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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94화 (94/166)

94화

‘오늘은 또 어디에서 돈을 빌릴지 막막하군.’

교단의 북부 지부 주교이자 아벨의 숨겨진 심복인 벨로트는 최근 고민이 깊었다. 돈을 꿔야 하는 일이 계속 생겼기 때문이었다.

‘성력 증진제만 아니었어도 허니버터 상단에 돈을 바치는 일 따위는 없는 건데.’

허니버터 상단을 떠올리자 벨로트의 이가 절로 갈렸다. 성력 증진제의 값이 백 골드에서 더 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왜 십 골드나 더 오른 거지? 어제만 해도 백 골드였잖아!”

“아, 이 상품이 인기가 좋아서요. 가격을 올리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

“한낱 부하직원인 저희가 상부의 지시를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사가실 건가요, 손님?”

그런 식으로 허니버터 상단은 야금야금 값을 올렸다. 벨로트는 백 골드도 비싸다고 아우성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거금을 치러서라도 사고 싶은 게 현실이었으니까.

‘돈에 환장한 놈들 같으니라고.’

벨로트는 바삐 발걸음을 상단 쪽으로 옮기면서도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상단에 욕을 퍼부었다. 이미 벨로트가 진 빚이 상당했다. 고고하던 체면을 던지고 돈을 꾸역꾸역 빌리는 일은 그의 자존심을 나날이 깎아 먹는 짓이었다.

하지만 성력 증진제를 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성력 증진제를 마시고 나면 차오르는 성력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독적이었으니.

‘조금만…… 조금만 더 사서 먹는 거야.’

마치 마약 중독자 같은 생각을 하며 벨로트는 허니버터 상단 앞에 도착했다. 그의 옷 주머니 속에는 금화가 짤랑거렸다. 아벨이 고른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비상금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벨로트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돈에 지나지 않았다.

아벨이 이를 봤다면 벨로트의 목을 날렸을 터. 벨로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성력 증진제 앞에서는 무력했다. 괴물에 대한 경외는 힘에 대한 갈망을 낳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그릇을 뛰어넘겠다는 욕망에 불을 지폈다.

‘강해지면, 나도…… 아벨 님처럼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자 아벨에 대한 두려움은 희석되고 성력 증진제를 기필코 손에 넣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상단 점포가 보이자마자 벨로트는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성력 증진제를 사러 왔네! 문을 열게나!”

성력 증진제는 벨로트 말고도 교단 내에 소문이 쫙 퍼져 사려는 사제들이 많았다. 공급은 적은데, 수요는 많으니 선점하기 위해서는 일찍부터 나와서 사는 수밖에 없었다.

“돈은 가지고 왔으니 어서 물건을 내놓게!”

‘조금만 더 늦으면 다른 사람이 와서 채갈지도 몰라……!’

쫓기는 마음으로 다급히 문을 두드렸지만, 이상하게도 직원이 나오는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기분 나쁘리만큼 조용한 상점에 벨로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뭐야. 왜 안 나오는 거야?”

평소에는 꼭두새벽부터 상품을 팔 준비를 하던 상점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불도 켜져 있지 않았고, 직원들은 어디로 갔는지 내부는 잠잠하기만 했다.

급한 마음에 보지 못했던 ‘문 닫았음’ 표시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항상 성력 증진제를 사러 오면 분주하게 돌아가던 상점을 봤기에, 벨로트는 이 낯선 변화가 갑작스럽기만 했다.

‘기다리면 오겠지. 이렇게나 잘 팔리는 물품을 안 내놓을 리는 없을 거야.’

아쉬운 쪽은 벨로트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상점 앞을 서성이던 벨로트는 무작정 판매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림은 지루했다. 죽치고 서 있는 사이 다른 사제들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주머니도 묵직한 것을 보아 뭘 사러 왔는지는 뻔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기 전에 내가 먼저 다 가져가야 하는데…….’

벨로트는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기다리던 상점의 직원들이 당도하고 문이 열렸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건가!”

“아, 이런.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그만.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겐가?! 감히 신을 섬기는 사제를 이렇게나 기다리게 하다니, 괘씸하기가 아주 짝이 없……”

“그래서요?”

벨로트의 화를 참아 줄 수 없었는지, 상점 직원이 별안간 그의 말을 뚝 잘랐다.

“뭐라고?”

“그래서, 성력 증진제 안 사실 생각이십니까? 저희 허니버터 상단에서는 고객도, 판매자도 왕처럼 모시는지라…… 무례한 고객님은 고객으로 모시지 않거든요.”

“이, 이……!”

상단 직원의 말에 벨로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벨로트는 당장이라도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성력 증진제를 내게 팔지 않을지도 몰라.’

그것만은 안 됐다. 다른 사람의 손에 성력 증진제가 홀랑 넘어가는 것을 보느니, 자존심이 상하지만 건방진 직원의 비위를 맞추는 편이 더 이득이었다.

“……됐네. 물건은 어디 있나? 돈은 원하는 대로 주겠네.”

값을 또 올릴까 봐 있는 금화 전부를 가져왔다. 벨로트는 성력을 늘리는 것에 미쳐 있었다. 직원은 그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빙긋 상냥한 미소를 띠고 포션을 내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흥. 진작에 내놓을 것이지.”

황금빛이 도는 물약이 담긴 유리병이 가지런히 담긴 바구니를 보자마자 벨로트는 그 전부의 값을 치렀다. 벨로트의 뒤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원성을 토해 내는 것이 들렸지만, 그것조차 승리자의 전리품처럼 느껴져 짜릿했다.

“또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식적인 친절이 담긴 말을 들으며 벨로트는 허겁지겁 마차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기 입에 물약을 들이부었다.

벨로트의 신성력은 엄연히 말하자면 아벨이 떼어 준 성력석의 부스러기였지만, 그는 성력 증진제를 접하고 이성을 살짝 날린 상태였다.

‘힘을 늘려야 해. 잃을 수는 없어!’

그래봤자 일시적인 증가에 그칠 뿐이었지만 충만하게 차오르는 신성력을 맛보면 돌이킬 수가 없었다. 벨로트는 순식간에 여러 병의 포션을 해치웠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싹싹 비웠다.

‘곧 신성력이 차오르겠지?’

익숙한 기대감을 품으며 벨로트는 신전으로 향했다. 늘어난 신성력을 확인하며 수련을 할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벨로트의 신경은 온통 아벨이 내린 임무가 아니라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쯤이면 신성력이 차오르는 감각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이 회복되는 감각만 전해지고, 신성력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잠잠한 것에 불길함을 느낀 벨로트였으나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지만 벨로트의 기대를 배반하고 신성력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그대로였다. 몇 번을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다.

“주교님, 거기서 무얼 하십니까? 교구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이런 제기랄.”

“에? 방금 뭐라고…….”

“이 개뼈다귀만도 못한 놈들이 감히! 나를 속였어!”

분노로 눈이 돌아간 벨로트가 상냥한 주교의 가면조차 벗어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손에 들고 있던 포션 병들이 벽으로 날아가며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베, 벨로트 주교님? 왜 그러십니까! 진정하세요!”

“그 개자식들을 다 죽여 버릴 거야.”

씩씩 콧김을 내뿜으며 벨로트가 욕설을 지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사제는 그런 그가 무서워 뒷걸음질 치다 도망갔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벨로트가 있는 북부 지부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제국 전역에 심어져 있던 아벨의 심복들이 효과가 없는 성력 증진제를 생돈 주고 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분노하고 있었다.

“괘씸한 장사치들 같으니라고. 감히 사제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 재판에 회부시켜 죗값을 톡톡히 치르도록 만들어 주마.”

와그작. 벨로트의 단단한 가죽 단화 아래에 밟힌 포션 병이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속아 넘어간 사제들은 몰랐다. 애초에 성력 증진제 따위는 없었고, 그들이 좋아하며 마셨던 것은 진짜 신성력 보유자인 루스벨라의 것이었음을.

***

“데벤테르 후작!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베네딕트 황태자가 그의 응접실로 달려왔다. 옆에서 시종이 체통을 지키셔야 한다며 잔소리를 해도 들어 먹지 않고 은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와 응접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자네가 만들어 낸 일이지? 어떻게 사제들에게 물먹일 생각을 다 하고…… 어?”

베네딕트는 신나게 속사포처럼 데니스에게 떠들려다 그 외에 초대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제국의 작은 태양에게 광영을. 베네딕트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어? 윈체스터 공작? 자네가 여긴 어찌 왔는가?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기별도 없이 오는 건 예의가 아닌데?”

베네딕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슬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아슬란은 데니스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데벤테르 후작의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건에 대해서는 송구할 따름입니다.”

“데벤테르 후작이? 자네를?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내가 황궁에서 부황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던 사이에 둘 사이에 무슨 재미난 일이 있었던 건가? 다 털어놔 보시게.”

베네딕트가 황금색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두 사람을 채근했다. 아슬란은 조금 당황했고, 데니스는 익숙한 사람처럼 조용히 그 몫의 홍차를 다 비우고 나서야 운을 뗐다.

“윈체스터 공작가와 저희 가문이 협력을 하기로 했습니다.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협력서도 썼고요.”

“호오, 자네가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니고?”

베네딕트 황태자가 묘하게 사람 긁는 화법을 사용하며 데니스를 떠봤다. 황태자 역시 사교계의 소문에 민감한 사람이었기에 아슬란과 데니스, 루스벨라 사이가 마주하기 껄끄럽다는 관계임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치정 관계는 언제나 재미있는 법이지.’

베네딕트가 금안을 반짝반짝 빛내며 부담스럽게 쳐다보는데도 데니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게 사람 잡을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윈체스터 공작에게 일부러 수작까지 부릴 정도의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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