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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01화 (101/166)
  • 101화

    아슬란은 어머니의 입 모양을 눈으로 읽어 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자리라, 차마 큰 소리로 소리치지 못하는 선대 공작부인이었다.

    ‘거기서 무엇 하는 게냐.’

    선대 윈체스터 공작부인의 낯은 고요했다. 아슬란은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저렇게 극도로 차분한 얼굴을 할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이 정해 놓은 선 밖으로 넘어가는 것을 용납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아슬란은 그것이 제 아버지, 선대 공작이 준 상처에 대한 후유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선대 윈체스터 공작이 어머니 몰래 외도를 했던 것을 안다. 좋은 집안의 장녀로서 귀한 대접만 받고 살았던 그의 어머니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처였다.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아슬란. 네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 짓은 절대 안 돼.”

    그 말대로 아슬란은 어머니를 거역하지 않고 바른 아들로 자랐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 나이부터 맡게 된 공작의 업무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잃은 것들은, 놓친 것들은 얼마나 크던가.’

    착하고 바르게 자란 아들은 그의 어머니가 원하던 이상적인 공작의 모습에는 도달했으나, 더 소중한 것들을 놓쳤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졌어야 했을 정이, 아슬란에게는 관심 외였다. 그로 인해 루스벨라를 잃었다.

    그녀는 그를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루스벨라에게 냉담했던 것에 대한 합당한 처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는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속죄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는다. 그럴 뻔뻔함도 없거니와, 지금은 그저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에 집중했다.

    철저히 계획된 함정의 무대, 기필코 노리는 사냥감을 잡아야 끝이 난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다면…… 제가 후작부인께 다가오는 일도 없었겠죠.”

    아슬란은 태연히 답하며 루스벨라의 손을 재차 끌어왔다. 인사용 입맞춤이 아닌, 이번에는 명백히 사적인 감정을 담아서, 진득하게.

    ‘잘 해내고 있어서 더 열 받는군.’

    보고 있는 데니스는 이것이 사전에 합의된 연기임을 알아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활화산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질투가 당장 아슬란을 끌어다 내팽개치라고 재촉했다.

    ‘참아.’

    데니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루스벨라를 위한 일에 추하게 질투를 드러내어 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요? 그럼 각하께서 제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품고 왔다고 해석해도 되는지요.”

    루스벨라의 차분하고도 서늘한 음성이 아슬란의 등을 움찔하게 했다.

    그녀가 그를 피하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냉막한 웃음을 걸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려니 더욱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착각이 일었다.

    “……그렇습니다. 데벤테르 후작부인. 이런 저를, 질책하십니까?”

    돌멩이가 입 안에서 부스러지는 것 같았다.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한 말은 과연 진심이 아닐까. 그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던가, 아니면 감추고 있던 마음을 고백하고 있던 것인가.

    “그건 각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황태자 전하의 짝을 찾는 연회에서 이런 과감한 발언이라니. 판단은 본인께 맡겨야 하는 게 아닐까요?”

    루스벨라는 가지고 있던 부채를 들어 아슬란의 손을 쳐 냈다. 가벼운 손길, 간지럽지도 않은 타격감이었다.

    ‘아…….’

    그럼에도 아슬란은 아주 단호하게 거절당한 느낌을 받았다.

    루스벨라는 웃고 있었다. 상대에게 예의상 지어 주는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그녀가 계획한 일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된다는 후련함에서 비롯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발견하고 나서야 아슬란은 루스벨라가 정말, 그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고 있지 않음을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그는 먼지만큼의 존재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죠. 당신에 대한 마음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괜한 말을 했군요.”

    아슬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러 영애와 귀부인들이 수군대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에, 방금 들으셨어요?”

    “내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니죠?”

    “저도 똑똑히 들었어요. 윈체스터 공작 각하께서 아직도 전 약혼녀분께 마음이 남아 있을 줄이야…….”

    원하는 대로였다.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이 세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우아함을 가장한 부챗살 사이로 저급한 말들이 오가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내 비가 될 사람을 뽑을 자리에서 이런 대형 스캔들을 터트리면 어쩌나, 공작.”

    황태자 베네딕트의 등장에 미혼 영애들의 눈이 빛났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의 발언에 사람들은 더욱 기함하며 입방아를 찧어 댔다.

    윈체스터 공작 본인이 인정한 것도 놀라웠지만, 황태자의 입에서 직접 스캔들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파급력이 엄청났다.

    “오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딱딱한 인사치레는 그만두지. 그보다 더 재밌는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베네딕트가 진심으로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연기가 아니라 정말 재밌어하고 있었다.

    웃기는 소리였다. 이 자리를 만든 까닭은 황태자의 비를 뽑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이해는 가는 소리였다!

    무릇 인간이란 남의 복잡한 연애사가 더 재밌는 법. 베네딕트의 말에 다들 경악은 하면서도 격하게 동의했다.

    “송구합니다. 사적인 감정에 대해서 황태자 전하께 말을 올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황태자 직위를 이용해서 듣고 싶다고 해도?”

    “…….”

    베네딕트의 말에 아슬란도, 루스벨라도, 데니스도 얼이 빠졌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가짜 치정극이라 해도 말이다!

    “안 되겠나? 공? 이 내가 간절히 듣고 싶다는데?”

    듣고 있는 귀족들은 귀를 쫑긋거리면서도 황태자가 어지간히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원하신다면야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아슬란은 습관처럼 테라스나 휴게실 같은 공간으로 이동하려다 멈칫했다. 루스벨라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이동하면 시선이 분산됩니다.’

    입 모양으로 전달하는 말을 보고 아슬란은 움직임을 멈췄다. 익숙한 습관대로 행동하려다 일을 그르칠 뻔했다.

    ‘호오. 정말 재밌어. 치정극은 역시나 옳군.’

    베네딕트는 피식 새려는 웃음을 겨우 감추고 긴장으로 굳은 아슬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퍽 친근한 태도였다.

    “긴밀히 말할 게 뭐 있나. 지금 당장 듣고 싶거늘.”

    멀리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선대 공작부인의 맹렬한 살기가 아슬란의 머리를 날려 버릴 기세였다.

    “황태자,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데벤테르 후작부인에게도, 윈체스터 공작에게도 실례되는 행동이지 않습니까!”

    황후도 질겁해서 아들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베네딕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가, 데벤테르 후작부인? 그대의 생각은 어떻지?”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루스벨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베네딕트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 또한 공작 각하의 의견에 대해 귀 기울여 보고 싶군요.”

    일말의 떨림도 없는 그녀의 목소리는 우아하기까지 했다.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아도.

    ‘설마 이 자리에서 윈체스터 공작을 사교계에서 매장시키려는 수작인가?’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공작이 순순히 협력하고 있으니 그건 아니었다.

    “이게 무슨…….”

    황후는 황태자의 행동이 황실에 누가 될 것이라 여겼는지 그들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베네딕트가 막았다.

    “오늘 하루만 가만히 둬 보시죠, 어머니. 재밌는 구경이잖습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십니까, 황태자.”

    “흐음, 그건 두고 보면 아실 겁니다.”

    베네딕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슬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아슬란이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이 못난 것!”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사람을 다그치는 목소리가 연회장을 갈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루스벨라의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이었다.

    ***

    “대체 처신을 어떻게 했으면 이런 사달이 나게 만들어? 한심한 것 같으니라고…….”

    지펠론 백작이 소리를 지른 대상은 그의 딸, 루스벨라였다. 평소 그의 점잖은 모습만을 봤던 사람들은 겁먹은 토끼처럼 그의 곁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하지만 지펠론 백작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정도의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나마 우아함을 가장하던 껍데기도 벗어던지고 루스벨라를 비난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멍청한 것. 후작부인이나 되어서 염문을 퍼뜨리게 만들어……?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다 보란 듯이! 네가 내 딸이라는 게 수치스럽다!”

    “…….”

    루스벨라는 아버지의 말에 침묵을 유지했다.

    ‘카일과 레베카가 잘해 주었군.’

    부탁한 대로 두 동생은 지펠론 백작의 허영심에 물을 붓고 꽃을 피워 준 모양이었다. 지금처럼, 루스벨라의 앞에서 대놓고 수치와 명예를 운운하며 그녀를 지적하면 다시 백작의 말에 순종할 거라고 속삭였다든지.

    “아버지, 왜 이러세요?”

    “시끄럽다! 너희들도 저런 발칙한 누이는 보고 싶지 않겠지.”

    카일이 울먹이며 지펠론 백작을 말렸으나 그는 거칠게 아들의 손을 쳐 냈다. 그러자 카일은 세게 밀쳐진 것처럼 쿠당탕 바닥 위로 넘어졌다.

    “으으…… 아, 아파.”

    “카일! 괜찮아?”

    카일과 쌍둥이 남매인 레베카가 그를 부축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슬쩍 지펠론 백작이 학대한 흔적이 보이도록, 소매를 걷고 눈물을 닦으면서.

    “아버지…… 어떻게 언니에게 그런 상스러운 소리를 하세요? 아버지야말로 부끄럽지 않으세요?”

    “뭐야? 레베카,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지펠론 백작은 쌍둥이에게서 전달받은 대로 루스벨라를 다그쳐서 한 몫 뜯어낼 생각에 잔뜩 취해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사전에 공모한 것처럼 제 편은 들지 않고 연약한 피해자의 모습을 하니 당황스러웠다.

    지펠론 백작이 주춤하자 카일과 레베카는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윈체스터 공작과 누이 사이의 염문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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