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건 이미 아는 사실이잖아.’
몇 시간만 더 일찍 이 서신을 봤다면 대체 데니스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지, 또 아슬란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털어놓으라고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루스벨라가 싱거움과 착잡함을 동시에 느끼며 편지를 구기려던 그때, 가장 마지막에 있는 글씨를 보고 경악했다.
[둘째, 이게 진짜 서신을 보낸 용건이요. 데니스의 깎여 나간 생명력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소.]
“뭐라고?”
우당탕. 루스벨라가 앉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섰다. 그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회복에 좋은 약초와 희귀한 재료들도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그대가 데니스 데벤테르를 살리고 싶다면, 언제라도 좋으니 내게 기별을 넣어 주시오. 그대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대가 없이 알려 줄 테니.
아슬란 윈체스터로부터.]
“대가 없이, 라고……?”
루스벨라는 그 문장을 보고 아슬란의 머리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아슬란은 냉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북부의 이익을 최우선시했으며, 그 자신이 손해 보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 훌륭한 영주, 그게 아슬란이었다.
‘그런데 아무 대가도 걸지 않는다고?’
“무슨 생각인 거지?”
아슬란의 의중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아슬란이 그럴 성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데벤테르 후작가가 상대라면 이것은 큰 기회였다.
남부의 넓은 곡창지대와 무역 항로를 기반으로 쌓은 부가 넘치는 데벤테르 후작가. 그 후작가의 가주인 데니스의 생명력을 늘릴 방법이니 천금을 주고 사도 아깝지 않은 일이었다.
‘이게 진짜라면……. 데니스를 살릴 수 있어.’
루스벨라는 예상했다. 데니스에게 신성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면 듣지 않을 것임을. 그는 그녀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포기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다 해도 개의치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그래서 방법을 찾아보려 연금술 전공 서적 중에서도 치유에 해당하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고 있었지만…… 희망의 불씨가 꺼져 가는 것을 확인받을 뿐이었다.
“방법이 나타나서 다행이긴 하지만, 아슬란 윈체스터는…… 그만큼은 정말이지 수상한데.”
찜찜한 마음으로 서신을 노려보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스벨라는 서신을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들어오라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데벤테르 가의 기사였다.
“저어, 마님.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이만 후작저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창밖은 어느덧 해가 지고 어슴푸레한 그늘이 깔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의 회복 치료제를 만드느라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공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후작님께서 걱정하셔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신가 염려하셨고요.”
기사가 말을 얼버무렸지만 루스벨라는 뒷내용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나 에덴의 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것이겠지.’
데니스가 걱정해 준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자기 몸은 아끼지 않으면서, 그녀만 위한다는 것이 싫었다. 잔소리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다.
“알겠네. 지금 채비해서 후작저로 돌아가도록 하지.”
“저는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기사가 정중히 묵례하고는 문을 닫고 갔다. 루스벨라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아슬란의 서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겠어.’
데니스가 그녀를 위해 해 준 것들은 반짝이는 기억의 상자에 고이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소소한 행복부터 거창한 규모의 기쁨까지, 전부를.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 두꺼운 마음의 벽을 넘어 사랑하게 된 사람이었다. 지켜 주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데니스에게 서신을 보여 주면서 말해야겠어.”
그를 치료할 방법을 찾았으니 얌전히 협조해 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숨기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왜 거짓말을 했는지 반드시 이유를 듣겠다고 결심했다.
‘계속 회피한다면 볼을 쭉 잡아당겨서라도 털어놓게 할 거야.’
중대한 결심과 달리 가는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나쁘지 않았다.
***
후작저로 돌아온 루스벨라는 씻고 난 후 데니스를 불러 조용히 따뜻한 코코아를 마셨다. 데니스 앞에도 코코아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마시멜로까지 동동 띄워서.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뭔가요?”
데니스는 사실 코코아를 보자마자 긴장하고 있었다. 코코아는 데니스가 루스벨라에게 어린 시절을 털어놓으며 함께 마시던 음료였다.
‘필시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구나.’
루스벨라가 그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일까. 긴장되었다.
“저 오늘 혼나나요?”
그래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일부러 말을 장난스럽게 던졌다. 그에 따른 루스벨라의 반응은…… 차가웠다.
“네.”
“네?”
“혼날 거라고요, 당신.”
“……화 많이 났어요?”
“네.”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 단호한 눈매와 입가. 팔짱을 낀 두 팔. 데니스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 바닥으로 시선을 직행했다.
“……알았어요?”
“뭘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정확히 무슨 거짓말을 하셨는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알려 주지 않으셔서.”
뼈가 담긴 말에 데니스는 마저 어깨도 움츠렸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걸 하면 오히려 루스벨라의 화를 더 돋울 것 같아서 관뒀다.
“잘못했습니다.”
“뭐가요?”
“신성력을 사용할 때…… 제가 치러야 할 대가가 별것 아니라고 거짓말해서요.”
처연한 미남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미모에 넘어가지 않았다. 데니스는 그런 그녀를 예상했기에 고개를 슬그머니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루스벨라? 신성력을 쓰면 쓸수록 그에 비례해 제 생명력이 단축된다는 걸.”
“더 있잖아요.”
“네에……. 실은 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요.”
데니스가 결국 남은 것들을 모두 토설했다. 루스벨라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다디단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수명은 당신의 뺨을 만졌을 때 알았어요. 몸 상태가 말이 아니더군요.”
“아, 그때.”
데니스가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루스벨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나머지 그녀가 치유사라는 점을 잊고 틈을 내주고 말았다.
“……왜 내게 숨기려고 했어요?”
“듣자마자 당신이라면 그만두라고 했을 테니까요.”
“그렇게 날 잘 안다면 더더욱 이야기했어야죠.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 아니에요.”
루스벨라의 목소리가 잠시 격해졌다. 데니스는 다시 고개를 수그린 반성하는 강아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소 주눅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결책 같은 건 없어요.”
“뭐라고요?”
“방법은 찾지 않아도 없다는 걸 알아요. 제 머릿속에 있는 신의 파편이 말해 줬거든요.”
루스벨라는 몇 초간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화를 냈다.
“……감자랑 고구마예요? 캐도 캐도 왜 숨긴 게 또 나와요?”
“잘못했습니다.”
“고쳐요.”
“네.”
데니스가 곱게도 순종했다. 루스벨라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이마를 짚다가 그만뒀다.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내 봤자 무엇하겠어.’
그럴 바에는 빨리 그녀가 가져온 소식을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의 시간은 빠져나가고 있었으니.
“본론부터 말할게요. 데니스가 내준 윈체스터 공작의 협력 제안서 뒤에 내게 주는 서신이 붙어 있었어요.”
“그 새…… 아니 그 인간이요?”
‘방금 욕하려던 건가?’
루스벨라는 데니스의 말을 지적하려다 말았다. 그녀에게도 아슬란은 개새끼였다. 욕해도 되는 사람에게 욕을 쓴 게 무슨 죄겠는가. 그녀는 합리화로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여기, 그 서신이에요. 그가 당신의 치료법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단언하지 말고, 읽어 봐요.”
데니스는 루스벨라의 손에서 아슬란의 서신을 건네받고 종이에 구멍이 날세라 빠르게 읽었다. 다 읽고 난 후 그는 차분히 말했다.
“개소리일 겁니다. 무시하세요. 루스벨라에게 접근하려고 아무거나 던지는 개수작입니다.”
‘개소리에 개수작이라고 했네.’
침착해 보여도 데니스가 많이 동요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가 그녀 앞에서 고운 말만 쓰다가 갑자기 저럴 수는 없었다.
‘그 자식이 왜 그러는지 짚이는 구석이 있긴 한데.’
데니스는 맹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가 돌려준 아슬란의 기억이 어디까지인지 그는 모른다. 그가 ……한 상태 이후는 알 수 없는 선의 일이니까.
“진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면 어쩌려고요? 게다가, 윈체스터 공작은 당신이 내게도 말하지 않은 당신 상태를 알고 있었잖아요.”
“그건…….”
‘현재의’ 아슬란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슬란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기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윈체스터 공작을 한번 만나 보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협력 제안서도 검토해 봤을 때 나쁘지 않았고요.”
“……그건 그렇죠. 설마 아슬란의 피로 에덴의 세뇌에 저항할 수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아슬란 윈체스터는 데니스도 루스벨라로서도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에덴에 복수하기 위한 대항마로서의 그의 가치는 월등히 높았다.
데니스 또한 루스벨라가 승낙할 것을 짐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치료법이라니……. 전혀 믿기지가 않는다고.’
데니스는 당장이라도 아슬란을 찾아가 묻고 싶었다. 무슨 꿍꿍이냐고. 아슬란이 루스벨라에게 가진 감정을, 미련을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무슨 생각으로 제게 치료법을 제공해 주려는 거냐고.
“아무 대가도 없다고 했어요. 그거면, 속는 셈 치고 불러 봐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탐탁지 않습니다.”
“저도 그래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살릴 수 있는 돌파구가 생겼다면 그게 어디의 누구라도 달려가서 제발 알려 달라고 애원했을 거예요.”
루스벨라의 말에 데니스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