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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92화 (92/166)
  • 92화

    “그거 이리 내놓지 못해?”

    “싫다. 우리의 요구대로 당장 투자한 만큼의 즉각적인 성과를 보여 주지 않으면, 돌려줄 수 없어.”

    금으로 세공되고 푸른 성력석으로 장식된 팔찌가 소란을 일으킨 주동자의 손에서 뱅글뱅글 돌아갔다. 노인은 침음했다.

    ‘팔찌가 없는 아벨은 한낱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렇다고 당장 저들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몸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노인도 의문이었다. 분명 아벨이 성공적으로 신성력을 쓸 수 있게 된 대로 했는데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 진정하게. 제발. 나는 신이 아니야. 자네들이 곧바로 신성력을 쓸 수 있게 만들 힘은 없어.”

    “아까까지는 마음껏 잘난 체하더니, 박사도 결국 제 손주만 믿고 설치던 날파리였어?”

    “말이 심하잖나.”

    “이깟 게 심해? 우린 너희들이 돈만 처먹고 아무 소용도 없는 게 더 괘씸해!”

    한 사람이 분을 못 이기고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 경악하는 노인의 앞에서 아벨을 붙잡고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안 돼, 아벨! 어린아이에게 무슨 짓인가!”

    “아까까지는 왕이니, 신이니 뭐니 추켜세우더니. 역시 성력석만 없으면 이 애도 별거 아니네.”

    협박하던 남자는 아벨의 목에 더욱 칼을 가까이 댔다. 여린 살갗에 차가운 칼날이 닿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아벨은 겁을 먹거나 살려 달라는 소리 대신에 입을 달싹였다.

    “……어.”

    “뭐?”

    “입, 다물라고. 벌레만도 못한 돼지 새끼야.”

    아벨은 자신을 인질로 삼은 남자에게 쌍욕을 하고는 팔을 콱 물어 버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에 남자는 아벨을 놓쳤고, 아벨은 재빨리 팔찌를 되찾았다.

    “히익.”

    “괴물이 팔찌를 도로 가져갔잖아!”

    “아, 아가. 미안하단다. 우린 저 사내의 꼬드김에 넘어간 죄밖에 없어! 잘못한 건 저 사람이야!”

    아벨의 팔뚝에서 다시 푸른빛의 성력이 어른거리자 사람들은 미안하다며 아이에게 싹싹 빌었다. 마리아는 그들의 비굴한 모습을 지켜보며 꼴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만둘 줄 알았어. 아니더구나.]

    “잘못한 걸 알면…….”

    서걱.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뜨끈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어 그들의 뺨에 묻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거…….”

    손가락을 더듬거려 확인한 것은 붉디붉은 피였다. 그리고 잘린 것은 사람의 목이었다. 아벨을 인질로 삼아 노인을 협박하던 바로 그 사내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내게 덤비지를 말았어야지. 응? 벌레 같은 놈들아.”

    “으, 으아아악!”

    그것을 시작으로 아벨은 타락한 사제들을 전부 죽였다. 그들은 멀리 도망치지도 못한 채 무력한 사냥감이 되어 하나둘씩 죽어 갔다. 그들이 머물던 장소였던 신전은 붉은 피와 쏟아지는 비명으로 시끄러워졌다.

    “헉, 허억.”

    마리아는 인질의 가치가 없었지만, 아벨과 어디든 붙어 다녔으니 타락한 사제들의 뒤를 쫓아왔다. 그들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벨이 신전 안의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이는 광경을 다 봐야만 했다.

    [아벨은 인간이 아니었어. 괴물이었지. 사람을 한 번도 해쳐 본 적 없는 아이가 정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을 도륙하는 것을 보니 내가 얼마나 헛된 생각을 품었는지 정신이 번쩍 들더군.]

    마리아는 강제로 상기해야만 했다. 아벨의 팔찌에 박힌 성력석은 이름도 모를 아이들을 죽여 얻어 낸 것이라는 걸. 아벨은 그 아이들의 희생에 애도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힘이라 여기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도 절대 그녀의 의지가 아니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짓밟고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구역질이 났다. 참을 수가 없었어.]

    “아, 마리아. 왔어? 그치들이 너도 끌고 왔나 보네.”

    “헉. 허억.”

    “왜 그래. 이리 와. 나야, 아벨.”

    작은 손. 어린아이의 희고 고운 손이 뻗어졌다. 마리아는 울고 싶었다. 아벨의 손은 피로 젖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본 피만큼이나 검붉은 눈동자가 마리아를 향해 재촉하고 있었다.

    “뭐 해? 바보같이 보고만 있고.”

    “너, 너…… 너…….”

    “내가 널 죽일까 봐 그래? 넌 해치지 않아. 자아, 같이 가자.”

    “네, 네 할아버지는 왜 죽인 거야?”

    마리아가 가리킨 곳에는 노인이, 아벨 할아버지의 시체가 있었다. 노인은 굉장히 충격받았다는 눈으로 절명해 있었다. 마리아는 증오스럽던 그가 저렇게 쉽게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할아버지도 저 인간들과 다르지 않아서. 날 쥐고 본인이 신인 것처럼 너무 거들먹거리시잖아. 열 받게.”

    천진난만한 목소리라서 더욱 소름이 돋았다.

    “……그게 이유라고? 고작? 네 친할아버지를?”

    “그게 죽이지 못할 이유가 돼?”

    마리아는 덜덜 떨었다. 아벨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하품이나 해댈 뿐.

    [도망쳐야 했어. 아벨의 옆에 내가 남게 된다면 언젠가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지. 계기가 뭐든 간에.]

    바닥에는 아벨을 위협하려던 무기인 단검이 떨어져 있었다. 마리아는 겁이 나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그것을 용케 집어 제 팔을 베었다.

    “……뭐 하는 거야?”

    “널 두고 가려고.”

    촤아악. 붉은 피가 마리아의 팔에서 흘러나와 아벨에게로 뿌려졌다.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라 아벨은 차마 피하지 못했다.

    “아아악!”

    “……세상에.”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아벨에게 뿌려진 그녀의 피가 아벨의 피부 표면을 녹이고 있었다. 아벨은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단지 신성력을 무효화시키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마리아의 피는 예상보다 더 큰 효과를 보여 주며 그녀의 도주를 도왔다. 마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을씨년스러워진 시체의 신전을 벗어나 아벨이 모를 곳으로, 멀리.

    “가지 마! 이 배신자. 계속 내 곁에 있기로 했잖아! 너는 이 돼지 새끼들과는 달랐잖아!”

    뒤에서 아벨의 격한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지만 마리아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벨의 악담이 마리아의 등을 향해 퍼부어졌다.

    “배신자! 돼지 새끼들보다도 못한 배신자. 너는 절대 편히 잠들 수 없을 거야! 영원히!”

    [달렸어. 달리고, 또 달렸어. 단지 그 빌어먹을 신성력이 전혀 닿지 않는 땅으로 본능처럼 도망쳤어.]

    발바닥이 다 찢어지고 입은 옷이 누더기가 될 때까지 달려 도착한 곳은 척박한 북부였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마리아를 본 소년이 놀라더니 어른들을 불러 그녀를 구해 주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기절했다.

    [그 소년이 내 남편이자 나를 평생토록 아벨의 시야에서 나를 가려준 초대 윈체스터 공작이 되었다.]

    ***

    “……그렇게 되었다는군.”

    [전달 고맙다, 아가.]

    “아기 아니라 했습니다, 마리아.”

    아슬란이 정말 피곤해 죽겠다며 미간을 문질렀다. 데니스는 들은 내용을 토대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아슬란에게 물었다.

    “마리아의 혈액이 신성력을 가진 자에게 닿으면 해를 입는다는 건데, 어떻게 나는 네 피로 치유받을 수 있다는 거지?”

    [그거야 꼬마 너는 선천적으로 신성력을 타고난 체질이 아니니까, 괜찮다.]

    아슬란의 입을 통해 마리아가 답해 주었다. 곧 추가 설명이 뒤따랐다.

    [내 피는 신성력을 태우는 불꽃과 같다. 하니 네 체내에 남아 있을 빌린 신성력의 흔적을 내 피로 다 지워 낼 수 있을 것이다.]

    “또, 마리아의 피는 그저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약으로 작용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는 건 어떻게 믿지?”

    데니스가 날 선 목소리로 묻자 아슬란은 그 자신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내가 그 증거다. 마리아의 말에 의하면, 초대 윈체스터 공작을 제외한 모든 공작들이 인간 이상의 신체조건을 가졌다고 하더군.”

    “확실히…… 그래서 윈체스터 가문이 공작가가 될 수 있었죠. 마물과의 전투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까요.”

    루스벨라의 말에 데니스가 아슬란을 똑바로 쳐다봤다. 붉은 눈과 파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고정한 채 데니스가 아슬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 피를 가져가서 후작부인에게 포션을 개발하게 하고, 그걸 주기적으로 복용해라.”

    아슬란이 말하길, 그의 피는 여러 세대를 거쳐 오면서 마리아의 피가 희석되었기 때문에 효과가 마리아의 것에 비하면 미미하다고 했다. 그러니 가능하면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매일같이 마셔야 몸이 본래의 수명을 되찾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너는 살 수 있을 거다.”

    루스벨라와 함께. 그 말이 생략된 것을 데니스도, 아슬란도 잘 알았다.

    “대가는? 이런 귀중한 것을 그냥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어.”

    “……대가는 내 머릿속에 계속 잔류하고 있는 마리아의 혼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 맞아! 나 좀 이 저주에서 풀어다오, 꼬마야.]

    마리아는 심각하던 과거의 이야기를 하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발랄한 목소리를 되찾아 재잘거렸다. 아슬란은 침묵하며 그녀의 소리를 이번에는 전달하지 않았다.

    “정말 그걸로 충분해? 네 선조가 아니라, 네가 요구할 것은 없고?”

    “없다. 그게 다야. 욕심이 있다면…… 내가 당신들을 돕게 해 주는 것이지.”

    “당신이, 우리를 돕는다고요?”

    루스벨라가 서쪽에서 해가 뜬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기겁했다. 아슬란 윈체스터가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돕겠다고만 나서다니. 그녀로서는 퍽 믿기 힘든 일이었다.

    “에덴에 맞서 싸울 생각이라면, 내가 꼭 필요하다. 마리아의 혈통을 잇는 후손인 내가 있는 게 당신들에게도 이로울 터.”

    “그건…… 그렇지만…….”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겠다.”

    아슬란이 그 말을 하며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손을 흘깃 쳐다봤다. 두 사람의 손에는 쌍으로 맞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이미 그럴 자격도 없는 인간이고.”

    조그맣게 중얼거린 말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데니스만큼은 그 말을 들어 눈썹을 조금 치켜들었다.

    “좋아. 받아들이지. 우리가 마리아를 저주에서 풀어 주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뭐지?”

    “아벨을 죽이는 일이다.”

    “그거 괜찮네. 나도 그를 죽일 생각이었거든.”

    데니스가 상큼하게 웃었다.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이 검을 부르며 주인을 재촉하는 것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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