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고작 며칠 잠 못 잤다고 허약해진 거냐.]
아슬란은 몹시도 피곤했다. 에덴의 배신자이자 윈체스터 공작 가문의 선조라는 여자, 마리아는 몹시도 수다스러운 성격이었다.
‘아벨이라는 자에게 세뇌당할 뻔한 일을 막아 준 것은 감사합니다. 하나, 이제 그만 좀 떠들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화장실 갈 때와 나갈 때의 마음이 다르다더니. 조상 공경할 줄도 모르고. 쯧쯧쯧.]
마리아는 처음에 아슬란을 구할 때의 절박한 모습은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윈체스터 공작가에 이어지는 혈통 속에서 잠들어 있던 마리아였으나, 아슬란이 아벨과 만나면서 기이한 오류가 생겼다.
마리아의 먼 후손인 아슬란과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먼저 알아챈 이는 마리아였다. 그녀의 영혼은 안식에 들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터라 극도의 외로움을 탔다.
[심심해.]
“응?”
[응?]
“누가 말을 한 거지?”
[너, 너 내 말이 들리는구나!]
마리아는 몹시 기뻐했다. 그녀에게 육체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아슬란을 업고 북부의 성채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아슬란은 졸지에 원하지도 않는 선조의 말 상대가 되어 줘야 했다. 머릿속에서 말이 들려오니 피할 수도 없었다.
[놀아 줘! 아가야!]
“저는 아기가 아닙니다.”
[그럼 핏덩어리야!]
“……하.”
항의라도 하면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마리아가 더 큰소리로 떼를 썼다. 귀찮게 만드는 것의 달인이었다.
주변에서는 아슬란을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대화를 주고받는 상대가 없는데 허공에 대고 대꾸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슬란이 휘하의 사람들을 싹 정리하지 않았으면 그에 대한 괴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나처럼 불쌍한 영혼을 달래 주지도 않는 냉혈한이 내 후손이라니! 아이고, 아이고오.]
칭얼거리는 여인의 목소리는 흡사 유령과도 같은 음산함을 줬다. 아슬란은 날이 갈수록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딜 가도 편안히 쉴 수 없으니 피로는 풀리지 않고 쌓여 갔다.
‘이 사람을 내 머릿속에서 내보낼 방법은 없나?’
그러다 문득 아슬란은 데니스를 떠올리게 되었다. 데니스가 그에게 기억을 되찾아 주었던 힘. 그건 평범한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데니스를 찾아가 볼까.”
마침 아슬란은 데벤테르 후작가를 찾아가야 할 명분도 있었다. 그가 자신이 데니스가 찾던 ‘배신자’의 핏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
[데니스? 그건 누구냐? 친구더냐?]
“아닙니다.”
친구라고 하기엔 데니스와 아슬란 사이에 허물없는 우정같이 말랑말랑한 감정은 없었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루스벨라의 일 때문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처신을 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슬란은 데니스와 루스벨라 앞에서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그녀를 냉정하게 내친 일부터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친구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죠.”
[화났니?]
“아닙니다.”
[그럼 슬프더냐?]
“……물어보시는 저의가 뭡니까.”
[나는 그런 시선을 안단다. 아쉬움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회한을. 나 역시 그러했으니.]
“예?”
‘그게 무슨 말이지?’
지저귀는 새처럼 경쾌하던 마리아의 음성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슬란은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며칠간 너를 귀찮게 했지. 네 의식 속에서 나를 쫓아내고 싶었지?]
아니라고 하기엔 아슬란의 눈가가 너무 거뭇해졌다. 아슬란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예.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유령에게 홀린 기분이고요. 일 처리에 지장이 생기니 불편합니다.”
[솔직하구나. 그이를 닮았어. 이제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내게 은인이었지.]
마리아의 음성이 먼 과거의 시절을 덧그리듯 아련해졌다. 아슬란은 처음으로 마리아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 선조의 이야기입니까?”
[그래. 내 남편이자 초대 윈체스터 공작의 이야기란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초대 윈체스터 공작부인이란 말인가.’
먼 선조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초대 공작부인인 줄은 몰랐다. 아슬란이 듣고 배웠던 윈체스터 공작가의 역사 속에서 저런 발랄한 성격의 여인은 없었으니까.
[그이는 참으로 대단한 사내였지. 에덴에 쫓기던 나를 두고 볼 수 없다며 거두어 주고, 보호해 주었다.]
아슬란은 조용히 마리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읽어 주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에덴의 실험체였다.]
마리아가 털어놓는 그녀의 과거는 끔찍했다.
***
마리아는 성이 없는 보통의 평민이었다. 그리고 그즈음의 에덴은 신이 인간에게 주었던 모든 성력을 회수하고 스스로를 봉인한 상태였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앗아 갔어!”
“어떻게 이럴 수가.”
“이대로라면 우리는 곧 몰락하고 말 거야.”
성력을 이용해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며 살던 기득권층은 절망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그들이 힘을 올바른 곳에 사용하지 않은 대가가 고스란히 돌아올 것을 걱정했다.
그때,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어떤 노인이 말했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오. 이 땅에서 아직 신의 힘이 완전히 거두어진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신이 봉인으로 잠들기 전, 마지막 예언이 있었지 않소.”
[너희가 반성하지 않으니 나는 이 땅을 떠난다.]
[그러나 약속한다.]
[내가 뿌린 희망의 씨앗이 운명이 준 고난과 시련을 넘어서 꽃을 피우는 순간, 나는 돌아오겠다. 진정 힘에 걸맞은 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다.]
신성력이 사라지기 직전, 힘을 보유하고 있던 자라면 들은 신의 목소리였다. 저주와도 같던 노호에 파랗게 질리고 나서야 신성력이 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희망의 씨앗이라는 건 우리의 진실된 참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소?”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아니라 새로운 축복을 받는 자가 나타난다면 말이오.”
그 말에 신성력을 잃고 보통 인간과 다름이 없어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당치도 않은 소리요! 신성력은 우리 것이오.”
“다른 이에게 넘어가느니 그것을 빼앗아 오기라도 할 것이오.”
그리 말하는 이들의 눈은 악귀처럼 핏발이 서 있었다. 타락한 성직자들은 악귀처럼 보였다. 노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내게 힘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면, 어찌하시겠소?”
“그, 그게 무엇이오?”
“보면 알 것이오. 여봐라, 끌고 와라.”
노인의 말에 하인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이 셋을 데려왔다. 아니, 아이 셋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한 아이에게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우욱.”
“시, 시체잖아.”
“이런 것을 보여 주는 의도가 무엇이오?!”
숨이 끊어진 아이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는 뻥 뚫려 기괴함을 주었다.
신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구역질을 하며 매섭게 노인을 추궁했다. 노인은 태연자약하게 주머니에 있던 것을 꺼내며 말했다.
“이게 바로 신이 말한 희망의 씨앗이오.”
노인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은 자그마한 보석이었다. 미약한 푸른 빛을 내고 있는 이름 없는 보석.
“그런 하잘것없는 보석 따위가 무슨 해결책이라고…… 잠깐.”
성을 내던 한 사람이 멈칫했다. 노인이 들고 있던 보석에서는 익숙한 힘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이 잃어버린 신성력의 기운이.
신전 내의 수십 쌍의 눈동자가 보석을 향했다. 탐욕에 젖어 일렁이는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아우성을 쳤다.
“그것 이리 내놔!”
손과 팔과 다리가 노인에게로 뻗어졌다. 당장이라도 노인을 찢어발기고 보석을 갈취하려는 자들의 기세가 매서웠으나 노인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허, 하나의 보석만으로는 이곳의 모두가 만족하지 못할 것을 아오.”
“혼자서 독점하겠다는 속내인 것을 모를 줄 알고……!”
“아니지. 우둔한 자야. 내가 데리고 온 두 명의 아이들을 보시오.”
노인이 아이들을 가리키자 그제야 보석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살아 있는 아이 둘은 소년과 소녀의 조합이었다.
“히익.”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의 쏠림에 한 아이는 두려움에 다른 아이의 뒤로 숨었다. 졸지에 홀로 그 시선을 맞게 된 아이는 그저 덤덤했다.
“아벨, 내 귀여운 손주야. 할아비가 말했던 대로 네 힘을 보여다오.”
“알았어.”
흰 머리에 검붉은 눈을 한 아이의 팔에는 노인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지만, 보다 광채가 선명한 보석이 있었다.
소년이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영원히 잃은 줄만 알았던 기적의 힘이 아이의 손바닥에서 펼쳐졌다.
푸른색의 신성력이 소년에게서 용솟음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내 야심작이지. 기특하게도 내 손주는 무사히 실험을 통한 성력석의 힘을 사용할 줄 아는 천재였소.”
노인이 소년을 사랑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끌어안았다. 소년은 무표정한 낯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쳐 냈다. 뒤에 있는 소녀는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성력석이라고?”
“신이 이 세상에 ‘우리 대신’ 남기고 간 희망의 씨앗이오. 빌어먹게도 말이지.”
노인의 말에 사람들은 헛숨을 들이켜며 분노했다. 가슴이 뚫린 죽은 아이의 시체. 노인이 들고 온 성력석의 존재. 그 조합이 뜻하는 바를 모를 수는 없었다.
“……신이 우리를 버리셨군!”
“대신 우리는 영원히 잃은 줄만 알았던 기회를 발견했소.”
노인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신성력을 잃고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던 자들에게 있어 구원이었다.
“신이 새로이 뿌린 희망의 씨앗인 신성력을 가진 자들, 그자들에게서 신성력을 빼앗아 우리가 쓰면 되는 것임을, 내 손주로 증명하였으니.”
노인이 자랑스럽다는 듯 손주, 아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리아는 그 뒤에서 벌벌 떨던 소녀였다. 노인이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실패작이 바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