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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99화 (99/166)

99화

“……황태자비를 뽑는 연회에 참석하겠다고요? 이런 시점에?”

벨로트의 미간이 다 찧어 놓은 쑥처럼 일그러졌다.

“허, 귀족이면서 사기를 쳤다는 오명이 돌 텐데, 낯짝이 돼지 껍데기보다도 더 두꺼운가 보군요.”

성력 증진제의 일로 앙심을 품은 사제들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허니버터 상단의 실세가 데니스라는 것을 알자마자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약간의 각색을 곁들여 수도에 부지런히 퍼뜨렸다.

데니스 데벤테르는 역대 데벤테르 후작 중 가장 돈에 미친 장사치라, 검소하게 사는 사제들의 주머니까지도 털어 간다는 내용의 악의적인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평민들보다 귀족들 사이에서 확산세가 더 빠르니, 무도회는 엄두도 못 낼 줄 알았는데.’

벨로트는 짜증스러움에 발을 굴렀다. 현 데벤테르 후작인 데니스가 벌인 사업 중에는 평민들을 위한 자선단체나 장학 재단을 만들어 후원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데벤테르 후작가로 인해 형편이 피게 된 평민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소문을 부정했다.

반면, 귀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안줏거리가 등장했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데니스와 루스벨라가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부러움과 시기에 손수건을 물어뜯는 부류가 존재했는데, 그들은 기름에 불이 붙듯 소문을 긍정하며 사제들만큼이나 재판이 열리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 건지, 그 연회에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사제들도 참석할 수 있게 규칙을 바꾸었다고 하더군요.”

한 사제의 말에 벨로트의 귀가 쫑긋해졌다. 다른 사제들도 다를 바 없이 쓰고 있던 후드를 잠시 걷어 내고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제들을 초대한다고요?”

“그것도 데벤테르 후작이 직접,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여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뇌물로 보석을 바구니 가득 담아 바치면서 말입니다.”

“…….”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를 겨냥하는 짓이라고요. 속은 우리를 조롱하려는 겁니다. 어디 와서 구경이나 해 보라고요!”

말을 하던 사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주문한 맥주는 이미 대화를 한창 나누느라 미적지근해졌지만, 새로 주문할 돈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과 끓는 속을 달래기 위해 벌컥벌컥 들이켜는 동료 사제를 보며 벨로트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렇게 된 거, 아예 그 무도회에 찾아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니, 우리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다분한데 거기에 가서 무엇 하겠습니까?”

화를 내는 다른 사제를 향해 벨로트는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무려 황태자 전하의 신붓감을 뽑으려는 연회입니다. 그만큼 많은 귀족들이 몰려들 테고, 이목은 어느 때보다 집중되어 사고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굉장한 파장을 부르겠지요.”

“……어떤 사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를테면…… 신실함을 저버린 데벤테르 후작 부부를 벌하겠다며 나타난 일부 광신도들이 나타나서 연회 날 망신을 준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직접 나서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죠. 사람을 구해서 쓰고, 우리는 재판에서 그 두 사람에게 보상금을 얻어 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하더라도, 합의는 없이 형을 받도록 하고요.”

벨로트는 세비어 장로와 접촉하여 황제가 에덴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영원불멸한 그의 치세를 원하지. 우리의 요청이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것만 아니라면 웬만한 것은 들어줄 용의가 있을 것이오.”

“당한 것을 대갚음할,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벨로트의 말에 다른 사제들이 웅성거리며 기분 좋은 상상을 토해 냈다.

“그 많던 재산이 다 날아갈 수도 있겠군.”

여관에서 사제들의 음습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들은 분풀이를 당해 당황으로 어쩔 줄 몰라 할 데벤테르 후작 부부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건배합시다. 우리의 기적을 위하여!”

“위하여!”

밍밍한 싸구려 맥주잔을 부딪쳐 들이켜는데도 맛있었다.

이게 다 그들을 잡고, 나아가서 아벨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덫인 줄도 모르고.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황태자의 신붓감을 구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장소는 이례적으로 황궁이 아니라, 데벤테르 후작가에서 소유하고 있던 연회장이 딸린 큰 저택이었다. 후작가에서 무상으로 황실에 빌려준 덕에 그곳에서 연회를 치르기로 했다.

“꼭 그곳에서 치러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

황제는 못마땅해하며 베네딕트에게 말을 걸었다. 베네딕트는 능숙하게 부황에 대한 경멸을 숨기며 꽃처럼 웃었다.

“황궁이 아닌 곳에서 해 보는 것도 새로울 것 같았습니다. 데벤테르 후작가가 소유한 저택이라면야 화려함이 황실 못지않을 것이고요.”

“……지금 황실이 그 후작가보다 못하다는 것이냐?”

“설마요. 폐하. 제가 어찌 그런 발칙한 말을 폐하의 앞에서 올리겠습니까.”

베네딕트는 다정한 아들을 연기하면서도 황제를 관찰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요즘 부쩍 예민해지셨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람을 보내 무언가를 받고 있어.’

황제는 영생에 대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베네딕트는 제 아버지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기에 고작 ‘흥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람을 통해 받는 것이 에덴에서 주는 것일 확률이 높아. 심복들만이 받는 것일 수도 있지.’

데니스와 아슬란이 설명해 준 바가 있으니 안심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멍청하게 교단에 집어 삼켜지는 꼴을 넋 놓고 지켜봐야만 했을 수도 있었다.

‘폐하께서는 교단이 딴생각을 품으면 본인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만…….’

이미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황제가 아니라, 에덴이었다. 그것도 막후에서 사람들을 부리고 있는 아벨이.

베네딕트는 제국을 광신도들의 손에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하나뿐인 반려가 될 사람을 찾는 일이잖습니까. 저도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기왕지사 하는 결혼이라면 특별하게 해 보는 게 저의 소박한 바람이었습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귀족 간에 연애 결혼이 최근 성행한다고 하나, 베네딕트는 황태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위에 따르는 책임감과 무게감을 견딜 자신이 있었고, 정략결혼이 필수적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어. 나는 사랑이 아니라, 정치적 파트너가 더 절실하니까.’

그런 이유에서 적절한 상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홀로 있으려 했던 것이었는데, 이런 이벤트에 자신의 결혼을 핑계로 써먹으리라고는 그 역시 알 수 없던 일이었다. 데니스에게 하기 싫은 일을 하니 값을 더 쳐달라고 해서 보석을 뜯어낸 것이 쏠쏠한 수확이었다.

“아니 되겠습니까, 폐하? 황태자로서 이런 낭만을 품는 것은 역시 무리일까요?”

“허허…… 항상 의젓하던 네게도 봄바람이 든 것인지. 좋다. 내 뒤를 이을 아들이 이토록 간곡하게 청하는데 아비로서 한 번은 들어줘도 좋겠지.”

“감사합니다, 폐하. 성심성의껏 멋진 연회를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네딕트가 공손하게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옆에 앉은 황후, 그러니까 베네딕트의 어머니는 이 결정이 굉장히 못마땅한 듯 보였다.

“내가 이미 네 짝으로 골라 둔 귀족가의 여식들이 많은데, 이렇게 요란하게 할 필요까지가 있겠느냐?”

“어머니, 저를 믿고 한 번만 따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머니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영애들 중에 제가 그리던 완벽한 황태자비감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내가 원하는 황태자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걸?’

베네딕트는 전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이상형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철저히 상황을 이용할 수 있으니 이용한다는 주의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 네 맘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데벤테르 후작에게 곧 연락하도록 하지요.”

황제와 황후가 있는 공간을 나와 베네딕트는 곧바로 데니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데니스? 나다. 베네딕트. 이제 이다음으로 뭘 할 거냐?”

[큰일을 도모하는 예행연습으로 누군가를 좀 치워 보고자 합니다.]

“누구를?”

베네딕트의 말에 잠시 말이 끊기더니 루스벨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아버지인 지펠론 백작의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흐음?”

***

루스벨라는 정신없이 데니스를 위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중에도 빼먹지 않고 쌍둥이 동생들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누이, 오늘은 아버지가 데벤테르 후작과 있지도 않은 친분을 들먹이면서 상단과 거래를 트려고 했어.]

[언니, 저번에는 언니를 핑계로 한 살롱에 무작정 들어가려는 걸 다친 척해서 가지 않았어. 우리의 혼처를 구하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좋은 혼처인 것 같지는 않아. 부유하지만 우리보다 죄다 나이가 훨씬 많고 포악하다는 소문이 파다한 사람들이야.]

“이런 짓을 이 아이들에게도 이제 하는구나.”

루스벨라는 한숨이 나왔다. 때로는 카일과 레베카가 부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결혼하고 나니 동생들을 아끼는 줄 알았던 지펠론 백작은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아이들인데 벌써 결혼이라니.’

조혼을 하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드물었다. 지펠론 백작가가 못사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을 팔아치우려는 것 같은 졸속 결혼은 절대 허용할 수 없었다.

혈육의 정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루스벨라는 카일과 레베카를 지펠론 백작에게서 떼어 내 줄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황태자 전하의 비를 찾는 연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 조금 어이없게도 레베카도 그 물망에 오르길 바라는 것 같아.]

“이건 또 무슨…….”

가장 최근에 받은 편지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레베카는 아직 어렸는데,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를 넘보는 지펠론 백작이 우스웠다.

[반드시 아버지는 그 연회에 참석하려고 할 거야. 누이도 조심해. 한 번도 물질적인 지원을 친정에 하지 않는다면서 우리에게 누이에 대한 원망을 표출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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