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91화 (91/166)
  • 91화

    ***

    “네 선조 마리아가 아벨과 다르게 실패작이었다고.”

    아슬란을 통해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니스가 읊조리자 아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실패작이었다. 노인이 목표로 했던 것처럼 아벨과 같은 적합자는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에덴의 세뇌를, 더 나아가서는 내가 계약으로 인해 잃은 수명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걸 보면 완전 못 써먹을 실패작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맞다.”

    아슬란은 순순히 긍정했다. 데니스가 기분 나쁠 수 있는 어휘를 사용했음에도 지적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졸려서 그런 것일까.

    “마리아가 이야기해 준 바에 따르면 노인이 실험체로 고른 아이는 스무 명가량이었다. 그의 친손자인 아벨을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 거리에 떠돌던 고아들로, 어디에서 비명횡사해도 누가 찾아올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흰 빵과 우유에 넘어간 아이들은 견디기 힘든 실험에 동원되었고, 대부분이 죽어 갔다. 신성력을 평범한 인간이 버티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목표로 하는 바였다. 신성력을 빼앗긴 이상 그들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본인들의 목숨은 귀했으니 목숨을 걸고 실험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힘없는 어린아이들을 데려다 실험을 자행한 것이었다.

    [나는 기어코 질긴 목숨줄이었는지, 그 가혹한 실험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불완전했다. 그들이 원한 방향이 아니었어.]

    억지로 신성력을 주입받은 마리아는 신성력에 대한 면역이 생기긴 했다. 그러나 체내에서 반발이 심했던 탓이었는지 그녀의 육체는 돌연변이 반응을 일으켰다.

    “신성력의 가장 큰 본질은 치유지.”

    아슬란의 말에 루스벨라가 동의했다. 그녀도 이 힘이 신성력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치유력이라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 본질이 뒤틀려 적용된 경우였다. 더는 신성력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녀의 피가, 살점 하나하나마저 신성력을 잡아먹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두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내 몸이 취한 최선의 선택이라고만 짐작하고 있단다.]

    마리아의 육체는 신성력으로 인한 실험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기라도 하듯, 신성력을 흡수하여 사라지게 만드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실험의 목적과 정반대되는 성질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노인은 그런 마리아를 폐기 처분을 하고 싶어 했다. 그의 실험이 성공했다는 증명을 손주인 아벨로 해냈으니, 마리아는 짐 덩어리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인간들처럼 지원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밥이나 축내는 가축과 뭐가 다르지?’

    노인이 마리아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시선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마리아는 그와 마주칠 때면 극도의 불안에 떨었다.

    [나는 그 노인이 정말로 싫었어. 그자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지.]

    신기한 특성을 얻었어도 마리아는 그저 아이에 불과했다. 노인이 마리아를 죽이려고 한다면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처분해야겠구나. 흥미로운 결과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잠시만요, 할아버지.”

    노인이 마리아를 죽이려는 때 나선 것이 놀랍게도 아벨이었다.

    “저 애를 죽이지 마세요.”

    “어째서냐. 신이 될 위대한 존재는 한낱 미물의 죽음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혼자는 심심해요. 저 애가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심심하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이라뇨. 저 애 빼고는 다 죽었잖아요. 난 저 애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같이 있어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받는 기분이에요. 짜증 나게.”

    아벨의 변덕 덕에 마리아는 목숨을 건졌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아벨에게 고맙다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 애는 날 싫어했어. 날 살린 일도 썩 달가워하지 않았지. 그렇지만 내겐 비정상적인 집착을 했어.]

    아벨은 실험의 후유증 때문인지 마리아에게 집착했다. 그녀가 자기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분신처럼, 아벨은 반쪽짜리 성공을 거둔 실패작인 마리아를 항상 끼고 다녔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어. 아직 ‘이식’을 받는 데 성공하지도 못한 사람들조차 나를 꺼렸는데도, 아벨만은 나를 부득불 데리고 다녔지.]

    어떻게 보면 그것은 과시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대상을 끌고 다닐 수 있다는 것으로 아벨은 더욱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으니.

    ‘이 애는 정말 남들과 다르네.’

    마리아도 남들처럼 아벨을 꺼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몹시 외로워서, 아벨의 기이한 집착을 애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절박했다.

    천애 고아에 정체불명의 실험을 받은 여자아이는 저주받은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정이 너무나 고파서, 그녀보다 더한 괴물에게 매달렸을 뿐이었다.

    애정이라기엔 더없이 삭막한 둘의 관계는 위태로웠지만 계속 이어졌다. 아벨 또한 그와 그나마 비슷하다고 여길 존재는 마리아밖에 없었으니까. 소년은 소녀에게 답이 정해진 질문을 했다.

    “너는 날 배신하지 않을 거지? 영원히 나와 같이 있을 거라고 약속할 거지?”

    “어차피 나에게도 너밖에 없는걸.”

    “그래. 너는 다를 줄 알았어. 돼지 같은 벌레 새끼들과 너는 다르니까. 고작 절반이지만, 나와 비슷하니까…….”

    그런 줄 알았다. 아벨도, 마리아의 세상도 언제까지나 둘만이 함께일 줄 알았다.

    [하지만 전부 착각이었지.]

    억지로 빼앗은 신의 힘과 인간의 탐욕이 합쳐 만들어진 괴물은 마리아의 상상을 뛰어넘는 재앙이었다.

    [나는 도망쳤다. 인간이라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해서 그날의 참상을 목격한 이후 아벨의 곁에 남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무서웠다.]

    아슬란은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마리아의 음성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전해 줬다. 루스벨라가 아슬란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벨은 곧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적이었으니, 정보 한 가지라도 더 긁어모으는 게 필요했다. 긴장이 역력히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슬란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대규모 학살이 있었습니다.”

    “누가 죽은 거지?”

    데니스가 끼어들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형형한 눈빛을 빛내면서.

    “실험의 주체인 그 노인과 참여했던 사람들 전부.”

    “그렇다는 말은…….”

    “그래. 마리아만은 살아남았다. 아벨이 사람들을 죽일 때 그녀만은 도망쳐 몸을 숨길 수 있었지.”

    ***

    [그날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어.]

    마리아의 덤덤하던 음성이 바뀌었다. 불안함에 떨리는 소녀를 단박에 떠올리게 할 정도로.

    언제나처럼 신의 힘을 탈취하고자 하는 목적의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온 땅을 뒤져 찾아온 신성력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잡아다 심장을 벌리고 그 안의 성력석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성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성력석의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었다.

    다만, 잘되지는 않았다. 무고한 자의 목숨을 쉼 없이 앗아 가면서도 성력을 잃은 타락한 사제들에게 좀처럼 성력석의 힘은 반응하질 않았다.

    “뭐가, 대체 뭐가 부족한 거야!”

    “박사, 네가 설마 우리에게 사기를 친 것은 아니겠지?”

    “그랬을 리가. 그렇다면 내 손주인 아벨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연구 성과에 진척이 보이질 않자 날이 갈수록 노인과 실험에 투자를 한 사람들 간의 다툼이 점점 잦아졌다. 아벨은 그럴 때마다 시끄럽다며 귀를 막았다. 마리아도 덩달아 같은 행동을 하며 소란 속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분위기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기랄! 투자한 돈도 다 떨어져 가는데, 아직도 신성력이 돌아오질 않잖아!”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신성력을 잃은 기득권층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겨우 찾은 희망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이들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진정하시지. 내가 없으면 실험도 할 수 없는 주제에.”

    노인은 멱살이 잡혔음에도 동요 없이 성가시다는 듯 그들을 밀쳐 냈다. 그 행동이 감정의 폭발에 불을 붙였다.

    “뭐라고?”

    “우리가 투자한 돈이 없었다면 우리 위에 왕처럼 군림하지도 못했을 게 어디서 감히……!”

    타락한 사제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노인은 콧방귀를 뀌며 그들을 비웃었다. 아벨을 믿고 오만해진 것이다.

    “왕이라, 틀린 말도 아니지. 당신들이 이대로 신성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내 손주를 왕으로 모셔서라도 그 목숨, 보전해야 하지 않겠나?”

    “……네놈.”

    “새로운 왕에게조차 신에게처럼 버려지지 않고 싶다면 알아서 납작 기게. 왕을 넘어 신이 될 자의 할아비에게도 공경하는 자세를 갖추고.”

    노인이 그들을 지적하고 지나가려 하자 분노에 잠식된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가지 못하게 막았다.

    “뭐 하는 짓이지? 비켜라.”

    “못 하겠다면?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지.”

    노인이 간과했던 것은, 그에게 투자한 사람들이 상당히 궁지에 몰려 있다는 점이었다. 힘만 믿고 설치던 사제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이 성력을 잃었다는 것을 감추려 했으나 영원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이대로 계속 실패한다면 우린 길거리로 나앉고 말 거야…….’

    아니면 살해당하거나.

    성력을 믿고 부정부패를 저지르거나 온갖 사고나 범죄를 일으킨 대가는 작지 않았다. 타락한 사제들에게 복수하려는 무리는 어디에나 있었다.

    부정적인 사고회로를 돌던 그들과 달리 노인은 느긋했다. 그들은 화가 났고, 노인에게 동기부여와 경각심을 줄 필요성을 느꼈다. 어디까지나 그들 기준에서 생각하여.

    “아벨! 어디 있느냐!”

    “그 애를 찾아? 여기 있어.”

    아벨과 마리아가 함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왔다. 노인은 제 손주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다 멈칫했다.

    “……팔찌가.”

    푸른 성력석이 붙어 있던 팔찌가 사라져 있었다. 노인이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주동자가 나서서 손을 들었다.

    “이거 찾는 거야?”

    그의 손에는 아벨이 차고 있던 팔찌가 들려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