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데니스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미친 사람 같았지만 조금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을 입에 담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아. 제가 웃고 있었나요?”
데니스는 제 입가를 매만졌다. 올라가 있었다.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그녀가 걱정해 줘서 고마웠다.
‘루스벨라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반대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녀에게는 과분한 은혜를 입었다. 갚기도 어려운 것이라 감히 루스벨라에게 대가를 받는 상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당신이 저를 걱정해 주는 게 너무 좋아서요. 저도 모르게 웃었나 봐요.”
“……데니스, 지금 혼나고 있다는 거 잊어버린 건 아니죠?”
“알아요. 혼나야 하는 것도 이해했고요. 윈체스터 공작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데니스가 만개한 여름의 해바라기처럼 사르르 웃었다. 그는 정말 기뻤다. 마시지도 않은 코코아가 목구멍으로 이미 넘어가 위장에서 소화까지 된 것 같은 달콤함이 느껴졌다.
“뭐가 고마워요. 당신이 내게 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니요. 제가 오히려 당신의 애정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닌데,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거죠.”
“무슨 말이 그래요?”
루스벨라가 데니스의 말에 울컥했다. 그의 몸 상태뿐만이 아니라 정신 상태도 점검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
‘얼마나 후작저에서 구박받고 자랐으면 사람이 이렇게 자라?’
루스벨라도 가정 내에서 설움을 먹고 컸지만 데니스의 말을 들으니 안타까움이 컸다. 매일같이 치유해주고 있는 선대 데벤테르 후작이 미워졌다.
“앞으로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요. 사람이 가치를 따져야 하는 재화는 아니잖아요.”
“고마워요, 루스벨라. 위로해 주려고 해서. 그런데 난 정말 괜찮아요.”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안 괜찮은 건데.’
루스벨라는 한숨을 쉬었다. 데니스에게 있어 자신이 소중하지 않은 존재라는 인식은 뿌리 깊게 내린 것 같았다. 고쳐야 마땅한 것이나, 그것보다 그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었다.
“치료, 받을 거죠?”
“아슬란 윈체스터는 정말 싫은데.”
“어린애처럼 고집 피우지 말고, 내일이라도 당장 부르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서신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늦은 밤에도 기별을 넣는 게 문제는 아닐 터였다. 사람 간의 예의라는 것이 있어 지키려는 것이었지.
“윈체스터 공작이…… 흐음. 그냥 지금 보내죠.”
“기분 나쁘지 않을까요?”
“뭐, 그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니 불쾌해할 명분도 없는걸요. 괜찮을 겁니다.”
마음에 안 들면 본인이 알아서 돌아가겠죠. 그 인간의 무식한 보좌관처럼.
데니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태연히 코코아를 쭉 들이켰다. 혀에 감도는 맛이 유난히 달콤했다. 데니스는 점점 그가 루스벨라 앞에서 말을 예전처럼 편하게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괜찮으려나?’
루스벨라도 데니스의 말을 듣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슬란의 진정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정말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면야 불편하다는 기색 하나 없이 오겠지.’
“좋아요. 지금 기별을 넣을게요.”
보내는 곳은 윈체스터 공작이 머무르고 있는 수도의 타운하우스로.
“집사, 펜과 편지지를 가져와. 다 쓰는 즉시 윈체스터 공작에게 보내게.”
“이 시간에 말입니까?”
집사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저녁도 다 먹고, 밤이 깊었는데 데니스를 보고 황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작이 그래도 된다고 했으니 염려 말고.”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루스벨라는 지체 없이 편지를 작성했다. 내용이야 간단했다.
[좋습니다. 데니스를 치료할 방법을 듣고 싶어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죠.]
집사는 시종을 시켜 그것을 공작의 앞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었다.
“주, 주인님!”
“마님! 일어나 보십시오!”
잠이 다 깨지도 않은 시각에 집사가 데니스의 침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시녀장도 혼비백산한 얼굴로 애타게 루스벨라의 침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직 깨어날 시간도 안 되었는데?’
창백한 풍경의 색으로 봐서는 동이 덜 튼 상태였다. 데니스도, 루스벨라도 의아함과 졸림으로 반쯤 감긴 눈을 겨우 떴다.
“무슨 일이에요?”
“윈체스터 공작 각하께서 이 새벽에 오셨습니다!”
‘미친 건가?’
‘바로 온다고 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설마 윈체스터 공작이 꼭두새벽부터 행차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죠? 평소라면 두 분 깨어나실 시간도 아닌데.”
“들어오라고 해. 다만, 우리가 그를 맞이할 시간은 주고.”
데니스가 귀찮게 되었다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와 같은 어조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조금 후에 내려가겠다고 밝히고 졸린 몸을 깨웠다.
‘어쩌면 늦은 밤에 기별을 넣은 복수인지도 모르지.’
아쉬운 건 그들이었다. 불평할 처지는 못 되었다.
***
손님을 맞을 준비를 끝마치고 응접실로 내려가니 아슬란이 소파에 앉아서 저택의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전에 허겁지겁 아침에 사과의 뜻을 전하러 왔을 때와 상황은 비슷했으나 달랐다.
“데벤테르 후작과 후작 부인,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슬란이 그때의 초조함은 온데간데없이 차분한 태도로 데니스와 루스벨라에게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앙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너무나 태연히.
“형식적인 인사는 그만두죠. 용건으로 바로 들어갑시다.”
“그렇다면야.”
데니스가 썩은 땅콩이라도 먹은 것처럼 질색하며 대꾸했지만, 아슬란은 그조차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이 자식, 무슨 생각이지?’
데니스는 아슬란을 경계했다. 그가 혹 루스벨라를 향한 덧없는 미련 따위를 가지고 이런 제안을 한 거라면 끔찍했다.
하지만 아슬란은 무척이나 덤덤한 낯이었다. 루스벨라를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는 눈빛에 그녀도 안심했다.
“데니스의 상황에 대해 다 알고 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데벤테르 후작부인.”
“치료법이 무엇이죠? 저희는 그게 꼭 필요합니다.”
루스벨라가 간절한 속내를 감추고 딱딱한 말투로 묻자 아슬란은 그녀를 잠시 응시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협력 제안서는 보셨겠죠.”
“봤습니다. 북부에 에덴이 세뇌로 지배하는 영향력이 꽤나 크다고요.”
“세뇌를 깨는 해답이 당신 피라는 것도.”
데니스는 기억을 찾아 준 당시에 아슬란과 한 대화를 떠올렸다. 배신자의 핏줄. 그것 때문에 아슬란의 피가 에덴, 즉 아벨의 세뇌를 깨는 데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연금술사도 겸하는 루스벨라 입장에서 아슬란의 피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사람의 피가 약이 될 수 있다는 사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배신자’의 핏줄. 제 머릿속의 혼이 그렇게 말하더군요.”
“머릿속의…… 혼이요?”
루스벨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을 했다. 데니스는 침묵했다. 그 또한 머릿속에 웬 쨍알거리는 신의 파편이라는 것이 있었으므로.
[내가 쨍알거린다고? 말 다 했느냐?]
‘제가 곤란할 때 도움 하나 보태지 않은 분은 닥치시죠?’
[고오얀 놈! 어휴, 어떻게 내가 이런 놈을 계약자로 삼아서는! 어휴!]
‘후회해도 늦으셨습니다. 못 물러요.’
단단히 토라졌는지 신의 파편은 대화를 중단했다. 쾌적한 정신 상태에 데니스는 기뻐했다.
“건국제 연회에서, 흰 머리에 검붉은 눈의 아이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기묘한 힘으로 저를 홀리려 했습니다.”
‘아벨이로군.’
외형과 능력을 듣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벨이 무슨 시커먼 속내로 아슬란에게 접근했을지도. 목표는 루스벨라였을 것이다.
“그래서?”
“인정하기 싫지만, 그 아이가 한 제안에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거의 다 된 세뇌가 깨지고 정신이 들었지요.”
“그게 ‘배신자’인가요?”
“맞습니다. 후작 부인. 그녀가 제게 직접 알려 줬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제게 ‘배신자’의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렸습니다.”
‘계속이라고?’
‘그러고 보니 안색이 영…….’
아슬란의 눈에 실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피부가 며칠 밤을 새우기라도 한 듯 푸석푸석한 것이 말이 아니었다.
“제가 두 사람을 찾아온 이유는, ‘배신자’가 당신들을 도울 것을 종용했기 때문입니다.”
“왜지? 우리를 도와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후손인 나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배신자의 핏줄이라 함이 그래서죠.”
‘후손이라고?’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데니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슬란에게 물었다.
“잠깐. 배신자라면 혹시…….”
“에덴, 교단의 심층부에 자리하고 있는 아벨의 신전. 내 선조는 에덴의 한 축이었으나 결국 그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북부로 와 기반을 잡은 이입니다.”
아슬란의 말에 의하면, ‘배신자’는 북부로 도망친 이후 먼 옛날의 윈체스터 공작 가의 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북부의 보호를 받으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루스벨라가 눈을 홉떴다. 북부는 외부인에게 굉장히 폐쇄적인 곳인데,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니 놀랄 일이었다.
“그래서 당신 피에 효능이 있는 거로군요. 선조의 이능을 타고난 건가요?”
“이능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습니다. 제 선조의 말에 의하면 이건 아벨이 아직 인간이었을 때, 그러니까 제국이 건국하기도 전에 행한 실험으로 얻게 된 능력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대항마인가.”
“그렇소. 후작. 전부 이야기를 하려면 몹시 길어지겠군요.”
아슬란이 피곤함이 뚝뚝 떨어지는 손길로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쉴 새 없이 선조인 ‘배신자’가 소리치고 있었다.
[전부 말하거라! 얼른! 얼른! 내가 성불해서 윈체스터 가문에서 벗어나려면 저들만이 희망이니!]
아슬란은 졸렸다. 그도 어서 선조라는 그녀를 보내고 편안한 머릿속을 되찾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