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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95화 (95/166)

95화

데니스의 말에 베네딕트는 눈동자를 굴리다 방긋 웃었다.

“아니었나?”

“전하께서는 대체 저를 뭘로 보고 있는 겁니까?”

“냉혹한데 꿍꿍이도 넘치는 것 같은 흑막?”

“소설을 너무 많이 보셨습니다, 전하.”

“상상력이 풍부한 것이라고 포장해 주면 안 되나? 내 명색이 제국의 황태자이거늘.”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흑막은 저희가 잡으려는 적 아닙니까?”

데니스가 입만 끌어 올려 웃었다. 사교계의 노련한 여우들을 상대하는 것에 질릴 대로 질린 베네딕트는 그 웃음이 ‘대가리에 똥만 차셨습니까?’라는 의미라는 걸 잘 알았다.

“크흠.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너무 냉정하네.”

“전하는 너무 장난스러우신 점이 문제이십니다. 제 냉정은 타당한 반응이었으니 이해해 주시지요.”

“에잇. 딱딱하게 굴기는. 알았네, 알았다고.”

베네딕트는 데니스에게서 원하던 답을 끌어낼 수 없음을 판단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맞은편에 데니스와 아슬란이 차례로 앉았다.

“둘이 같은 좌석에 앉을 줄도 아는군? 아직도 건국제 연회의 건으로 입궁해서 두 사람이 으르렁거렸다는 이야기를 잊지 못했는데, 정말 의외란 말이지…….”

아쉬워하는 베네딕트 황태자가 무슨 말을 더 꺼낼지 몰라 아슬란은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황태자 전하, 아까 말했던 대로 저희는 힘을 합쳤습니다. 이미 짐작하신 대로 이 일은 데벤테르 후작가의 주관하에 벌어진 일이 맞습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만큼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윈체스터 공작과 협약을 맺었습니다.”

데니스도 거들자 베네딕트는 한량처럼 웃던 것을 멈추고 정색하며 물었다.

“교단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그자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황궁에 교단의 숨겨진 귀가 있을까 저어하여 아벨의 직접적인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보안은 철저한 것이 좋았다.

‘무려 황제 폐하라는 분이 에덴의 꼬임에 넘어간 상황이야.’

조심하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웠다. 지금도 교단에서는 황실을 장악하기 위해 제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보내려 수를 쓰는 중일지도 몰랐다.

데니스도, 아슬란도 그들의 위험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중했다.

“자네들에게도 곧 소식이 들어가겠지만, 현재 제국 곳곳에서 교단의 사제들이 날뛰고 있네. 성력 증진제라는 이름을 걸고 아무 효과도 없는 가짜를 팔았다면서.”

베네딕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의 보좌관이 헐레벌떡 전해 준 소식에 경악과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허니버터 상단을 규탄하는 민원이 여러 건 접수되었다는 것이다.

“당장 상단을 벌하지 않으면 들고일어날 기세였습니다, 전하. 어쩌면 좋겠습니까?”

“일단, 푸흡, 데벤테르 후작을 불러 주게. 후작에게 일을 해결할 열쇠가 있는 듯하니.”

베네딕트는 시종일관 장난스럽고 놀기만 하는 것 같은 외양과 달리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작부터 데니스가 거느린 상단 중에 허니버터 상단이 있음을 휘하의 직속 정보부대를 통해 알고 있었다.

“말해 보게, 후작. 사기를 쳤다는 이유로 거액의 배상금을 물거나 고소당할 것을 각오하면서도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뭔가?”

“아까 말했듯이 ‘그자’ 때문입니다, 전하.”

“이봐, 난 중요한 자리에서까지 말장난을 좋아하지는 않아. 후작을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움직이는 동기가 궁금하다는 거네.”

베네딕트가 다리를 꼬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아슬란은 그것을 보며 조금 놀랐다. 황태자는 언제나 온화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만 보였기에.

“……전하께서는 운명을, 신을 믿으십니까?”

“응?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소리인가. 거기다 그 질문, 교단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한 건수가 되는 것 같다만.”

데니스의 말에 베네딕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뜬금없이 신이니 운명이니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들이대니 그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교단이 제 아내인 루스벨라를 노리고 있습니다.”

“뭐?”

“그녀를 죽이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교단이, ‘그자’가 미치도록 원하는 것이 루스벨라에게 있기 때문에요.”

“그렇다면 그것을 내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의 물건이라면…… 거래를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을 터인데?”

베네딕트는 데니스의 말에 더욱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데니스는 황태자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교단이 정말 귀족 아녀자를 상대로 살인을 계획하고 있단 말인가?”

“예.”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막 나갈 수가……?”

베네딕트가 혼란스러움에 인상을 찌푸리자 아슬란도 데니스를 지지하기 위해 나섰다.

“후작의 말에 저 또한 동의하는 바입니다. 전하. 저들은 이미 한차례 후작부인을 습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얻기 위해 숨죽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 그것이 건국제 연회의 일인가? 갑자기 후작부인이 요양을 한 연유가.”

“그렇습니다. 사실을 밝히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핑계를 댔지만요.”

“그랬나…….”

“공작까지…… 흐음. 우선 알겠소. 쉽게 믿을 내용은 아니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흐름이 그러하니 수긍하도록 하지.”

베네딕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늘 보좌관이 전해 준 수많은 탄원서들을 가져다가 두 사람 앞에 늘어놓았다. 죄다 교단의 사람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자, 그럼. 이미 엎은 물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후작?”

“물론입니다. 전하. 제가 아무 생각도 없이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님을 이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 있게 말하는 데니스의 모습에 베네딕트는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부황과 교단의 접촉을 말해 준 것이 데벤테르 후작이다.’

은밀히 황태자의 권한으로 움직이는 정보부대로도 얻지 못한 수확이었다. 그것을 근거로 당당하게 나서는 모습은 건방지기보다는 믿음직한 신하로 보였다.

“그래. 내 잘 알지. 그렇다면 말해 보게. 교단을 상대로, 승리할 필승전략은 무엇인가?”

베네딕트의 말에 데니스는 미리 준비해 온 루스벨라의 포션을 꺼냈다. 똑같이 생긴 물약이 두 종류였다.

“이것은 제 아내가 만든 포션으로, 하나는 시중에 유통되던 성력 증진제이고, 다른 하나는 어제 막 풀린 ‘또 다른’ 성력 증진제입니다.”

“또 다른?”

“예. 이 둘은 겉으로 보기에 똑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이나, 실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데니스는 말을 마치더니 무엇이 다른지 보여 주겠다며 하나를 그가 마셨다. 그리고 아슬란에게도 그가 마신 것과 같은 종류를 마시게 했다.

“지금부터 이 차이가 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저희의 주위에 사람을 확실하게 물려 주십시오.”

“알았네. 얼마나 거창한 것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되는군.”

황태자의 지시 아래 근처에서 시중을 들려고 대기하던 시종들이 모조리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방 안이 세 남자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제가 허니버터 상단을 통해 푼 것은 성력 증진제로, 신성력을 보강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일시적이지만요.”

데니스는 설명을 한 뒤 손으로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황궁 안이라 검을 들고 올 수가 없으니 손으로 직접 보여 줘야만 했다.

[루스벨라가 싫어할 거다. 고작 이런 적은 신성력 보여 주기에도 넌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이 깎일 테니.]

‘아슬란 윈체스터의 피가 저를 살릴 영약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황태자가 만만한 인물도 아니고.’

툴툴거리며 던진 신의 파편의 말은 걱정을 담고 있었다. 데니스는 소중한 유리구슬이 된 심정을 느끼며 붉은 신성력을 검의 형태로 만들어 냈다.

“……이게 무슨 힘이지, 후작?”

“신성력입니다. 전하. ‘진짜’ 신성력이요.”

데니스의 말에 베네딕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말은…… 교단 측이 오히려 제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내 말이 틀렸나?”

“아니요. 정확합니다. 교단의 사제들은 전부 가짜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그저 마력을 운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말하는 것에 책임을 질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야말로 가짜라는 것을요.”

데니스의 말에 베네딕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결 좋은 은발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젠장. 난 그저 제국의 안녕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제국의 치부가 설마 이런 식으로 드러날 줄은 몰랐네.”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엄청난 사안이었다. 막말로, 데니스가 교단의 사제들에게 고소당해 봤자 최악의 결말은 몇 년 복역하는 것에 그치겠지만, 교단이 몇백 년간 그들의 능력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은 나라의 국교를 갈아치워야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였다.

“이걸 들은 이상 협력을 안 할 수야 없지. 그렇다면 후작, 다른 쪽 물약이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이라면 자네는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할 것인가?”

“그들이 제국 전체를 속인 것처럼, 저도 그들을 속일 겁니다. 애초에 성력 증진제는 진짜 신성력을 지닌 이들에게만 반응하기 때문에, 성력 증진제에 눈이 돌아 다 마셨을 사제들에게는 증거품이 없습니다.”

거기다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진짜 신성력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말하지 않는 이상 포션 값으로 뜯긴 많은 돈을 돌려받을 방법은 전무했다.

“어떻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도 저와 제 아내가 펼치려는 게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하는 게임이 어디 있나, 데니스.”

“친한 척 내 이름 부르지 말지? 아슬란 윈체스터. 잠시만 협력 관계임을 잊지 말라고.”

베네딕트는 당연히 제국의 거대한 비밀이 드러나려는 이 사건에서 발을 뺄 생각이 없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 정말이지 사이 나쁜 친구 사이로 보이는군. 이쪽이 더 흥미진진할 정도야.’

“물론이지. 후작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내가 어떤 역할을 해 주면 되겠나?”

“바람잡이.”

“바람잡이?”

“사기를 당했다고 읍소하는 교단의, ‘그자’의 심복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재판을 열어 주십시오. 가능한 한 요란하게.”

절대 아무도 파 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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