걸고 다음 날 아침 해를 맞이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황태자의 공식적인 사건 발표였다.

    “어제 황태자비를 뽑으려던 연회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지.”

    “예, 전하.”

    “사실 그 연회 자체도, 그리고 중간에 멋대로 난입한 광신도들마저 황실을 위협하는 적의 꼬리를 밟기 위한 미끼였다.”

    “예?”

    “그 모든 것이 함정이었단 말씀이십니까?”

    황후와 황태자를 지키기 위해 검을 빼 들었던 기사단장 둘이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사전에 전달받지 못한 사항이라 더욱 그랬다.

    “어째서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셨습니까?”

    “이 일을 털어놓기에는 아직 일러서 그랬네. 나도 잘 믿기지 않는 조직의 수괴라 확실해질 때까지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거든.”

    베네딕트는 데니스와 아슬란이 그에게 교단의 진실을 말해 주었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근간 중 하나가 무너지는 경험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았다.

    ‘제국민 중에 이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어. 신을 모시는 교단에 이런 엄청난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러므로 이번 사건의 수확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드디어, 아벨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낼 수 있는 계기를 획득했으니까.

    아벨이 숨어서 제국을 쥐락펴락할 계획을 짜는 것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머지않았으리라는 생각에 베네딕트는 희열을 느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국의 적이 대체 누구입니까?”

    “내 그걸 꼭 알리고 싶었지. 신전일세.”

    “……예?”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은 그들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제 살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어떻게 신전이 제국의 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외람되오나 전하, 신전은 그럴 능력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맞습니다. 신전이 신도들의 헌금으로 먹고산다지만, 감히 제국을 뒤엎을 만큼의 재력도, 군사력도 없습니다.”

    귀족들은 목소리를 모아 신전이, 제국의 교단이 나라를 전복시킬 수 없는 이유를 나열했다. 베네딕트 황태자는 그들을 심드렁한 눈길로 쳐다보며 귀를 후볐다.

    한 귀족이 그를 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전하, 그게 무슨 체통 없는 짓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경. 내 말도 다 들어주지 않고 안 되는 이유만 늘어놓고 있으니, 내가 심심하지 않고 배기겠나?”

    그 말에 발언하던 귀족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심심하다고만 한 황태자의 미간에는 은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말을 끊지 말게, 경.”

    “……송구합니다.”

    “교단 내에 우리가 전혀 모르던 조직이 도사리고 있었네. 그 조직의 이름은 에덴으로, 사실상 교단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단체였지.”

    회의장이 황태자의 발언으로 술렁거렸다. 제국의 역사는 수백 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제국민 중에 그 에덴이라는 단체를 아는 이가 없었다는 것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제국의 성장과 더불어 자라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깨달은 귀족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 하오나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아무리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라고 하셔도,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구석에 앉아 있던 한 귀족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베네딕트에게 반문했다. 믿지 못하는 것인지 손마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베네딕트는 가만히 그의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바라봤다.

    ‘저자의 가문은 독실한 신앙심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지.’

    사람은 신앙에 믿음을 바치고, 그 대가로 평안을 얻었다. 제국에는 저 귀족과 같은 자들이 무수히 있을 터였다.

    근간과도 같았던 믿음이 박살 나는 대사건이었다. 당연히 증거물이 필요했다.

    베네딕트가 손을 들고 묵직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호명했다. 이 사건과 가장 관련이 깊은 둘, 데니스와 아슬란을.

    “데벤테르 후작, 그리고 윈체스터 공작. 일어나서 그 증거를 보여 주시게.”

    “예, 전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날 연회에서 한 여자를 두고 살벌한 기류가 오갔던 두 사람이 차분한 정복을 입고 함께 일어났다. 그것만으로도 모여 있던 귀족들은 놀라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여러분께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데니스가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꼼꼼하게 포장된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든 자잘한 푸른 보석 알갱이가 보였다.

    “이게 무엇이오?”

    “이것이 제국을 집어삼키려던 교단의 심장, 에덴이 가진 힘의 원천입니다.”

    듣고 있던 귀족들은 어리둥절했다. 저 장난감 부스러기 같은,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보석 알갱이가 무슨 힘을 지녔단 것인가?

    “신기한 것을 보여 드리지요.”

    데니스가 아슬란에게 눈짓하자 그는 밖에서 한 사람을 들어오게 했다. 호위기사가 들인 사람은 꼬질꼬질하고 상당히 위축된 어깨를 하고 들어왔다.

    “저, 정말 시키는 대로 하면 저는 감형해 주시는 겁니까?”

    그는 바로 광신도 폭동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벨로트였다. 감옥에 갇힌 지 몇 시간도 안 되었는데, 그는 상당히 수척한 몰골이 되어 나타났다.

    “그렇다고 약속했지.”

    “약속 지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죽습니다! 벼, 변호사. 변호사부터 불러 주십시오.”

    “증언부터 하고 나면 불러 주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데니스는 절대 벨로트를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루스벨라를 노리는 잠재적 살인자들이었으므로.

    “그, 그럼……. ‘신의 은총’의 사용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벨로트의 말에 모여 있던 귀족들은 아리송한 낯이 되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신의 은총?”

    “역사상 성물 목록에 저런 물건은 존재치 않았는데……?”

    신과 관련된 물품들은 성유물로 지정되어 국가와 신전에서 함께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저 듣도 보도 못한 보석 알갱이가 신의 은총이라니. 귀족들의 눈초리가 불신으로 더욱 가늘어졌다.

    베네딕트는 그런 소란스러움을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똑똑히 보게. 저들이 모시는 ‘신’의 힘을.”

    데니스가 벨로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벨로트가 눈을 질끈 감고 성력석 내부에 있는 신성력을 운용했다.

    우우웅.

    “저게…… 뭐지?”

    더없이 푸른 무형의 힘이 마치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시냇물처럼 성력석에서 펼쳐졌다. 마치 밤하늘에 쏟아질 것처럼 흩뿌려진 은하수 같은 오묘한 빛깔이기도 했다.

    그때, 아슬란이 품에서 단도를 하나 빼 들더니 그의 팔을 길게 베었다. 귀족들은 기함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공작! 황태자 전하께서 계신 이 방에 무기를 소지하고 오다니!”

    황궁에 황족의 허가를 받지 않고 무기를 소지하고 온 자는 죄를 물어 처벌해야 하는 것이 온당했다. 다른 귀족들이 경비병을 부르려는 찰나, 베네딕트가 말했다.

    “내 허락하에 공작과 백작은 이번 기회에만 특별히 무기를 소지할 권한을 얻었네. 책망하려면 내게 말을 하게.”

    황태자에게 언성을 높일 귀족이 있을 리가. 그 귀족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베네딕트가 장난스럽게 입을 다물라는 제스처를 취한 탓도 있었다.

    그사이 아슬란의 팔뚝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비위가 약한 귀족들은 인상을 찡그리고 구역질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자, 벨로트 주교. 신성력을 윈체스터 공작에게 발휘해 보게.”

    데니스가 벨로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벨로트는 퍽 풀이 죽은 채로 그 명령을 이행했다.

    “……알겠습니다.”

    푸르고 오묘한 기운이 아슬란을 향해 쏘아졌다. 그가 스스로 상처 낸 팔로 향한 힘은 따스하게 상처를 감쌌다.

    “상처가…….”

    “회복되고 있어!”

    귀족들은 경악했다. 저런 식의 치유력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 아슬란의 팔은 무사히 치료되어 흉터조차 없이 살이 아물었다.

    “이 힘의 이름은 신성력으로, 지금까지 치유력이라 잘못 알려졌던 것입니다.”

    “치유력이라고?”

    “하지만 이런 형태는 본 적이 없소! 문헌에서도 보지 못한 것인데…….”

    “이게 대체 제국의 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질문이 쏟아졌다. 새로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반이요, 흥미로워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다들 조용히 하라! 더 이야기를 끊는 자가 있다면 이 회의장에서 퇴출시킬 것이니 그리 알아라.”

    베네딕트가 소란을 참지 못하고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그제야 회의장 안의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넘치는 호기심은 끊임없이 입을 근질거리게 만들었다.

    “많이 궁금하실 것을 압니다. 이 힘이 신성력인 이유를, 지금부터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데니스는 벨로트를 보며 몇 발자국 떨어졌다. 그리고 곧 허가받은 그의 검을 빼 들더니 덤비라는 자세를 취했다.

    “서, 선공합니까?”

    “물론이다.”

    벨로트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성력석 부스러기의 힘을 끌어냈다. 푸른 신성력이 눈부신 빛을 내더니 곧 검의 형태가 되었다.

    “소드 마스터인가?”

    “아니야. 저건 오러가 아닐세!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진 형상이 아니야.”

    방금까지는 치유력을 발휘했던 푸른 기운이 무기의 형태를 갖추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검기를 쓸 줄 아는 무장들은 절대 저것이 오러가 아님을 앞다투어 말했다.

    “그렇다면…… 저게 정말로 신성력이라는 말인가? 저것이, 진짜 신성력이라고?”

    그동안 그들이 알고 있던 신성력은 단지 버프의 개념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안녕과 축복을 빌어주는 마법과 비슷한 술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개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으아아!”

    벨로트가 기합을 내지르며 데니스에게로 덤볐다. 푸른 기운의 검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챙.

    “붉은……빛의 또 다른 검?”

    데니스는 여유롭게 그것을 검에 신성력을 둘러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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