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그렇다면 게임에 적합한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베네딕트가 사냥을 계획하는 사자처럼 웃었다. 아슬란은 이런 모습의 황태자를 처음 봐서 낯설어하는 반면, 데니스는 어디 한번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차나 홀짝거렸다.
“기왕이면 여기 윈체스터 공작을 미끼로 삼으십시오. 아주 잘해 낼 겁니다.”
“응? 윈체스터 공작을? 무슨 작전을 펼치려고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나? 소름 끼치게.”
베네딕트가 정말 닭살이 돋았다는 것처럼 과장되게 그의 두 팔을 움켜쥐고 슬쩍 물러났다. 데니스는 장단을 맞춰 주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아까 황태자 전하께서 저희를 보고 치정 관계에 대해 물으셨지요?”
“……어? 설마?”
“삼각관계를 연출할 겁니다. 입방아를 찧고 싶어 하는 참새 같은 족속들이야 널렸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데니스의 여유로운 폭탄 발언에 베네딕트가 돌처럼 굳어 있다가 아슬란에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용암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못지않았다.
“뭐야, 윈체스터 공작. 이것도 상호 간에 협의한 내용인 건가? 데벤테르 후작에게 뭐라도 약점 잡힌 건 아니고?”
“……아닙니다. 제가 자발적으로 먼저 데니스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세상에나.”
베네딕트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끝내 폭소했다.
“아, 아하하! 세상에. 저 무쇠 같은 윈체스터 공작이 스스로! 치정극에 뛰어들 생각을 다 하고! 으하하!”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아, 하하. 아니, 공작. 나 그대를 다시 봤네. 앞뒤 꽉 막힌 원로 귀족들처럼 벽창호인 줄 알았거든.”
“칭찬이 아니란 것은 알겠습니다. 제 평소 인상이 그러했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지. 공작은 사람 같은 맛이 없었어. 그런데 이런 오명을 쓸 수 있는 일에 나서다니…… 정말 의외로군. 다시 봤어.”
베네딕트의 말에 아슬란은 다시 한번 그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반성했다. 선대 공작부인이신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공작으로서의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놓친 것투성이였다.
“앞으로는…… 여러모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리려 노력할 것입니다.”
“호오, 보통 각오가 아니군. 공작의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있었나?”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것일 뿐.”
있었다. 하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설명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또 루스벨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자격이 아슬란에게는 없었다.
“핑계도 대질 않는군. 뭐, 그게 윈체스터 공작이니까 넘어가겠네. 캐묻고 싶어도 말해 줄 사람이 아니니.”
베네딕트는 당연하게도 그런 아슬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민망함에 아슬란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데니스는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바보 같은 윈체스터 공작을 너무 놀리지는 마십시오, 전하. 그것보다, 이목이 한자리에 집중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연회를 열까?”
“그거 좋지요. 명분이야 거창할수록 좋습니다.”
“흐으음. 어디 보자…… 그렇지! 마침 내 생일이 다가오는군. 거기에 맞춰서 황태자비를 모집할 거라는 소문도 흘리면 딱이겠어.”
베네딕트가 달력을 바라보다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슬란과 데니스도 황태자의 탄신일이 곧이라는 생각에 동의했다.
“황족의, 그것도 다음 대 황제가 되실 분의 탄신 연회에서라면 일을 치르기 나쁘지 않죠.”
“황태자비를 모집한다는 소문이 돌면 결혼적령기의 딸을 둔 귀족 가문은 무조건 연회에 참석할 것이고요.”
“그렇지 않다 해도 중요한 볼거리이니 건국제 연회 날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자부하네.”
베네딕트 황태자는 아직 미혼이었다. 매력적인 외모에 굳건한 다음 황위 후계자라는 이유로 일찍이 황후는 아들을 유력 가문과 혼인시키고 싶어 했지만, 베네딕트가 원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도 한동안 결혼하라는 압박에 시달리실 텐데요.”
“누가 누굴 걱정해.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후작은 내가 만드는 무대에서 쥐새끼를 잡을 덫이나 제대로 놓으라고.”
“그렇다면야……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겠습니다. 나중에 무르시기 없습니다?”
“철저하기는. 계약서라도 써 줄까? 후작?”
“한 입으로 두말하실 분은 아니시니 거기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명색이 황태자라는 분께서 약속을 어기시지는 않으시겠죠.”
데니스는 베네딕트의 농을 손쉽게 쳐 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하자고 청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나야말로. 제국을 위협하는 무리를 그대들과 척결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아, 물론 윈체스터 공작도 마찬가지고.”
베네딕트는 아슬란에게도 손을 뻗었다. 아슬란은 주저하다가 그 손을 붙잡았다.
“……저 또한 일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베네딕트는 훗날 이 일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회고한다.
제국을 집어삼키려던 교단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두 사람과 손을 잡았음에 감사하면서.
***
다음 날부터 수도는 떠들썩해졌다. 거리는 가짜 성력 증진제 사건의 보도로, 사교계는 느닷없는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 물색으로.
덕분에 신문팔이 소년들은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신문을 팔아 치웠다.
“호외요! 호외! 교단에서 가짜 포션으로 사기당한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어요!”
“제 신문을 사세요! 무려 황태자비를 구한다는 특급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윈블 영애의 죽음 이후로 다소 침체되어 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는 새로운 사건들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과 추측성 발언으로 채워졌다.
“어떤 간 큰 놈이 교단에 사기를 쳐? 신의 노함이라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게야?”
“성력 증진제……? 그걸 파는 허니버터 상단이란 곳이 엄청 비싸게 팔았다나 봐. 그런데 더는 효과가 없는 걸 내놓고서도 버젓이 장사를 했다네.”
“그래서 교단이 이례적으로 상단을 고발한다네. 당연히 벌을 받지 않겠어?”
평민들은 돈벌이에 민감한 만큼 기사의 내용을 접하자마자 분노하며 빠르게 소식을 퍼뜨렸다. 신앙을 믿는 이들이 힘도 컸다. 그들은 피해자인 사제들을 동정하며 허니버터 상단을 벌해야 한다는 여론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벨로트를 비롯한 사제들이 바라는 바였다.
“시민들은 저희의 편입니다. 누가 봐도 악당은 허니버터 상단이니까요. 돈에 눈이 멀어 가엾은 신의 종들에게 사기를 치다니. 자극적인 만큼 저희에게 이입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더 늘 겁니다.”
가짜 성력 증진제를 샀다는 걸 깨달은 이후 벨로트는 칼을 갈았다. 그는 기필코 허니버터 상단을 아예 제국의 상단 목록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교단에 피해를 읍소했다.
벨로트 외에 탐욕을 부리며 포션을 무리해서 사 마시던 아벨의 심복들이 많았으므로, 교단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진짜 신성력의 존재는 드러낼 수 없어. 성력 증진제를 마시고 몸에 문제가 일어났다는 식으로 가야 한다.’
벨로트를 비롯한 아벨의 수하들의 전략은 그것이었다. 아벨이 개개인에게 지급하는 비상금마저 털어 성력 증진제를 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됐다.
‘그분이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 모가지가 잘려 나간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병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 독초 등을 섭취했다. 교단은 나날이 상태가 나빠지는 사제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결국 정식으로 허니버터 상단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했다.
벨로트를 비롯한 성력 증진제 섭취자들은 상단의 실소유주가 누군지 밝혀내고자 했다. 이런 발칙한 건수를 생각해 낸 인간을 족쳐야 분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재판에서 이기기만 하면 보상금으로 두둑한 돈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도 아니면 성력 증진제를 내놓으라고 할 생각이었다. 가짜 성력 증진제를 내놓은 것은 괘씸했지만, 그것만은 탐이 났기에 포션 제조 레시피를 달라고 할 상상에 군침이 돌았다.
성력 증진제로 손해 본 값은 보상금으로 채울 생각을 하며, 그들은 없는 돈을 또 꾸어 정보를 긁어모으는 데 사력을 다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알아본 결과, 놀라운 인물이 실소유주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벨로트는 정보 길드에서 온 쪽지를 받고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다. 종이 위로는 ‘데니스 데벤테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데벤테르 후작가가 허니버터 상단의 뒷배였단 말이야? 이자가 무슨 연유로 사제들을 농락한 거…… 잠깐. 데벤테르 후작?”
벨로트는 머릿속 기억을 되짚어 봤다. 데벤테르 후작, 분명 들어 봤다. 그것도 바로 그의 주인이자 신인 아벨에게서.
“현 데벤테르 후작부인이 내가 원하는 성력석의 대체품이다. 그 여자를 해칠 수 있는 기회를 엿봐야 해.”
“아! 설마 그래서……?”
벨로트가 무릎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수상한 점이 많았다. 하필이면 아벨에게서 ‘신의 축복’을 하사받은 사람들만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성력 증진제에 낚여 돈을 뜯겼다.
‘데벤테르 후작, 그 인간이 원흉이었구나!’
아벨이 데벤테르 후작 부인, 그 대체품을 습격했다가 그냥 돌아온 이야기는 직접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에 다분히 보복성으로 보이는, 헌금 미납 사태도 이미 들었기에 데벤테르 후작에 대한 감정은 좋을 게 없었다.
“이렇게 된 거, 크게 한 방 뜯어야겠군. 감히 신전을 상대로 장난질을 쳐? 이참에 단단히 망신을 주마.”
벨로트는 서둘러 다른 피해자들, 그러니까 신성력이 늘어나는 것에 빠져 상단에 돈을 갖다 바친 다른 사제들에게 이를 전달했다. 그들 역시도 분노하며 당장이라도 데니스의 머리채를 붙잡고 싶어 했다.
아벨이 준 힘을 몰래 키우겠다는 그들의 탐욕은 없었던 것처럼, 고결한 척하면서.
“공개 재판! 공개 재판을 열어 시민들 앞에서도 톡톡히 망신을 줍시다!”
한 사람이 열성적인 태도로 그리 주장했다. 사제들의 귀가 쫑긋해졌다.
‘귀족들에게 명예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지!’
공개 재판을 교단에서 황실을 통해 정식으로 요청한다면 제아무리 유력 귀족이라도 피할 길이 없다. 정말 중대한 사안이 아니고서야 열리지 않는 것이 공개 재판이었지만, 신전의 위신에 먹칠했다는 이유로 나설 계획이었다.
“좋소. 교단에 이를 건의하러 갑시다!”
“아, 물론 아벨 님께 이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합시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오? 걸리면 우리 다 죽은 목숨이잖소.”
사제들은 비밀을 지키자고 약속한 뒤, 헤어졌다. 그들의 품속에는 공개 재판을 요청하는 소중한 탄원서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는 배신하는 이가 없었지만, 은밀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가 있었다.
“여보세요? 거기, 고용주님이시죠?”
바로 알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