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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02화 (102/166)

102화

“뭐, 뭐라고? 무슨 모함을 하는 게냐! 감히 네가 이 아비를 능멸해?”

지펠론 백작은 카일의 말에 게거품을 물 뻔했다. 당장 채찍을 들어 아들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았다.

아슬란과 루스벨라 사이의 염문의 시발점이 지펠론 백작은 아니었다. 그 불씨에 장작을 보태서 추후 루스벨라를 협박하려는 데 쓰려던 것은 맞았으나, 맹세컨대 그가 모든 소문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이어 터진 흥미로운 가십거리에 사람들은 참새처럼 일제히 입을 부지런히 놀렸다.

“들었어요? 지펠론 백작이 자기 딸을 음해하는 소문을 더 거들었대요.”

“끔찍하기도 하지. 친아버지라면서, 어떻게 자기 딸을 감싸지 못할망정 저렇게 내다 버리죠?”

“게다가 아까 윈체스터 공작님과의 대화에서, 데벤테르 후작부인은 어떤 애정의 뜻도 밝히지 않았잖아요?”

“설마…… 윈체스터 공작님의 짝사랑이란 말이신가요? 어머나.”

여론이 아슬란의 일방적인 외사랑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스벨라는 시종일관 침착하고 차분했다. 아슬란의 구애 어린 행동에도 눈의 여왕처럼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쌍방이었다면 정말이지 세기의 스캔들이 되었겠지만, 무려 공작씩이나 되는 이가 기혼자 앞에서 무너진 것도 재미는 쏠쏠했다. 거기에 끼어든 지펠론 백작은 즉시 사람들의 먹잇감으로 낙찰되었다.

“그나저나 지펠론 백작님.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실 수가 있나요?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딸에게 욕을 퍼붓다니…….”

“진짜 부끄러워야 할 대상이 누군지 모르겠군요?”

“심지어 아까 아이들 대하는 태도 좀 보세요. 팔에 드러난 멍이며…… 아이들을 학대하는 건 아닙니까?”

만일을 위해 루스벨라와 데니스 측에서 배치한 바람잡이들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사람들은 알아서 백작을 비난했다. 그들은 자극적인 소재에 열광하고 있었다. 한순간 백작의 등장으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루스벨라를 동정하여 위선을 채우려는 욕망이 이를 부채질했다.

“무슨 헛소리를……! 데벤테르 후작의 장인인 내게 이래도 되는 것이오?”

뒤늦게야 지펠론 백작이 일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방금까지 딸을 비난하던 아비가 잘사는 사위를 들먹인 것이 장내를 더 싸늘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카일과 레베카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후작님과 무슨 상관이십니까? 누이가 결혼할 때, 어떤 간섭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신 것은 아버지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평생 언니를 쥐 잡듯이 잡았으면서, 어떻게 형부 핑계를 대서 빠져나가려고 하세요? 아버지께 양심은 남아 있으세요?”

두 아이들의 눈물 젖은 호소에 사람들의 마음은 그들에게로 흘렀다. 길거리의 잡배를 보는 멸시의 시선이 지펠론 백작에게 쏟아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펠론 백작은 이 상황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경우의 수라 당혹스러웠다. 언제나 제 말에 설탕과자처럼 따라 주던 쌍둥이들이, 지금은 더없이 끔찍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아비와 대적하고 있었다.

백작에게 넌지시 계략을 던져 준 것은 바로 그 아이들임에도 말이다.

“지금 그대들은 속고 있소! 저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 줄 아시오? 내게 제 누이를 겁박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한 것도 저 작은 악마들에게서 나온 것이오!”

악마라는 말에 구석에서 잡일을 하던 시종 하나가 움찔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펠론 백작이 억울함을 토로해도, 모두 거짓말로 들렸다. 믿는 이는 없었다.

파티장에 있던, 아이들을 둔 가정의 귀족들은 지펠론 백작의 시야에서 카일과 레베카를 감춰 두고 그를 경멸했다.

“……최악이군요. 저런 어린아이들이 뭘 안다고 그런답니까?”

차디찬 눈동자 여러 쌍이 지펠론 백작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백작은 처음 직면하는 공포에 그만 스스로를 구덩이로 몰아넣는 실수를 제 입으로 말하고 말았다.

“정말입니다! 제 누이가 핍박받을 때도 가만있던 것들이 왜 인제 와서……!”

“그 말은 지펠론 백작, 당신이 자식을 학대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보군?”

누군가 백작에게 일침을 가하자,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면, 그에겐 정말 파멸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아니라니까! 어떤 개자식이 감히 내게 그딴 소리를 지껄……! 헉.”

그래서 목에 핏대를 세워서까지 흥분하며 무고함을 주장했는데, 하필이면 욕을 건넨 상대가 좋지 않았다.

“호오. 백작이 내게 욕설을 날릴 줄은 몰랐는데?”

“화, 황태자 전하. 그, 소신은 그게 아니오라…….”

“변명은 필요 없네. 지펠론 백작.”

베네딕트는 웃는 낯 그대로 뚜벅뚜벅 상석에서 걸어 내려왔다. 크림빛의 계단을 타고 연회장으로 내려오는 그를 위해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섰다. 지펠론 백작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고립되었다.

“아, 아닙니다! 전하. 제가 불충한 마음이 있어 그리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황족을 모독한 죄는 치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백작.”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었다.

‘아니지. 루스벨라가 있다!’

윈체스터 공작이나 황실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세력이 강대한 데벤테르 후작의 부인이자, 그의 못난 딸인 루스벨라가 구명줄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아가! 루스벨라! 이 아비를 좀 도와다오. 너, 너는 이 아비의 하나뿐인 착한 딸이잖느냐.”

지펠론 백작은 다급함에 평생 하지도 않던 말을 루스벨라에게 건넸다. 뒤에서 레베카가 배신감에 찬 눈으로 아버지를 노려봤다.

“나는 딸도 아니야? 하나뿐인 딸이라고?”

루스벨라는 자리에 앉아 상황을 관전하고 있었다.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턱을 괴고 녹색 눈동자로 서늘하게 제 아비를 내려보는 그녀는 초연해 보였다.

“아, 아가……? 내 딸아……?”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펠론 백작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 것처럼 루스벨라는 조용했다.

“루스벨라! 네가 어떻게 아비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뜻대로 되지 않자 지펠론 백작은 다시 성을 냈다. 완전히 지척까지 다가온 베네딕트가 그를 보며 혀를 찼다.

“백작. 추하군. 데벤테르 후작부인은 당신의 편을 들어줄 것 같지 않은데 말이야.”

베네딕트의 금빛 눈동자가 카일과 레베카에게로 닿았다. 두 아이는 처음 뵙는 황태자의 기세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거기다 저 아이들마저 학대하고 있었다니……. 아주 가관이군. 장녀인 후작부인은 망신을 주고 협박하려고 하지 않나. 정말이지 실망이야.”

베네딕트야 지펠론 백작에게 실망할 것이 있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는 부러 그런 어휘를 골라 썼다. 지펠론 백작의 정신을 보다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그, 그, 저는……! 소신은 억울합니다! 이게 다 저 간악한 자식들의 음모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득을 얻을 게 뭐가 있소, 백작?”

데니스의 참전이었다. 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득을 얻으려는 쪽은 단연코 지펠론 백작이었다. 그의 세 자식들은 피해자로만 보였다.

“데벤테르 후작……!”

“설마 자식들이 아비의 부당한 행동에 맞서 싸우는 것을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고 포장하지는 마시오. 역겨우니까.”

“이, 이이……!”

지펠론 백작은 부들부들 떨며 치욕을 삼켰다. 오늘 연회에 참석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멍청하고 순종적인 딸인 루스벨라에게 돈을 뜯을 계획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할 말은 다 끝난 것 같군. 지펠론 백작.”

‘어느새……!’

베네딕트가 손을 까닥이자 보안을 위해 데려온 황궁의 호위기사들이 지펠론 백작을 에워싸고 있었다. 베네딕트가 눈꼬리를 접어 가며 명령했다.

“나가게. 백작. 더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오늘은 무려 내 비를 만나기 위한 영광스러운 자리 아니던가.”

지펠론 백작이 황태자의 말을 해석도 못 하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베네딕트는 축객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 같은 오물은 영광된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아, 물론 백작의 자식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 두고 가게. 그들의 신변은 데벤테르 후작부인에게 맡길 테니까.”

“분부 받들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베네딕트의 말에 여태껏 반응이 없던 루스벨라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카일과 레베카는 기뻐하며 쭈뼛쭈뼛 누이에게로 향했다.

“그와 더불어, 저는 제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을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할 것을 요청합니다. 피해자는 저와 제 동생들입니다.”

“루스벨라!!!”

“제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지펠론 백작님.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연은 당신께서 나를 정략결혼으로 비싸게 팔아넘기셨을 때, 사라졌습니다.”

송곳 같은 날카로움이 깃든 말에 지펠론 백작은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바보처럼 그의 앞에서 울고 떨던 딸이 아니었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다 쉬어 가는 목소리에 루스벨라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라고요? 모두 아버지께서 자초한 것이 아니십니까.”

일말의 자비로움도 없는 칼을 문 문장에 지펠론 백작은 어느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랐다. 그저 잘못했다며 우는 루스벨라 앞에서 그는 비슷한 소리를 지껄인 적이 있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버지.”

“듣기 싫다! 모든 것은 네가 자초한 것이다. 못난 버러지 같은 것.”

그것을 고스란히 지펠론 백작이 돌려받고 있었다.

‘내가 당했구나.’

지펠론 백작의 눈이 카일과 레베카에게로 향했다. 예뻐하던 자식들인 쌍둥이들의 눈도 루스벨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배은망덕한 것들. 키워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준 아비를 철창에 집어넣으려 해……?”

자신이 우습게 여기던 대상들에게 반격을 당하자 수치심과 분노가 한계치를 넘도록 차올랐다. 지펠론 백작이 자식들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베네딕트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황궁의 호위기사들과, 유사시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던 데벤테르 가의 사병들이 그를 끌어냈다.

“이것 놓아라! 전하! 속으시면 안 됩니다! 전하!”

끌려 나가면서도 지펠론 백작은 돼지 멱따는 소리로 하소연을 멈추지 않았다. 베네딕트 황태자는 귀를 막았다. 그리고 루스벨라에게 물었다.

“만족하나, 데벤테르 후작부인? 이만하면 훌륭한 거래인가?”

“물론입니다. 전하.”

이것으로 지펠론 백작은 수사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구체적인 학대 정황이 드러나 감옥행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설마 이것을 위해 내게 그동안 원치도 않던 황태자비 후보를 뽑을 연회를 열어 달라고 한 것이오, 황태자?”

황후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답을 요구했다. 베네딕트는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뭐, 겸사겸사입니다. 어머니. 아직 본격적인 파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답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황후의 물음을 해결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시종들 틈에서 누군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악한 마녀는 당장 신의 뜻을 받들라!”

벨로트를 비롯한 아벨의 심복들이 주도한 폭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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