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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93화 (93/166)
  • 93화

    “데니스, 네가 죽이겠다고?”

    아슬란의 어조는 단조로웠으나, 놀란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데니스는 고개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왜, 내가 죽이지 못할 것으로 보이나?”

    “그건…… 됐다. 너라면 무언가 생각이 있을 테니 한 말이겠지.”

    데니스의 뾰족한 말에 아슬란은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어물거리다 관뒀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지?’

    루스벨라로서는 그런 둘의 모습이 신기했다. 꼭 오래된 악우나 나눌 법한 대화여서 더 그랬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인가요? 예전부터?”

    그녀의 질문에 둘은 다른 듯 같은 대답을 내놨다.

    “음…… 맞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루스벨라.”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은 맞습니다. 후작부인.”

    더욱 알쏭달쏭한 대답에 루스벨라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마음에 걸리던 질문 하나를 더 했다.

    “둘이 친구는 아닌 거죠?”

    “아니에요.”

    “아닙니다.”

    이번에는 자로 잰 듯한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루스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렇다면 공작님과 우리의 목표가 일치하는 셈이군요. 협력 제안서를 보낸 이유는 마리아 때문인가요?”

    “마리아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 무슨 이유가 더 있나요?”

    차분한 어조. 꼿꼿한 자세와 흔들림 없는 시선의 마주침. 아슬란은 그의 앞에서 동요 없이 단단한 루스벨라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당신에 대한 부채감 때문입니다.”

    “제 말은 듣지도 않고 무작정 파혼을 통보하고 내쫓은 일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루스벨라는 아슬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짙은 녹음의 빛이 스며든 녹색 눈동자에서는 전에 없던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녀가 더는 다른 이의 앞에서 기죽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런 자신감을.

    ‘데니스는 진정 기적을 일으켰군.’

    아슬란은 씁쓸해하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대화 예절에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초조함이 느껴져 무엇이라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지나치게 잔인했고, 매몰찼습니다.”

    “…….”

    “그것을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후작부인. 이제 와 결혼까지 한 당신에게 말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알지만, 약혼자로서 당신을 믿지도, 지키지도 못했던 일. 그 모든 것에 내 책임을 통감합니다.”

    미안합니다.

    아슬란이 깊숙이 고개를 숙여 사죄를 표했다. 루스벨라는 가만히 앉아서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아슬란의 손바닥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다.

    불편한 정적 속에서 아슬란은 루스벨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데니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만약 이 사과를 거절한다면, 공작님께서는 협력을 없던 것으로 하시고 나갈 건가요?”

    “아닙니다, 후작부인. 당신이 거절하더라도 저는 이 제안을 무를 생각이 절대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절하겠습니다. 당신의 사과.”

    아슬란이 숨을 들이켰다. 폐부가 찌를 듯이 아팠다. 데니스처럼 아슬란은 신성력으로 인한 페널티가 작용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가시나무를 통째로 삼킨 것처럼 발음하는 혓바닥이 아팠다. 목구멍이 쓰라렸다. 어째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우습게도 지나간 후에야 무언가를 잃었노라 알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사과를 원하던 저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공작님.”

    음성은 지나치리만큼 덤덤했고 억양에 변화가 없었다. 루스벨라의 녹색 눈에는 어떠한 미련도 엿보이지 않았다.

    ‘아…….’

    한때는 전 약혼자였던 이에 대한 미움도, 증오도, 사랑도……. 감정의 찌꺼기마저 불타 버려 남아 있지 않은 깨끗한 눈동자를 보며 아슬란은 홀로 절망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요. 공작님은 그때를 놓치셨습니다.”

    루스벨라는 잠시 그녀가 가장 비참했을 시기를 떠올렸다. 눈물과 비탄으로 물들어 있던 밤에, 야속한 전 약혼자가 그녀를 찾아왔다면 아마 모든 것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뒤늦은 후회는 사양이었다. 그녀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을 넘어, 그들의 관계는 무(無)가 되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니 저는 공작님의 사과를 받지 않겠습니다. 이미 제게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아슬란은 루스벨라를 만나지 못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괴로웠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제게 일말의 관심조차도 거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쓰라렸다.

    ‘아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북부의 공작령에서, 루스벨라가 어쩌다 아슬란을 마주치게 되면 간절히 보내던 시선을. 그 시선에 깃들어 있던 것은 아슬란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음을.

    그것을 놓친 것은 그에게 얼마나 큰 벌이던가. 죄던가.

    다시는 가지지 못할 사랑에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으나 잘 교육받은 냉철한 이성은 그에게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물어볼 것을 요구했다.

    [그래. 나도 그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가야. 실연의 아픔은 생산적인 일로 씻어 내는 게 제일 좋단다.]

    ‘아기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실연임을 부정하지는 않는구나?]

    마리아의 허를 찌르는 목소리에 속으로라도 대꾸하지 않고 아슬란은 데벤테르 후작 부부에게 물었다.

    “허니버터 상단의 성력 증진제, 그것을 만들어 유통하고 있는 건 당신들인가?”

    “이미 답을 알고 온 것 같은데.”

    데니스의 말에 아슬란은 그의 말에 더욱 확신을 얻었다.

    “후작부인이 만들고, 데벤테르 상단의 주인인 네가 유통을 담당했겠군.”

    “그래.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네가 도울 점은 없어.”

    “언제 터트릴 계획인 거지?”

    “뭐가.”

    “모르는 척하지 마라. 데니스. 성력 증진제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아슬란의 말에 데니스는 팔짱을 끼더니 대꾸했다.

    “원하는 게 뭐지?”

    “후작부인의 안전이다.”

    “호오, 퍼트릴 심산은 전혀 없고?”

    “내 혀와 팔다리를 다 자른대도 그럴 일은 없다.”

    아슬란이 다소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해 가며 말하자 데니스는 표정을 굳히며 싸늘하게 변했다. 방금까지 싱글거리며 웃던 남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 아내는 내가 지켜. 넌 그딴 헛소리나 하려고 새벽부터 후작저로 쫓아온 건가?”

    “에덴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데벤테르 후작가의 병사들은 우수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아슬란의 말에 루스벨라가 나섰다.

    “저는 사교계의 한복판에 서 있을 거예요. 데니스가 아벨의 심복들을 솎아 내는 동안, 건드릴 수 없도록 귀족들 사이에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쉽게 저를 해칠 생각은 하지 못할 거고요.”

    “수족이 잘려 나간 괴물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에덴을 상대로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건…….”

    루스벨라는 반박하려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확실히 아슬란의 말이 맞았다. 건국제 연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습격을 받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저를 이용하십시오, 후작부인.”

    “뭐라고요?”

    “우리 셋을 두고 여전히 사교계에서 지저분한 소문이 도는 것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역이용하십시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아요?”

    “아슬란 윈체스터, 미쳤나?”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동시에 외쳤다. 아슬란은 희미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압니다.”

    그는 지금 스스로의 평판을 망쳐도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추문을 이용하라는 것, 그건 아슬란이 미련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그를 호위 겸 고기 방패로 삼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교계의 벌새들이 얼마나 이를 물고 뜯고 즐길까. 벌써부터 아찔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일이 필요하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들의 시선에 맞추지 마시고, 그들이 당신에게 절대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만드십시오.”

    “윈체스터 공작님.”

    “제가 당신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있다는 소문을 내세요. 윈블 영애의 일로 경직된 사교계는 제가 내미는 미끼를 기쁘게 물 겁니다.”

    루스벨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슬란 윈체스터가 던진 제안은 몹시 매력적인 것이었으므로.

    ‘시선은 시선대로 모으고, 나는 잃을 것이 없다.’

    아슬란은 본인이 소문으로 인해 생길 피해를 전부 감수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삼각관계는 어느 시대에서나 인기가 있었다. 하물며 공작씩이나 되는 이가 체면을 구겨 가며 유부녀에게 매달리는 꼴은 얼마나 재미있을 것인가.

    공작은 젊고, 능력도 있는 훌륭한 신랑감이나 루스벨라에게 한 제안으로 인해 결혼 적령기의 귀족 영애를 둔 집안이 피해야 할 사람 1순위가 될 것이다.

    “……시작하면 무를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공작님?”

    “이미 각오를 끝내고 왔습니다. 남은 것은 당신의 선택이지요.”

    루스벨라가 데니스를 쳐다봤다. 데니스는 루스벨라를 향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하세요, 루스벨라. 고삐를 쥐고 흔들라는 개 한 마리가 스스로 걸어들어왔지 않습니까.”

    [저, 저 말본새 좀 보게. 내가 선택한 아이에게 이상한 말버릇 물들게 하지 말거라!]

    데니스의 머릿속에서 신의 파편이 불평을 토했지만, 그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놀랍게도 아슬란 역시 그 말에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고요한 바위처럼 앉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좋아요. 당신을 철저히 이용하겠어요.”

    먼저 이용하라 한 것은 당신이니.

    루스벨라의 말에 아슬란은 웃었다. 심장이 여전히 아팠지만, 마음의 쓰라림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그깟 고통은 넘길 수 있었다.

    ‘그녀를 잃었을 때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하십시오, 후작부인.”

    아슬란은 기뻤다. 그에게 흐르는 마리아의 피에 웃었다. 기회를 준 것에 감사했다.

    “순종적인 협력자도 준비되어 있겠다, 그렇다면 내일 일을 감행하지.”

    데니스의 말에 다음 날부터 허니버터 상단은 성력 증진제를 파는 일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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