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이야.’
벨로트는 어이가 없었다.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아벨이 아니라 다른 신이 사기당한 그들을 가엾이 여기기라도 하는 건지, 돈을 받고 광신도 노릇을 해 줄 사람을 너무도 쉽게 구했다.
심지어 그 사람들을 잠입시키는 것 또한 수월하게 풀렸다. 뚫리지 않을 것 같은 데벤테르 후작가의 철저한 방비는 운이 좋게도 틈을 기어이 만들어 줬다.
그것이 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파 놓은 잘 짜인 덫인 줄도 모르고서.
“선량한 사제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마녀를 잡아라!”
“마귀를 잡아들여라!”
“사제의 돈을 뜯어 배를 불리는 악덕 가문인 데벤테르 후작가를 벌하라!”
시종의 옷을 잡아 뜯고, 교단의 상징인 푸른 달의 브로치를 단 사람들이 루스벨라와 데니스를 향해 우르르 움직였다. 그들의 손에는 위험하게도 날카로운 흉기가 들려 있었다.
“끼아아아악!”
“포, 폭동이다!”
“다들 피해!”
아무런 방비 없이 그저 연회를 즐기기 위해 온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리 데니스가 사람들이 패닉에 빠질 것을 예상하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활짝 열어 둔 덕에, 사람들은 무사히 대피했다.
“자, 자. 이쪽으로 나가세요들!”
그 중심에는 데벤테르 가의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급하게 밖으로 나가려다 압사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사람들 사이의 질서를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했다. 노령의 귀족들을 부축하는 것은 당연했다.
“오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귀족들은 제 목숨 건지기에 바빠 제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겠다는 야망도 걷어차고 나왔다. 목숨이 먼저였다. 죽으면 황족의 관도 쓰지 못했다.
그나마 소수의 충신들만이 황후와 황태자의 안전을 걱정하여 남았다. 그들은 데벤테르 가의 사병들에게서 검을 빌려 들고 황후와 황태자를 지키려 나섰다.
“괜찮으십니까,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우린 괜찮네. 경. 그보다 저쪽이 신경 쓰이는군.”
베네딕트가 데니스와 루스벨라 쪽을 힐끔거렸다. 흉기를 든 광신도들과 후작가 호위들이 대치 중이었다.
“신하를 염려하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안전이 저희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안전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데벤테르 후작가에 훗날 책임을 물으셔야 하옵니다.”
잔뜩 긴장하여 검을 빼 든 그들에게 베네딕트는 꽃처럼 웃었다. 그들의 충성심이 갸륵해서도 있고, 이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그에게는 그저 우습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닐세. 이건 그들과 내가 합작하여 놓은 덫이거든.”
“……예?”
“뭐라고 했습니까, 황태자?”
황후까지 놀라서 베네딕트를 추궁했지만, 그는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일이 모두 끝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음, 어쨌든 저와 어머니는 대피하는 것이 좋겠군요. 그게 합의된 상황이라서요.”
“대체…… 아닙니다. 황궁에 가서 설명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파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정말이지 즐거워 미치겠네요.”
베네딕트는 설렘을 숨기지 않았다. 황후는 명색이 황태자란 아들이 상당히 괴짜임이 드러날까 봐 얼른 그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황태자.”
“네에.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베네딕트의 말에 황후는 이마를 짚었다. 검을 빼 든 신하들은 눈을 돌렸다.
“저, 저희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그래야지. 아무튼…… 황태자가 나 몰래 무언가를 계획했던 것 같으니, 그대들은 우리를 수행해 황궁으로 가세.”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리하여 베네딕트와 황후는 무사히 데벤테르 후작가가 준비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애초부터 준비한 마차는 빠르게 둘을 싣고 황궁으로 향했다.
“판은 다 깔렸으니 남은 건 쥐새끼들의 근거지를 뒤집어 놓는 일이로군.”
베네딕트가 마차의 창문으로 멀어지는 연회장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이제 그대들의 독무대네. 후작, 그리고 후작부인.”
***
연회장에서 무섭게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달려들던 광신도들은, 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가자마자 무기를 떨어뜨렸다. 얌전해진 것은 기본이었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후작님. 저희는 명받은 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게 중요했네. 거기다, 그대들이 교단의 썩어빠진 뿌리를 붙잡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증인들이 될 것이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단지 후작님께 받은 은혜를 갚을 수 있어 기쁠 따름입니다.”
“……고맙네.”
성력 증진제 건으로 광신도 의뢰를 넣은 자들은 사실 데니스에게 도움을 받은 자들이었다.
선대 데벤테르 후작이 아직 건재했을 때, 그가 정부에게서 본 아들 둘은 시시때때로 도박을 즐기거나 패싸움을 벌였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본 평민들이 적지 않았다.
원치도 않은 노름을 억지로 하여 거액의 빚을 지고, 가당치도 않은 시비에 휘말려 몸이 망가진 자들을 위해 데니스는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켰다.
“후작님이 아니었더라면 저희가 이렇게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두 분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데니스가 은밀히 사제들에게 의뢰를 받는 척 자작극에 참여해 줄 사람들을 구할 때, 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표했다.
벨로트를 비롯한 아벨의 심복들은 몰랐겠지만, 그들이 빠르게 사람을 싼값에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런 속사정 때문이었다.
“여기, 저희에게 의뢰를 맡긴 자들이 낸 대금과 계약서입니다.”
사제들의 명부가 적힌 계약서가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손에 들어왔다. 일부는 데벤테르 후작가에 잠입이 가능하다면 진짜 성력 증진제를 훔쳐 오거나 연금술 레시피를 가져오라는 명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래. 수고들 했네. 그대들은 내 약속한 대로 처벌받지 않고 혐의 없음으로 풀려날 것이며, 포상을 받게 해 주겠네.”
데니스가 가짜 광신도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전했다.
“포상까지 바라지는 않습니다. 경사스러운 날을 망친 주범이 저희가 되었으니…….”
은혜를 갚기 위해 나섰으나, 황태자비를 뽑기 위한 연회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안심하게. 내 아비란 자가 이미 날을 망쳤으니. 또,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황태자 전하께서도 승인하신 일이니 걱정할 것들 없네.”
루스벨라 또한 괜찮을 것이라 그들을 다독였다. 그러자 어두운 그늘이 걷히고 그들도 진심으로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꼭,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응원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대들의 노고는 잊지 않겠네.”
“저희는 이제 자백한 것처럼 꾸미고, 후작가의 기사들을 따라가면 될까요?”
“그렇게 하면 되네. 이 사람들을 안전가옥으로 무사히 데려가도록.”
“알겠습니다, 후작님!”
기사들은 남들이 볼 것을 대비해 약하게 가짜 광신도들의 손목을 줄로 묶었다. 그리고 압송하는 척 그들을 데려갔다.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각자 손에 증거품을 들고서, 남은 한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무대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었다. 화려한 막을 올렸으니, 이제 아벨을 잡을 일이 남았다.
***
“지금쯤 일이 다 끝났을까?”
수도 외곽의 허름한 여관에서 벨로트는 심심함에 지쳐 있었다. 데벤테르 가 소유의 연회장에서 아직도 소식이 전해지지 않자 조급해졌다.
‘언제까지 이런 촌구석의 냄새 나는 곳에서 죽치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아벨의 심복으로서 주어지는 돈은 아직 받을 때가 되지 않았다. 성력 증진제로 그를 비롯한 사제들은 돈을 다 써 버려 어쩔 수 없이 가장 싼 여관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기왕이면 데벤테르 후작, 그 얄미운 놈에게 중상을 입혔으면 좋으련만.’
처음에 사제들은 흉기까지 건네줄 생각은 없었다. 이는 벨로트의 아이디어였다.
“광신도 노릇을 확실히 시키려면 흉기까지 들어야 더 그럴듯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곳에는 황후와 황태자도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다 웬 고위 귀족이 다치기라도 해서 우리에게까지 불똥이 튀면 어쩌나? 봉변은 이제 질색이야.”
걱정하는 사제들을 새가슴이라고 비웃으며 벨로트는 그들을 살살 구슬렸다.
“이미 의뢰를 받은 용병들은 우리의 신원을 죽어도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네. 계약서를 그래서 쓰지 않았는가! 고문을 당하더라도 절대 불지 않겠다고 해서 돈을 더 뜯어갔으니 괜찮을 걸세.”
벨로트가 이리 자신하는 데에는 알렉의 입김이 들어간 탓이 있었다. 알렉은 불안해하는 벨로트를 위하는 척, 데니스에게서 받은 성력 증진제를 주며 그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제가 마침 아벨 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존재 아닙니까. 세비어 장로님도 저를 후계자로 눈여겨보는 참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랬으니 괜찮겠지.’
어리석은 벨로트는 몰랐다. 알렉은 이미 아벨의 의심을 사 시종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고, 세비어 장로 역시 자신이 성력 증진제를 마신 것이 들통날까 봐 무서워 칩거 중이란 사실을.
“약속 시간이 다 되었는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임무를 수행했다는 증거로 정해진 시간에 여관에서 보기로 했는데, 용병들은커녕 파리 새끼 한 마리도 오지 않았다.
두두두두…….
“왔나?”
여관은 워낙 허름한지라, 마차나 말이 달려오는 진동이 무척이나 잘 들렸다. 오매불망 좋은 소식만을 기다리던 사제들은 일제히 여관 밖으로 나섰다. 여관 주인이 돈은 내고 나가라는 타박을 던졌지만, 괘념치 않았다.
“어……? 뭔가 이상한데?”
“뭐가 말인가?”
“저, 저 말을 타고 오는 사람들의 복장이 어째 용병이 아닌 것 같네. 그것보다는…… 설마!”
한 사제가 말 위의 기사의 제복을 알아보고 기겁했다.
“데, 데벤테르 가문의 문장이다!”
“뭐라고?”
“도망쳐야 해! 일이 수틀렸다!”
사제들은 허겁지겁 여관비도 내지 않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돈 문제에 민감한 성질 더러운 근육질의 여관 주인이 그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어딜 가시나? 돈은 내고 가야지. 내 인생에 외상은 없어서.”
“저리 비켜!”
“저리 못 비킨다, 이 거지 놈들아.”
덩치 큰 여관 주인은 그에 비하면 마른 체구의 사제들을 재빨리 때려눕혔다. 경비대에 무전취식을 했다고 신고할 요량이었다.
“아, 수고들 하십니다. 기사 나리들, 여기 죄인들 좀 압송해 주시오.”
“아이고, 저희야말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데벤테르 가의 기사들은 그들을 수월하게 잡아갈 수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살려 줘! 살려 주세요!”
그들은 처절하게 울부짖었으나, 아무도 도와주는 이들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