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100화 (100/166)

100화

“아직도 헛된 꿈을 버리지 못하셨구나.”

루스벨라는 조소했다. 아버지란 사람은 애당초 딸인 루스벨라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답신을 적으려는 펜촉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였다.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티끌. 그것이 번진 잉크가 되어 뚝뚝 편지지 위로 떨어졌다.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였건만, 마음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의 찌꺼기가 썩어 가는 게 선연히 느껴져 괴로웠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다 끝이야.’

루스벨라는 잉크 자국이 번져 못 쓰게 된 편지지를 구겨 버렸다. 새로이 쓰는 편지 위로, 유려한 글씨체가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카일에게.

고마워. 카일. 레베카에게는 걱정할 일 없게 만들겠다고 전해 줘. 아버지가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바라던 바야.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 예정대로 참석하면 돼. 반드시, 아버지와 함께, 너희들이 와야 해.

이 연회로, 너희들도, 나도 원하던 것을 얻길 바라.]

사각사각 종이 위를 질주하던 펜대가 멈췄다. 루스벨라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글씨를 썼다.

[아버지를 확실히 몰락시킬 기회야.]

“최대한의 소동을 일으켜 주기 바랄게. 카일, 레베카.”

[아버지의, 지펠론 백작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

좋은 사람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와, 너희들을 학대하고 있었다는 걸.

[부탁할게.]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실링을 찍어 보내는 과정을 눈에 새겼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기 전의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카일과 레베카가 보낸 답장은 루스벨라의 손에 빠르게 들어왔다.

[응. 우리에게 맡겨 줘. 누이.]

[우리처럼 영악한 애들에게 이런 모략 정도야 쉬운 일인걸.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한다면.

“……아직 데니스를 위한 치료제를 완성하지 못했어.”

그것이 못내 불안했다. 맑은 하늘에 별안간 쏟아질 소나기처럼.

루스벨라는 수두룩하게 놓인 실패 시약들을 보며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쥐었다.

“다 잘될 거야. 그렇게 만들 거야.”

무수히 중얼거리는 말은 주문에 가까웠다. 그것은 마치 처절한 기도문처럼 들리기도 했다.

***

황태자의 반려를 찾으려는 연회의 날이 밝았다.

수도의 귀족들은 이날만을 기다리며 거의 전투에 가까운 치장을 마쳤다. 웬만한 부티크는 일찌감치 예약을 마감했으며, 보석상들은 히죽 올라간 입꼬리를 매달고 풍족한 수입을 올린 후 돌아갔다.

“꼭두새벽부터 다들 분주한 게 느껴지다니. 내 인기가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단 말이야.”

베네딕트는 키득거리며 황태자비를 배출하려는 귀족들을 비웃었다. 기대에 부푼 그들에게 사실 이 연회는 그저 공들인 함정이자 쇼에 불과하다고 하면 얼마나 허망해할까.

‘이참에 어느 가문이 내게 호의적인지, 또 정말 괜찮은 정략결혼 상대가 있다면 알아볼 수도 있는 일이지.’

귀족들을 속이는 것은 미안하지 않았다. 그들도 결국 베네딕트란 인간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황태자라는 황금 거위알에 홀려 딸을 들이밀려는 것이니.

“전하, 체통을 지키시지요. 기껏 쌓아 올린 다정한 황태자의 이미지가 그러다 탄로 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데니스가 신문을 들여다보며 베네딕트를 타박했다. 베네딕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히죽거렸다.

“그건 내가 아니라 자네가 걱정해야 할 일이겠지? 내가 협력해 주는 대가로 내게 그 어떤 피해도 오지 않게 하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나.”

“속내가 검은 너구리 같은 분이시란 건 알았지만, 정말이지 다정함은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군요.”

“힘들다니? 이렇게 고분고분 그대들과 입 맞춰 행동하고 있지 않나. 후작, 나야말로 섭섭하군그래.”

서로 주고받는 말이 참 예쁘기도 했다. 옆에 앉은 아슬란은 입을 꾹 다물고 이 불편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세 사람은 연회를 위해 마련한 장소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황태자의 요청으로, 이번에는 특별히 황후의 주관하에 루스벨라도 보조 주최자로서 연회 준비를 거들게 되었다. 그녀는 연회장에서 오늘의 주인공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니스는 밤하늘처럼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부지런히 연회장을 오갈 루스벨라를 그리며 신문을 덮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모쪼록 맡은 역할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황태자 전하.”

“물론이지. 이 일에는 제국의 안녕도 걸린 일이 아니던가? 다만, 오늘 이후로 부황께서 나를 아니꼽게 볼 일이 걱정되어서 그렇지.”

베네딕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가 말한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그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각오한 일 아니십니까. 전하께서 폐하의 잘못된 선택을 응원하실 분도 아니시고요.”

데니스는 베네딕트의 말에 무심하게 답했다. 장난기 많은 황태자가 끝까지 그의 속내를 떠보려는 수작을 부리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왜 모르는 척을 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데니스가 시치미를 떼자 베네딕트는 금색 눈을 빛내며 그에게 물었다.

“지펠론 백작을 어찌 만들 생각이지? 그것이 너무 궁금해서 밤새 잠도 못 자고 궁금증에 시달렸단 말이네.”

그렇다고 보기엔 베네딕트의 눈동자는 빨간 실핏줄이 하나도 없이 눈자위가 깨끗했고, 푹 잠든 덕분인지 피부는 반들거리기까지 했다.

“이번 일에 기대가 큰 만큼, 좀 맛보기로 알려 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우린 같은 배를 탄 동지 아닌가.”

베네딕트가 데니스에게 알려 달라 조르고 있을 때, 아슬란은 홀로 침묵 속에서 연회장에서 벌일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까불거리는 친우인 다니엘 크렌베르가 이 꼴을 본다면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을까 상상하면서.

‘곧 연회장에서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군…….’

아슬란은 이 와중에도 그가 자신의 자존심을 챙긴다는 사실이 우스워 스스로를 힐난했다.

그런 그를 베네딕트 황태자가 물끄러미 쳐다보다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긴장했나, 공작? 안색이 영 안 좋군.”

“……별것 아닙니다, 전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아닐세. 나도 언제 이런 진귀한 걸 다 보겠나. 공작에게도, 후작에게도 여러모로 기대하는 바가 많다네.”

“……예.”

아슬란은 베네딕트의 이런 점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잠시 후 벌어질 아슬란과 데니스의 치정극 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한량 흉내는 정말 몸에 맞아서 하신 것일지도 모르겠군.’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신하로서 여태껏 베네딕트에게 어떤 사사로운 의문도 품지 않았지만, 이제는 슬슬 그의 괴짜스러운 면모에 대해 한숨이 나왔다.

[쯧쯧. 아가. 주군으로 삼을 인간이 정녕 저런 놈밖에 없더냐. 먼저 간 그이가 훨씬 낫겠군. 그는 진중한 멋이라도 있었지!]

머릿속의 마리아마저 아슬란을 동정했다. 그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선조의 말에 답하는 것은 아슬란만 더 피곤해지는 지름길이었다.

“도착했습니다, 후작님.”

세 사람을 태운 후작가의 마차가 멈췄다. 마부의 말에 일제히 세 사람은 잘 차려입은 연회복을 가다듬고 마차에서 내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윈체스터 공작. 우리가 나눈 거래를 잊지 마시고, 충실히 맡은 배역에 맞게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데니스의 말에 베네딕트와 아슬란이 답했다.

“후작이나 잘하게. 나는 자신 있으니.”

“……노력하겠다. 데니스.”

사람들은 이미 양치기가 몰고 다니는 양 떼처럼 몰려들었다. 유독 베네딕트의 은색 뒤통수로 꽂히는 시선을 외면하고서 데니스는 주최자가 있는 상석으로 걸어갔다. 아슬란도 함께였다.

“왔어요, 데니스?”

루스벨라가 별빛을 수놓은 것 같은 드레스를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데니스는 마주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후작 부인.”

그리고 옆에서 아슬란은 짜여진 각본대로 루스벨라에게 인사했다. 마치 그 옆에 그녀의 남편인 데니스는 없는 것처럼 태연함을 가장해서.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빛내시니 오늘 연회에서 부인이 가장 눈에 띄겠군요.”

아슬란이 루스벨라의 손을 잡더니 그녀의 손등 위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그것도 결혼반지 위에.

“오…….”

어디서 그런 탄성이 들렸다. 데니스는 그것이 필시 베네딕트의 지원사격이라고 생각했다.

아슬란의 목소리는 작지도 않았다. 대놓고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키우자, 황태자에 온갖 시선이 쏠렸던 귀족들은 크게 놀랐다.

“윈체스터 공작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이미 결혼한 후작 부인에게 미련이 남았다는 소문이 돌던데…… 설마 저렇게 대놓고 남편인 후작 옆에서 저럴 줄은 몰랐네.”

“황태자비가 나올지도 모르는 신성한 연회장에서 어찌 저런 짓을…….”

최근 사교계의 웬만한 파티장을 휩쓸고 다닌 루스벨라였다. 황태자인 베네딕트에게 귀족 영애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면, 이미 기혼인 자들은 그녀에게 붙어 어떤 선물을 뿌릴까 고대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소문에 불을 붙이는 윈체스터 공작의 행동이라니! 귀족들의 눈이 먹이를 찾은 뱀처럼 번뜩였다.

‘데벤테르 후작은 뭐라고 반응하려나? 후작부인은?’

재밌었다. 한 편의 치정극이 돈도 받지 않고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귀족들은 아닌 척 그 셋을 흘끔거리며 기대에 찬 마음을 부풀렸다.

뺨을 때릴까? 저리 꺼지라고 상스러운 말이라도 들릴 것인가?

어느 쪽이든 재밌겠지.

“공작. 내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지?”

데니스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가 칼을 문 것처럼 서늘했다. 목소리로 아슬란의 모가지를 썰어 버릴 것 같았다.

“부인께 친애를 담아 인사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습니까, 후작? 질투가 심하시군요.”

무덤덤한 아슬란의 대꾸에 데니스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구역질이 튀어나오는군.’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연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공작, 꼴사나운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내 부인의 동생들도, 그대의 어머니도 오신 곳에서 추태를 부리면 안 되지요.”

아슬란은 그 말에 연회장을 바라봤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선명하게 검은 머리의 제 모친이 보였다.

‘……어머니.’

선대 공작부인이 자리에 와 있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낯이 분노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