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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97화 (97/166)
  • 97화

    “고용주님 말대로 상황이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어요. 정보를 일부러 흘린 것을, 본인들의 힘으로 찾아낸 것처럼 기뻐하더군요?”

    알렉은 꾸준히 데니스에게 통신용 마도구로 보고를 했다. 이번 성력 증진제 사건 역시도, 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조심하는 선에서 성력 증진제를 마신 이들의 뒤를 캐고 있었다.

    그 덕에 데니스는 일부러 벨로트를 비롯한 사제들이 갈 만한 정보 길드를 추려 그가 허니버터 상단의 실소유주라는 정보를 흘려 뒀다. 흘려 놓은 빵조각에 홀린 새들처럼 그들은 착하게도 덫에 제 목을 집어넣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 너도 위험한 처지일 수 있지 않나?]

    그러나 데니스는 방심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최근 들어 더욱 일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물론 루스벨라의 안전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

    “뭐…… 그건 그렇죠. 특히 성력 증진제의 일로 세비어 장로가 절 약간이지만 의심스러워하는 것 같았어요.”

    알렉이 저를 바라보던 세비어 장로의 시선을 떠올리며 오싹해했다.

    ‘심증만 있는지 날 다그치지는 못했지. 그래도 증거가 생기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세비어 장로는 명색이 장로여서 그런지, 아니면 쌓아 놓은 재산이 꽤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공개 재판을 요구하는 탄원서 모임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 알렉에게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며칠째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 외출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요. 아직 아벨에게까지 이 사건이 들어가지 않아서 잠잠하지만, 에덴 내부에서는 이미 벌집을 쑤신 것처럼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요.”

    [그러니까 알아서 몸 사리라고. 이 일만 잘되면 에덴에서 꺼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오! 그거 정말이죠?”

    알렉은 희소식에 신이 났다.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이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꾹 원래 자리로 돌리려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에요. 이이와 처음에 계약했던 내용대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게 돕겠습니다.]

    “……어? 호, 혹시 데벤테르 후작부인이십니까?”

    알렉이 놀라 허둥지둥했다. 데니스가 이 통화를 공유할 여인은 루스벨라밖에 없었으니까. 알렉은 지난번의 쪽팔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부끄러워했다.

    “그…… 저번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저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지라…….”

    [그건 괜찮아요. 알렉이라고 했죠? 어쨌거나 당신에게 우리도 신세를 많이 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꼭 말하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리하지 말라는 뜻에서 루스벨라가 잠시 받은 것이었는데 알렉은 오히려 더 열심히 하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데니스야 상관없었지만.

    [조심해. 장로라는 인간들은 아벨의 능력 때문에 몇 살이나 먹은 건지 모르는 능구렁이들이니까.]

    다시 데니스가 받아 알렉에게 충고를 날렸다. 알렉은 툴툴거리면서도 그를 걱정해 주는 건가 싶어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건 저도 압니다. 속아 넘어가는 게 다행이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쓸어내리니까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알렉은 더욱 조심했지만, 홀로 있을 때 신나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드디어 광신도들의 소굴에서 벗어나 한적한 남국 해변에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뛰었다.

    [그래. 잘하고 있어. 공개 재판이 열리는 날이 되면, 그때 에덴에서 빠져나와라. 나오면 남은 뒷일은 해결해 줄 테니.]

    “엇?!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너와의 계약은 잊지 않았다. 고생한 만큼 보너스도 얹어서 줄 테니 목숨 무사히 부지해서 나와라.]

    “알겠습니다! 물론이지요!”

    통신이 끊어지자 알렉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에덴을 빠져나가면 무엇을 할지 행복한 상상의 나래에 빠졌다.

    다시 에덴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경쾌했다.

    ***

    한편, 루스벨라는 데니스로부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전해 듣고 기뻐했다. 데니스는 알렉이 에덴 안에서 어떻게 성력 증진제를 퍼뜨렸는지를 이야기하고, 제국 각지에 있는 아벨의 심복들을 공개 재판을 통해 잡아낼 수 있음을 모조리 설명해 줬다.

    “루스벨라의 도움이 컸어요. 당신이 신성력을 다룰 수 있었던 덕분에, 일이 여기까지 진척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고맙기는요. 제가 데니스한테 더 고맙죠. 이걸로 생존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루스벨라의 공방에 있었다. 루스벨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늑한 작업실 안에서 시원한 레몬청을 넣은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데니스가 대외적인 활동을 진행하며 판을 키우는 동안, 루스벨라는 안전을 최우선시하며 귀족들의 살롱을 오갔다.

    철벽같은 호위들의 보호 아래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파티에 갔다. 티파티, 살롱에서의 연주회, 누군가의 생일 파티 등에 꾸준히 참석하여 발을 넓혔다.

    물론 데니스를 덜 걱정시키기 위해 엘렌과 다이애나와 함께 움직일 때가 많았다. 사교계에 먼저 길을 터놓은 엘렌과 다이애나가 루스벨라를 이끌어 주니 무서울 것은 없었다.

    ‘데벤테르 후작가가 주는 이름값이 컸지.’

    루스벨라가 요양하던 것을 털고 일어나 적극적으로 사교계를 누비고 다니자 알아서 따라붙는 사람들이 생겼다.

    대부분 처음에는 데벤테르 후작부인과 친해져 얻을 것만 얻어 가려는 승냥이 같은 족속들이 많았으나, 루스벨라는 그것조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필요한 사람들을 솎아냈다.

    ‘황제 폐하께서 눈 가리고 아웅 한 수준의 재조사를 마쳤던 게 아쉽지만, 내게는 도움이 되었어.’

    윈블 영애의 사건으로 루스벨라를 의심했던 사람들은 미안함에 뭐라도 말을 붙이려 했다. 사실 확인도 하지 못하고 말 몇 마디로 넘어갈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는 속이 뻔히 보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모여들수록, 이목이 많이 집중될수록 루스벨라에게는 이로웠으니까.

    그녀는 호의적으로 구는 사람들에게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줬다. 귀한 진주 목걸이, 보석으로 만들어진 브로치,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값진 와인 등을 선물로 주어 호의와 부러움을 동시에 샀다.

    “남편이신 후작님과 굉장히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이런 상냥한 분이신 줄도 모르고…… 앞으로 저희, 자주 봐요!”

    때로는 굉장한 피로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죽음을 코앞에 둔 것처럼 두려웠던 밤의 하얀 괴물을 떠올리면 이런 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잘하고 있어요, 루스벨라. 고생하고 있는 것 다 알아요. 우리, 조금만 더 노력해 봐요.”

    “나보다 데니스가 더 발에 불이 붙은 것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거 다 아는데요, 뭘. 당신이야말로 힘들진 않아요?”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뺨 위로 손을 조심스럽게 얹었다. 티 하나 없던 뺨이 약간 거칠어져 있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루스벨라야말로 무리하지 말아요. 세레나에게서 들었어요. 나를…… 내 줄어든 수명을 복구할 수 있는 포션을 만드느라 밤잠을 설칠 때도 많다면서요.”

    “……들었어요? 세레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뒀는데.”

    루스벨라는 낮에는 사교계를 종횡무진으로 활동하고 밤에는 데니스를 회복시킬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게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니.’

    아슬란이 뽑아다 준 그의 피가 담긴 병을 보며 루스벨라는 굉장히 심란해했다. 인연이 끊어진 전 약혼자의 피가 지금 사랑하는 남자를 살릴 수 있는 재료가 된다니.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윈체스터 공작이 내게 피를 주면서 말한 게 있어요.”

    “뭔가요?”

    “그의 머릿속에 혼으로나마 존재하는 마리아의 말로는, 그녀의 피가 당신의 수명을 회복시킬 단서가 될 거라고는 했지만…… 어떻게 그걸 당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약으로 만드느냐는 오로지 내게 달려 있는 문제라고요.”

    마리아가 아벨처럼 살아 있었다면 그 피를 직접 사용해 볼 기회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육신은 이미 오래전 흙으로 돌아갔고, 남은 것은 후손인 아슬란뿐이었다.

    “마리아의 피가 희석된 아슬란의 피로는 추가적인 연금술 술식을 통해 신성력을 몰아내는 효과를 증폭시켜야 해요.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최악의 상황이 오기 전에 내가 반드시 해낼 거예요.”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초조함은 밤잠을 쫓았다. 졸리면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서라도 무리하며 연금술 술식을 정리한 노트와 책을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새로운 조합을 시도했다.

    “그래도 당신이 무리하는 건 역시 두고 볼 수가 없는걸요.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힘내요.”

    “당신이…… 당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게 아니더라도 신성력을 사용한 후 고통으로 괴로워한다고만 생각해도 마음이 좋질 않아요.”

    “루스벨라.”

    “내가 당신의 목숨을 빨아먹는 대가로 살아남는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정말 나를 용서할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이기적이에요. 당신을 잃고 홀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날 위해 발버둥 치는 거라고요.”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줄줄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루스벨라는 자신이 우는 줄도 몰랐기에 어리둥절해하며 눈물을 닦아 내려 했다.

    “나는 괜찮아요.”

    “……데니스.”

    그때 루스벨라를 온기가 감쌌다. 데니스였다. 우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꼭 끌어안아 주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거예요. 내 말 믿죠? 제가 하는 대로 일이 언제나 잘 풀렸잖아요. 마치 동화 속 마법처럼.”

    부드럽게 속삭이는 데니스의 목소리에 루스벨라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안락하고 따뜻한 품속에 있으니 잠시 모든 걱정은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는 안온함이 차올랐다.

    “그래요. 믿을게요. 당신도, 나도, 행복해진 미래가 올 거라고.”

    루스벨라는 한참을 주저하다 조심스럽게 데니스의 등판을 끌어안았다. 데니스는 그 작은 접촉에 움찔거렸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루스벨라가 심장 소리를 눈치채지 못하면 좋겠는데.’

    거의 고백과도 같은 소리를 듣고 기뻐하지 않을 남자는 없었다. 데니스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밖으로 심장이 탈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좋아해요. 사랑합니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경애하며 당신만을 위해 죽어도 좋아요.’

    그야말로 비겁한 인간이었다. 그녀가 후에 그보다 더 나은 인연을 찾길 바란다는 그 혼자만의 이기심으로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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