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뭔가 이상하게 조용한 것 같단 말이지.”
“뭐가 말입니까, 아벨 님?”
“다들 괜찮은 척하는 것 같은데, 실은 그게 아닌 듯해서 말이야…….”
아벨은 최근 들어 묘하게 침잠되어 있는 에덴 내 분위기를 느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어딘지 수선스러운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괜한 생각이라기엔…… 세비어 장로도 최근 날 보러 오는 횟수가 줄었어.’
아벨은 오랜 세월을 에덴의 심장이자 숨겨진 신으로서 군림한 만큼 소속된 사제들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아벨에게 어떻게 해서든 더 신임을 얻고 성력석 조각인 ‘신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신도들의 탐욕을 그는 아주 잘 알았다.
“겁쟁이 쫄보야.”
“……알렉입니다. 아벨 님. 제게도 부모님이 주신 이름이 있으니 이제 좀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싫다. 누굴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건 내 마음이지.”
“예에……. 편한 대로 하십시오.”
아벨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알렉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검붉은 눈동자가 먹이를 물기 전에 몸을 낮춘 뱀의 그것처럼 보여 알렉은 몸을 오소소 떨었다.
“저, 제게 할 말이 있으십니까?”
알렉이 침을 꼴깍 삼키며 아벨의 눈치를 봤다. 아벨은 말없이 알렉을 쳐다보며 세비어 장로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세비어 장로의 추천으로 들어왔지, 아마?’
세비어 장로는 알렉을 제 후계자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벨은 성력석의 힘을 독차지한 이후 많은 사제들을 지켜봤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죽는지를 보며 인간의 욕망에 대한 통찰력을 기른 바가 있었다.
“세비어 장로가 네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더냐?”
아벨이 알렉에게 넌지시 떠보는 질문을 했다. 어쨌거나 후임으로 점찍어 둔 이라면 뭔가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한 번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에서였다.
에덴은 보안에 철저하고 사람들이 잘 모를 법한 장소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단체였다. 들어가기도, 나가기도 힘든 점 때문에 아벨은 심복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면 바깥 상황에 대해 알기 어려웠다.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아.’
“음? 장로님은 최근 바빠 보이시던데요. 자리를 비우시는 적도 늘어나셨고요.”
‘아이씨. 설마 눈치 깐 건 아니야? 세비어 장로도 날 요즘 들어 주시하고 있던데…….’
아벨이 알렉을 의심하여 이미 세비어 장로에게 경고한 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알렉은 속으로 진땀을 흘리며 아벨을 겨우 웃는 얼굴로 상대했다.
‘세비어 장로에 이어 아벨까지 나에 대해 수상함을 감지하고 조사든, 고문이든…… 한다면, 정말 끝이야.’
알렉은 며칠 전 데니스와 루스벨라와의 통신을 되새기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들이 약속한 자유가 코앞이었다. 두둑한 의뢰 성공 보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물거품이 될 수는 없었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분주한 것 같은데…… 이야기를 안 하니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있나.”
아벨은 앉아 있던 안락의자의 손잡이를 딱딱 두드렸다. 무릎 위에는 또 놀이 장난감으로 많이 찾는 사람의 해골이 있었는데, 알렉은 그 불쌍한 누군가의 유골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무진 노력했다.
“하, 하하. 글쎄요. 저는 아직 말단이라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마 아벨 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대체품을 위해 발품을 파는 것이 아닐까요?”
“그건 당연한 거고.”
“아, 네……. 제가 괜한 말대답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벨이 퉁명스럽게 알렉의 말에 답했다. 아벨에게 있어 그를 따르는 사제들이 그의 야망을 위해 움직이는 일은 숨 쉬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었다.
거슬리면 죽이고, 새로운 사람을 데려와 채운다.
아벨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제 조부와 능력을 잃고 시끄럽게 빽빽거리던 타락한 사제들을 죽인 이후로 쭉 같은 사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날 떠나거나 배신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어. 오로지 날 위해 움직이는 말들이 필요할 뿐.’
아주 오랜만에, 그가 정말 싫어하던 배신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리아. 아벨의 능력이 통하지 않던 실패한 반쪽짜리 실험체.
그리고 그의 세뇌가 듣지 않던 건방진 배신자의 후손인 아슬란 윈체스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벨은 만지작거리던 해골도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은 아닌 척 아벨을 힐끔거리다 깜짝 놀라 옷가지를 가져왔다.
“어디 가시려고요? 장로님을 호출할까요?”
“알 거 없어. 내가 알아서 해.”
“지금까지는 저 잘만 부리셨으면서…….”
알렉이 입을 비쭉 내밀고 종알거리자 아벨의 몸이 변했다. 아이에서 어른이 된 백색 머리칼의 인간이 아닌 것이 알렉의 목을 잡아 들었다.
“컥! 커억!”
“내가 편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나 보지? 개미 새끼 주제에 나한테 투정도 부릴 줄 알고.”
아벨은 누군가 자신을 편하게 여기는 것을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수의 시종들이 아벨 곁을 지켜 왔지만, 교체되는 주기가 빨랐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 잘못, 컥, 했습니다. 죄송, 합니다……!”
알렉은 목이 졸려 숨이 쉬어지지 않으려 하는 상황에서 발버둥을 쳤다. 죽기 싫었다. 아벨이라면 성력석의 힘을 이용해 성인 남성의 목 따윈 금방 꺾을 수 있을 테니까. 언젠가 아벨이 갖고 놀다 부서질 해골이 되기는 죽어도 싫었다.
“누구도 날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오로지 나만이 사람들 위에서 모두를 깔보고 지배할 수 있다고. 알았어?”
“네! 네!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알렉은 잘못한 것도 없지만 아벨에게 싹싹 빌었다. 폭력 앞에서 사람은 무너졌고, 아벨은 그것을 즐기며 자신의 위치가 공고함을 확인하는 걸 좋아했다.
“개미 새끼야, 겁만 많은 녀석아. 너도 뭔가 이상함을 내가 잘 알고 있단다.”
“……예?”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내가 친히 나서서 네 심장을 갈라 줄 것이니, 줄을 잘 타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알렉은 시치미를 떼면서도 머릿속이 고장 난 마도구처럼 엉망으로 굴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언제부터 의심했지!’
무서웠다. 감쪽같이 속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아벨이 알렉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대면해서 들으니 혼이 쏙 빠지는 것 같았다. 아벨의 잔인하고 오만한 성정을 아는 이상, 걸리면 곱게 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증거가 없으니 미꾸라지처럼 설치는 꼴을 두고만 보고 있다는 걸 명심해라. 만일 네가 나를 배신한다면, 너는 물론 네 가족마저도 죽음을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알렉은 덜컥 겁이 났다. 데니스의 의뢰를 받아들여 첩자 노릇을 했다는 걸 들키면, 저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라 가족들까지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독실한 사제 가문 출신인 알렉의 가족들은 그를 귀찮게 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가족은 가족이었다. 그 때문에 비참하게 죽을 위험에 놓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데니스 님께 도움을 청해야겠어.’
“오늘부터 네 시중은 필요 없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으니 나 혼자서 캐내러 갈 것이다.”
“그, 그럼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가 너에게 그런 것까지 알려 주어야 하느냐? 알아서 하거라. 기왕이면 이 위화감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져와 보든가.”
“……예.”
그건 절대 할 수 없었다. 알렉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 조용함을 만들어 낸 원인 중 하나가 나라는 걸 알면 난 정말 죽을지도 몰라.’
아직도 목에 남은 아벨의 손자국이 선명했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두려움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단순히 노력한다는 말은 원숭이라도 할 수 있지. 성과를 내놓지 못하면 꺼져라.”
“……예.”
아벨은 마지막까지 알렉에게 막말을 하고서 사라졌다. 세비어 장로나 다른 사제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빨리…… 빨리 데니스 님께 연락을 드려야 해.”
급한 탓에 통신용 마도구가 손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겨우 손에 붙잡은 뒤 데니스에게 다시 연락을 걸었다.
“고용주님? 저 알렉인데요. 일을 되도록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이러다 저 죽겠어요.”
***
데벤테르 후작이 허니버터 상단의 실소유주라는 것을 성력 증진제를 샀던 사제들이 안 이후, 그들은 탄원서를 내러 수도에 모여들었다.
교단에서 막무가내인 그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힘을 실어 준 까닭도 있었다.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아벨의 심복들이 수도의 여관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북부의 벨로트 주교?”
“그러는 그쪽은 동부에서 일하는 딜런 사제로군.”
벨로트는 낯이 익은 자들을 만나고 불안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성력 증진제를 사서 복용했다니…….’
말하지 않아도 여관에 모인 사제들은 ‘신의 축복’을 아벨에게서 하사받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력 증진제의 효과를 봤다면 그것이 성력석을 가진 자들에게만 신성력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보여 줬을 테니까.
“……이러다 아벨 님께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군요.”
“세비어 장로님께서 최대한 쉬쉬하겠다고 이야기는 하셨지만…… 이제 한계입니다.”
수도의 대신전이 아니라 여관에 모인 까닭도 그러했다. 아벨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간다면 그들 모두 무사치 못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성력 증진제를 복용한 사제들은 몰랐겠지만, 세비어 장로 역시 그것을 마셔 아벨에게 들키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는 척 최대한 일이 터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재판이 곧 열리지 않겠습니까. 교단이 밀어붙이는데 설마 안 될 리가요.”
“그나저나 데벤테르 후작…… 정말 사악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로군요. 사제들을 능멸할 생각을 하다니.”
“그 부인 때문이겠지요. 하, 건방지게 감히 요즘 파티에 미쳐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더군요? 우리에게 뜯은 돈으로 사치를 부리는 걸 보자니 돌아 버리겠더라고요.”
데벤테르 후작가에 있어서 사제들이 성력 증진제로 낸 돈은 정말 푼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열이 올라 마구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욕을 해댔다.
“그거 들으셨습니까? 그 부부가 황태자 전하의 신붓감을 뽑는 파티에 참석할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