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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87화 (87/166)

87화

“마님! 오셨어요!”

“응. 세레나. 바로 포션을 만들 준비를 해 줘.”

“알겠습니다! 제가 잽싸게 준비해 드릴게요.”

공방에 도착한 루스벨라를 세레나가 반갑게 맞이했다. 루스벨라는 세레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두운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세레나는 바쁜 탓인지 루스벨라의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리를 비웠다. 공방에 일하는 사람이 많아진 탓에 세레나의 일거리도 늘어난 탓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가짜 성력 증진제의 핵심인 신성력을 주입하는 방. 루스벨라 전용의 방 안에서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데니스가 감추는 것이 더는 없다고 했지만, 루스벨라가 진찰해 본 결과, 그는 이미 거짓을 말했다.

‘상태가 심각해. 생명력이 거의 고갈된 수준이었어.’

20대 청년의 심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오래도록 앓아 온 병약한 노인의 심장이라고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만한 상태에 덜컥 겁이 났다.

‘데니스는 크게 지장을 줄 페널티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대로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과연 그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1년? 1년도 사치였다. 기껏해야 3개월에서 6개월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돼.”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물줄기가 되어 고운 드레스 자락 위에 자국을 남겼다.

데니스 데벤테르가 죽는다. 이 말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관 속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 백합에 둘러싸여 있을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루스벨라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루스벨라는 그녀의 안전이 보장된 이후의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있었다. 그 상상 속에서 그녀는 데니스의 곁에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제 목숨을 갉아먹는 짓을 해서까지 그녀에게 신성력을 가르치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니,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위한 헌신에 고마움을 넘어 죄책감마저 들었다.

‘끔찍한 건 그도, 나도 멈출 수 없다는 거야.’

데니스가 무슨 이유로 제 생명까지 바쳐 가면서 그녀를 살리려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의 남은 생명력이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당장 신성력 수업을 중단하고 그를 살릴 방도를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에덴에 대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때였다. 루스벨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성력을 배워야만 했다. 아벨, 그 괴물에 맞서 싸울 대항마는 루스벨라 그녀 자신뿐이었기에.

루스벨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데니스가 그녀의 신성력이 개화하는 것에 저어하던 모습을.

“그게 이런 의미였던 걸까.”

신성력을 배우는 것을 중단한다면, 아벨을 상대할 수 없는 루스벨라가 죽는다. 반대로 신성력을 데니스가 계속 사용하게 된다면, 그가 죽는다.

어느 쪽도 선택하기 싫었다. 루스벨라는 데니스도 그녀도 살길 원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단지, 삶을 원했을 뿐인데. 하늘이, 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신이시여.”

울음을 터트려도, 소리를 질러도 신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잊힌 진짜 이 세계의 신은 봉인 당해 움직일 수 없다.

살고 싶다면, 인간의 힘으로만 위기를 뚫고 나가야 했다. 걱정으로 낭비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행동해야 했다.

‘그도, 나도 반드시 살릴 거야.’

데니스에게 신의 예언을 받았다. 루스벨라의 죽음을 예지한 그 예언은 분명 살아남으라는 기회를 준 것이라고 그녀는 믿기로 했다.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게 되고 만 데니스 또한 살릴 방도를 찾아낼 것이다.

문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레나가 왔구나. 루스벨라는 황급히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눈가가 발갛게 붓지 않아 다행이었다.

“……마님? 저 왔는데 아까 우는 소리가 들려서……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었나요?”

세레나가 우물쭈물거리며 루스벨라에게 물었다. 루스벨라는 미리 준비한 핑계를 썼다.

“아니야. 그냥 포션용 약재를 들여다보다가 매운 냄새가 나는 걸 실수로 맡았나 봐.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래요? 휴우, 그럼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세레나는 걱정을 씻어 내고 다시 활달하게 웃으며 루스벨라의 포션 제조를 도왔다. 둘은 가짜 성력 증진제를 새로 더 제작하고, 추가로 며칠 후에 내놓을 ‘달라진’ 성력 증진제도 만들었다.

마지막에 신성력을 첨가하지 않아 그냥 평범한 마력 증진제와 다름이 없는, 말만 성력 증진제를.

“신기하네요. 정말 감쪽같아요!”

“해맞이꽃을 빻아 첨가하면 비슷한 황금빛이 돌게 할 수 있거든.”

루스벨라가 홀로 연금술을 익힐 때 얻은 지식 덕분이었다. 신성력을 넣었을 때와 유사한 황금빛이 도는 유리병을 보고 세레나는 도저히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걸로 신전 측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겠지.’

가짜 성력 증진제는 허니버터 상단이 내놓는 즉시 사라지고 있었다. 마약 같은 중독 성분이 일체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아벨의 심복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효과를 보고 눈이 뒤집혀 하나라도 더 사 모으고 있다고 했다.

한 번 맛본 선악과를 그들은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더는 성력 증진제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상단을 뒤엎어서라도 내놓으라고 할 터.

‘그때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루스벨라가 주먹을 꾹 쥐었다. 하얀 뼈대가 보이도록 세게.

“오늘은 조금만 더 서두를 수 있을까, 세레나? 어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생겨서.”

미안함을 담아 세레나에게 부탁하자 그녀는 문제 될 것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잠시 갸우뚱하더니 루스벨라에게 질문했다.

“음? 후작님과 관련된 일이신가요?”

“……어떻게 알았어?”

“마님은 오로지 후작님과 관련된 일에만 감정을 비치시더라고요. 후작님이 공방에 오셨을 때는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셨고, 지금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어두우셔서 후작님과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어요.”

세레나는 주제넘은 추측이었다면 정말 죄송하다고 루스벨라에게 말했다.

‘내가…… 그에게 많이 감정을 터놓고 있었구나.’

사랑을 자각하게 되었다지만, 제삼자를 통해서 듣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니야. 괜찮아. 틀린 말도 아니고.”

루스벨라는 손에 들고 있는 약초 다발과 미리 찾아 둔 연금술 서적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을 보고 세레나가 헤헤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걸로 후작님께 뭔가 만들어 드리고 싶으셔서 일찍 가 보시려는 거죠?”

“……맞아.”

데니스를 위한 치료회복제를 만들 참이었다. 공방에 그가 구비해 둔 온갖 재료와 관련 서적이 다양한 것에 몹시 감사해하고 있었다.

‘생명력을 치유하는 포션은 들어 본 적이 없지만, 내가 가진 신성력을 이용한다면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게 루스벨라가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데니스의 생명력이 줄어들었다면, 역으로 신성력을 주입함으로써 그의 잃어버린 수명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니스가 요새 일을 너무 많이 처리하는 것 같아서,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포션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

핑곗거리는 입에서 술술 나와 줬다. 순진한 세레나는 루스벨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어머, 어머 하며 좋아했다.

“후작님과 마님의 사이가 좋아 보이셔서 정말 기뻐요. 다들 처음에는 걱정했거든요.”

“아…… 고용인들이?”

“네. 데벤테르 후작가에 소속된 기사분들도요. 지금 후작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모두 후작님을 아끼시는 분들이시거든요.”

세레나는 수줍게 웃으며 저의 오라버니인 제이크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후작님을 몹시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분이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만큼, 행복한 가정을 이루길 바랐기 때문에 저도, 다른 분들도 후작님과 마님이 서로 아끼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아요.”

“……그래. 고마워.”

루스벨라는 실수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데니스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그래서 그를 절대 죽게 하지 않겠노라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느라.

“아, 후작님께 드리는 선물이라면 제가 포장도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고맙지만 그건 사양할게. 이건……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물약을 개발해야 할 것 같아서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거든.”

“그렇다면 다 만들어지면 그때 제가 도울게요!”

“응. 그때 맡길게.”

루스벨라는 애써 미소 지었다. 심장이 아팠다. 마음의 고통 때문이었다.

그도, 그녀도 아득바득 살아남아야 하는 삶에 대한 피로였다.

‘살아남을 거야. 그도 죽게 놔두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 만들 것이다. 반드시.

***

세레나를 퇴근시키고 난 후, 루스벨라는 조용히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데니스가 준 윈체스터 공작의 협력 제안서를 읽었다.

‘응? 이거 두 장이 하나로 붙어 있잖아?’

편지지가 미묘하게 한구석이 붕 떠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두 장이 겹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떼어 내었을 때 뒤에 붙어 있던 종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초에 가져다 대자 글씨가 떠올랐다.

그곳에는 아슬란 윈체스터가 루스벨라에게 전하는 비밀과 제안이 담겨 있었다.

[친애하는 데벤테르 후작 부인에게.

데니스 데벤테르라면 필시 그대에게 이 서신을 주고 선택권도 맡겼겠지. 그대가 지금 이 편지를 읽었다면 내 의중이 무엇인지를 의심할 것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옛일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대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어 이 서신을 보내는 바이오.

첫째, 데니스 데벤테르가 검을 쥐고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은 없게 하시오. 그랬다가는 그는 순식간에 생명력을 잃고 죽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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